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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불국사 ①

2005.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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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한다’는 토함산 동쪽 정상 못 미친 곳에 석굴암이 있고 불국사는 서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1995년에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불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불국사(佛國寺)는 이름이 말해 주듯 흔한 이름의 절이 아니다. 최치원은 불국사가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였다고 기록했고 한때 화엄법류사(華嚴法流類寺사)라고도 불렸다. 불국사는 경덕왕 10년(751)에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나 이보다 오래 전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첫째는 눌지마립간(417~457) 시절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고 둘째는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이차돈이 순교한 다음해인 법흥왕 15년(528),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과 기윤 부인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셋째는 문무왕 10년(670)에 불국사에 무설전을 짓고 의상대사와 제자 오진 등 열 사람의 대덕으로 화엄경을 강설했다고 한다. 신문왕 1년(681) 4월, 가섭과 아란 상이 조성되었다는 기록도 '복장기'에 나와 있다고 신영훈은 적었다.


'불국사, 김대성 발원 창건' 가장 유력



그러나 가장 유력한 것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으로 김대성('삼국사기'에는 김대정)이 석굴암은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는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창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했지만 혜공왕 10년(774)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지만 정확한 완성의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김상연 박사는 이종상(李鐘祥, 1799~?)의 시 '등불국범영루'에는 ‘스님은 39년에 완성했다 하네’라는 구절이 보이는 것을 감안할 때 원성왕 6년(790)에 완공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적었다.1) 그러므로 불국사는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설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최치원도 그의 시에서 ‘임금이 주인이 되어 친히 이룩하시니’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볼 때 왕실의 원찰로 조성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석굴암이 먼저 준공된 이후 불국사는 더욱 활발하게 건설이 진척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국사의 석축을 쌓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총 공사기간이 30년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불국사를 전면에서 바라볼 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 당시에 건설된 8세기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들은 임진왜란 전까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으며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복원 공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불국사 전경(사진lake2030).


〈절대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

불국사를 이해하려면 이 땅이 곧 불국토라고 믿었던 신라의 독특한 불교관을 이해해야 한다.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서처럼 왕실에서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후 민간신앙으로 이어지는 순서를 밟지 않았다. 즉 불교가 신라에 도입되는 초기에 불교를 수용하는데 다소의 저항과 반발이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불교가 당면한 문제는 불교가 외래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은 신라가 불교와 인연이 없는 곳이 아니라 본래부터 불국(佛國)이었다고 믿음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성립된 불국토사상은 불교가 우리의 종교라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한다. 이 단원은 정병조의 글을 주로 참조했다.

신라의 불국토사상은 당대에 전해지던 몇 가지 설화로서도 알 수 있다.

첫째는 전불가람지(前佛伽藍地)에 대한 것으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는 전불시대(前佛時代)의 일곱 개 가람 터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가섭불이 설법했다는 황룡사이다.

둘째는 진흥왕이 불상 조성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 배에는 철과 황금이 가득 있었고 서축의 아육왕이 보낸 편지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석가삼존상을 만들려다 실패했으니 인연 있는 땅에 가서 성공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진흥왕은 아육왕의 기원대로 동왕 32년(573)에 아육왕이 보낸 재료로 장륙존상을 만들었다.

셋째는 의상대사의 낙산사 창건으로 의상은 입당구법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동해변을 참배했다. 그러나 관음을 보지 못하자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이때 홍련(紅蓮)이 바다 속에서 피어나며 의상을 건지고 그 안에 나타난 관음보살이 수정염주를 주면서 의상의 높은 신심을 찬양했다. 의상대상은 낙산사를 창건하고 관음소상을 모셨다.


'신라=불국토' 알려주기 위해 건설된 사찰



이들 설화는 불교가 신라 땅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는 전위적 역할을 담당한다. 즉 신라인들에게 신라 땅이 본래 불국토였다는 신념을 불어넣으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불교에 귀의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국명도 불교성지의 이름을 써서 실라벌(實羅伐)이라 표기하면서 서라벌의 어원을 이룬다.

