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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게 종교적인 민족
종교의 우주는 코스모스
종교란 학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결국 하나의 ‘우주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주라는 연극의 각본이 곧 경전이라고 믿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똑같이 ‘우주’라고 번역되어 자주 혼동을 일으키는 영어의 세 단어 ― 스페이스(space), 유니버스(universe), 코스모스(cosmos) ― 에 관하여 우선 구분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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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시민천문대 전경 |
스페이스는 인간이 장악할 수 있는 우주 공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주 탐험, 우주 특파원, 우주 전쟁, ……, 등은 각각 space exploration, space reporter, space war, ……, 등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유니버스는 별, 은하, 우주로 채워진, 천문학의 대상이 되는 객관적 우주를 지칭하는 말이다. 즉 어떤 책의 제목이 유니버스라면 그 책은 천문학 교과서라고 생각하면 된다. 코스모스는 유니버스에 인간의 요구사항이 많이 들어간 주관적 우주를 말한다. 예를 들어, 바둑 두는 사람들이 바둑판은 하나의 우주라고 주장할 때 그 우주는 코스모스인 것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우주는 물론 코스모스를 의미한다. 즉, 유니버스에 종교의 원리가 더해진 코스모스이다. 우리 민족이 숭상해온 우주 역시 코스모스라고 본다면 우리는 태곳적부터 종교적인 민족이었다고 말하여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종교들은 한결같이 우주를 숭상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러한 바탕 위에 불교나 크리스트교 같은 전래 종교들도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크리스트교 신자들은 창조주인 ‘하나님’과 애국가의 ‘하느님’을 동일시하면서 정신적으로 더욱 안락함을 느꼈던 것이다.
태초에 빅뱅이 있었다?
나는 대전시민천문대 명예대장을 맡고 있어 일과 후 가끔 그곳에 들려 청소년과 시민들에게 우주를 설명하여 주기도 한다. 천문학자들의 연구를 목적으로 세워진 소백산천문대 같은 곳은 아무 때나 학생과 일반인들에게 별을 보여 줄 수 없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항상 별을 볼 수 있는 천문대를 따로 지을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것을 시민천문대라고 한다.
대전시민천문대를 몇 년간 들락거리다 보니 스님들도 만나고 목사님들도 만나게 되었다. 시민천문대까지 일부러 찾아온 그분들의 우주에 대한 호기심은 정말 대단하였다.
목사님들에게 이 우주가 얼마나 큰지를 이야기하면 처음에는 대체로 당황해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겨우 태양계 나부랭이나 만든 ‘절대자’가 아니라 엄청나게 큰 우주를 만든 ‘절――대자’임을 깨닫고는 더욱 행복해한다. 빅뱅(Big Bang) 우주론을 설명한 후 성경의 첫 구절 ‘태초에 빛이 있었다’를 ‘태초에 빅뱅이 있었다’ 같이 해석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설명하면 그때는 어김없이 ‘할렐루야’ 외치는 것이다.
스님들하고는 삼천세계에 대하여 논하였다. 내가 여러 은하들의 세계를 삼천세계로 간주하면 문제가 없느냐 되물은 것이 기억난다. 목사님이랑 이야기하든 스님이랑 이야기하든 결국은 종교에 대한 나의 짧은 지식 때문에 중단되고 만다. 하지만 종교의 세계에서도 유니버스에 대한 지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을 수가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종교에서 말하는 코스모스는 결국 유니버스를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이 깊은 우리 민족
우리 토속 신앙에서는 우주는 더욱 절대적인 비중을 갖는다. 사람은 북두칠성의 점지를 받고 태어나 죽어도 결국 칠성판 위에 눕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민족의 일원이 되려면 북두칠성 정도는 꼭 알아야 하겠다. 하늘의 북쪽을 가리키는 북극성은 큰곰자리의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자리 사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북두칠성의 끝 두 별을 연장하면 북극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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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밤 자정 무렵의 카시오페이아, 북극성, 북두칠성 |
우리 민족이 그렇게 종교적인 데에는 ‘정이 깊은’ 민족성도 크게 기여를 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많이 사라지기는 하였지만, 우리는 아직도 술을 마시면 한번에 끝내는 일이 드물다. 기어이 2차, 3차까지는 가야 비로소 헤어질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도 비합리적이라고 보거나 수치스럽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의 전통적 음주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서양의 술은 오크 통에 보관하면서 먹고 싶을 때 조금씩 따라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술은 전통적으로 담그는 것이기 때문에 익으면 하루 이틀 안으로 마시지 않으면 쉰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독이 빌 때까지 마시는 것이 우리의 음주 문화로 정착되었다. 어디 아는 사람뿐인가. 지나가는 나그네까지
“자네 이리 와서 한잔 하게.”
불러 나누는 것이 우리의 정서였던 것이다. 이것이 현재에 남아 2차, 3차로 둔갑한 것이다. 술잔을 돌리는 습성도 자기가 마실 술을 차마 자기 잔에 따르지 못하는, 선비다운 정서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비위생적인 것이 사실인 만큼 정서는 잊지 않더라도 개선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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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재(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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