그러므로 불국사는 이 당시 신라가 불국토라는 것을 충실하게 알려주기 위해 건설된 사찰이라 볼 수 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佛國),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불국사는 언뜻 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무설전, 자하문, 청운교, 백운교, 범영루, 좌경루, 석가탑과 다보탑 등이 있는 넓은 구역과 그 옆에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비교적 좁은 구역이 있다. 또한 무설전 뒤로 비로전과 관음전이 있으며 앞의 두 구역과 달리 거대한 석조 구조물이 없어 구조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세 구역 중 넓은 구역은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이며 다소 작은 규모의 구역은 '무량수경'에 의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이며 무설전 뒤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 부처님의 연화장 세계이다. 결국 불국사는 세 분의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있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국사 경내에 들어서면 우선 대석단(大石壇)과 마주친다. 대석단은 크게 양분되어 그 아래와 위의 세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석단 위는 부처님의 전유 공간으로 불국토이고 석단 아래는 범부의 세계이다. 동쪽의 석가모니 부처님 세계는 석단에 마련된 청운교와 백운교를 통하지 않고는 오를 수 없으며 서쪽의 극락전 역시 석단에 마련된 연화교와 칠보교를 통해서 올라갈 수 있다. 비로전이나 관음전 일곽 역시 대웅전 및 극락전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다. 이 단원은 김동현 박사의 글을 많이 참고했다.

불국사 배치도(「불국사복원공사보고서」).


대웅전 일곽은 석단의 계단을 통해 자하문에 이르며 이 문을 통해 대웅전 정면 내정에 들어서게 되며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서쪽에 석가탑, 동쪽에 다보탑이 대칭되게 서있다. 대웅전의 북쪽에는 자하문 및 대웅전의 남북 중심축 상에 강당인 무설전이 동서로 길게 자리 잡고 있으며 이들 자하문, 대웅전, 무설전은 동서남북으로 둘러싸인 회랑으로 둘러져 석가모니불의 전유 공간임을 나타낸다. 회랑 일곽의 동남 및 서남쪽 모서리에는 동회랑과 서회랑이 연장되어 남회랑보다 남쪽으로 돌출되어 특수한 공간 처리를 하였다.

극락전 일곽은 서쪽의 석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구역에는 안양문과 극락전 그리고 남, 서, 북회랑이 있는 비교적 단순한 공간 배치로 되어 있다.

비로전 및 관음전 일곽은 사찰 후방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동쪽 높은 대지에 관음전이 있고 서쪽에 비로전이 위치하고 있다. 불국사의 중요 부분을 아미타정토와 석가정토, 연화장 세계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석축 위는 부처님 나라, 그 아래는 범부의 세계



<석가정토>

석가가 상주하는 절대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돌계단으로 올라간다.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다리의 중간 부분에 아치형 터널이 있어 밑에 물이 흐르는 다리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지상에서 천상으로 상승함과 동시에 강 또는 바다를 건너 하늘에 있는 불국토에 도착한다.

① 청운교와 백운교

불국사의 가장 특징적인 조형물 중 하나인 석축(석단)의 위는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이고 그 밑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범부의 세계를 뜻한다.

석단은 크고 작은 돌을 함께 섞어 개체의 다양성을 나타내는데 석단은 불국세계의 높이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 세계의 굳셈을 상징하기도 한다. 두 모퉁이 위에는 경루와 종루가 있다.

석단에는 대웅전을 향하는 청운교‧백운교(국보 제23호), 극락전을 행하는 연화교‧칠보교(국보 제22호)의 두 쌍의 다리가 놓여 있는데 층층다리가 국보로 지정된 예는 세계에서도 그 유례가 흔치 않아 불국사가 예사롭지 않은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청운교‧백운교는 석가모니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에 연결되어 있고 칠보교‧연화교는 아미타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안양문에 연결되어 있다.

청운교의 높이는 신라 척도로 12척(3.82미터)이고 폭은 16척(5.16미터)이다. 백운교의 높이는 10척에 폭은 16척이다. 청운교‧백운교는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33천(天)을 상징하는 것으로 욕심의 정화에 뜻을 두고 노력하는 자들이 걸어서 올라가는 다리로 현존하는 유일한 신라의 다리이다(신영훈은 원래 36계단이라 설명). 두 개의 돌다리가 45도의 경사로 높다랗게 걸려 있는데 계단을 다리 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백운교 옆에서 보면 3:4:5의 직각삼각형



특히 백운교를 옆에서 보면 직각삼각형 모양이다. 백운교의 높이와 폭과 계단의 길이를 간단한 비로 나타내면 약 3 : 4 : 5가 된다. 피타고라스 정리에 따르면, 직각삼각형에서 직각을 낀 두 변을 a 와 b, 빗변을 c라 할 때 a2+b2=c2이다. 백운교의 비 3 : 4 : 5에서도32+42=52 인 관계가 성립한다.

20세기 초의 백운교·청운교.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동양에서는 ‘구고현의 정리’라고 한다. 구(勾)는 넓적다리, 고(股)는 정강이를 뜻하며, 넓적다리와 정강이를 직각으로 했을 때 엉덩이 아래 부분에서 발뒤꿈치까지가 현(弦)이다. 직각삼각형에서는 밑변이 ‘구’, 높이가 ‘고’, 빗변이 ‘현’이 된다. 중국의 수학책인 '주비산경'은 서양보다 500년이나 앞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한 장의 그림으로 증명했는데, 이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대한 수많은 증명 중 가장 간결하고 우아한 증명의 하나라고 이경미는 설명했다.

화강암의 장대석으로 계단을 갈고 양쪽 난간에는 원통형의 돌을 이었으며 계단 위에 설치된 세 줄의 등연석은 각각 너비 70센티미터, 길이 6.2미터나 되는 거대한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장방형의 돌기둥 위에 밭쳐진 홍예는 반원을 이루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U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의 홍예의 시원을 보여주고 있다.

불국사의 석축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공법이 사용되었다.

고구려에서 많이 사용한 그랭이 공법이다. 그랭이 공법은 간단하게 말하여 기준 돌의 형태에 맞추어 돌을 다듬어 쌓은 것이다.

백운교 좌우의 거대한 바위로 쌓은 부분에서 확연하게 발견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천연바위를 그대로 둔 채 장대석과 접합시켜 수평을 이루도록 했다. 이러한 작업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울퉁불퉁한 바위의 곡선과 장대석의 직선이 맞이음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신영훈은 불국사를 창건하면서 이와 같이 어려운 작업을 채택한 것은 불국사가 상징하는 의미가 그토록 컸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아치의 구조법은 석빙고의 천장구조와 유사하다. 골격이 되는 아치의 틀을 먼저 만들고 그 사이를 장대석처럼 다듬는 판석을 치밀하게 축조해 천장을 완성시키는 방식인데 골격에 의지하고 그 위에 덧쌓아서 골격과 천장돌 사이에 요철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형식은 전체를 아치로 만든 구름다리나 성문들과는 달리 일정 간격으로 세우고 이를 구조재로 하여 그 사이를 석재로 쌓거나 판석을 얹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석빙고의 아치와 또 다른 방법을 채택했다.

신영훈은 석빙고형의 아치를 ‘속틀’이라 가칭하고 마구리에 해당하는 또 하나의 홍예석을 ‘겉틀’이라고 명명한다면 속틀이 여러 개의 돌을 쌓아 완성시킨 반면 겉틀은 좌우로 한 돌씩 반달같이 다듬어 틀어 올렸다. 이러한 이중 아치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으므로 ‘불국사형 아치’로 부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신라인들은 다리의 아치 축조에 있어도 남다른 창의력을 발휘했다.

또한 석빙고의 아치는 같은 크기의 돌을 아치로 쌓아 올려 무지개 형상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정상부에 다른 돌보다 조금 크기가 다른 석재를 꽂아 마감했는데 이를 ‘아치종석’이라 부른다.

그런데 겉틀의 아치종석은 밑 부분이 넓고 위가 좁은 사다리꼴의 모습인 반면에 속틀 아치종석은 반대로 위가 넓고 밑이 좁아 역사다리꼴이다. 보편적으로 아치종석은 어느 나라의 것이든 대부분 속틀의 모습을 하는데 불국사의 겉틀 아치종석은 반대인 것이다. 특히 속틀 골격의 아치종석 위로 겉틀의 아치종석이 놓여있다. 이것은 아치종석의 뒷몸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천장돌의 하나로 구조되어 보다 단단히 결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구조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리의 도장으로 들어가는 자하문



② 자하문과 회랑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면 자하문이 나타나는데 자하문이란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몸에서 나온다는 자금색 광채를 말한다. 이 문을 통해서 부처가 있는 대진리의 도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축대를 따라 5칸씩 행각이 있고 그 끝에 1칸씩 앞으로 돌출하고 지붕이 솟아오르게 건축되었는데 동편의 것이 경루(經樓)이고 서쪽이 종루(鐘樓)이다. 종루의 원명은 수미종각(須彌鐘閣)으로 수미산에 있는 종각이란 뜻이다.

수미산은 석가여래의 이상향인 사바세계의 표상이다. 신라인들은 부처의 나라(佛國)를 만들기 위해 토함산 기슭에 수미산을 쌓았는데 그것이 불국사의 자연석 축대로 상징되고 그 위의 건축물들은 부처가 상주하는 보궁(寶宮)이었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가설되어 있는 구역의 석축은 수미산을 상징하는 자연석 바위로 기반을 축조했는데 반하여 자하문과 돌다리 하부는 정교하게 다듬은 석대로 축조했다.

골격은 네모반듯한 돌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우고 기둥 중간에 중방을 들이듯이 두 단을 간격을 두면서 설치한 뒤에 기둥머리에 멍에를 얹어 마감하고 돌난간을 올려 세웠다. 돌기둥 사이의 간격에는 판석을 한 장씩 끼워서 마감했다.

백운교의 2중 아치 모습, 백운교 속틀 골격의 아치종석 위로 겉틀의 아치종석이 놓여있는데 이런 구조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여기에도 대단한 건축 기법이 숨어있다. 돌기둥에 중방을 들이듯이 결구한 부분을 자세히 보면 기둥머리에 네모 난 돌이 약간 나와 있다. 이 돌이 바로 ‘동틀돌’로 안으로 깊숙이 박혀 있는데 석굴암의 궁륭천장도 바로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동틀돌은 머리 안쪽으로 홈을 판 후 그 홈에 상하의 돌기둥이 걸리고 또 좌우의 중방처럼 생긴 수장재도 끼워진다. 그 턱에 걸리게 결구되면서 앞으로 밀려나지 않는다. 즉 토압 때문에 석재대를 형성한 석재들이 밀려나기 쉬운데 동틀돌을 사용하면 이런 위험을 원천부터 봉쇄할 수 있다. 천 년이 훨씬 넘는 석굴암과 불국사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선조들이 이런 과학적인 시공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자하문을 통과하면 세속의 무지와 속박을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한다. 자하문 좌우에 회랑이 복원되었는데 회랑의 구조는 궁중의 것과 유사하다.

국왕은 세간의 왕이요 불(佛)은 출세간의 대법왕이라는 뜻에서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서회랑을 건립하는 수법이 생긴 것이다.


창건 당시 대웅전에 삼존불 모셔



③ 대웅전과 무설전

현재의 대웅전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 1659년에 중건했던 것을 1765년에 다시 지었다고 전해져 오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와는 구조가 달라졌다고 추정한다. 또한 창건 당시에는 석가여래와 미륵보살, 갈라보살의 삼존상이 모셔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영훈은 이것은 불국사의 또 다른 특성 중에 하나라고 설명했다.

협시(挾侍)보살로 미륵과 갈라보살이 서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미륵불이 아직 성불하기 전의 모습이며 갈라보살은 정광여래(定光如來)가 성불하기 이전의 형상인데 정광여래가 과거불이면 미륵불은 미래불이어서 현세불인 석가여래와 함께 과거‧현재‧미래를 나타내는 삼세불의 세계를 석가삼존불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무설전은 강당에 해당하는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1973년 중창 불사 때 세워졌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불국사 경내에서는 가장 먼저 지어진 건물로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왕명에 의해 무설전을 새로 짓고 그곳에서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이 기록대로라면 불국사를 창건한 751년보다 훨씬 앞서므로 무설전은 불국사가 창건되기 이전의 건물로 추정한다. 따라서 무설전은 현재 볼 수 있는 것보다는 다소 작은 규모의 건물일 가능성이 높다.

무설전은 경론(經論)을 강술(講述)하는 장소이므로 건물 안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으며 단지 강당으로서의 기능에만 충실했다고 본다. 무설전이란 설이 없는 전당이란 뜻으로 강당이면서도 강의함이 없다는 건물명을 갖고 있음은 불교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고 김상현 박사는 적었다.

④다보탑

불국사가 갖고 있는 예술의 정수로 석가탑(국보 제21호)과 다보탑(국보 제20호)을 꼽는 학자들도 있다.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데 높이도 10.4미터로 같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은 외형상으로 개석 위의 난순에 둘러싸인 것을 탑의 주체부로 본다면 3층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체부가 편평한 개석 위에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아래에 4개의 기둥으로 개방적인 공간을 구성한 부분을 하나의 층으로 보아 4층으로도 볼 수 있다고 김광현 박사는 적었다. 물론 다보탑이 몇 층인가 하는 외형상의 형식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다보탑과 석가탑.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다보탑 상층기단 중앙에는 네모난 돌기둥이 있다. 아래에 주춧돌이 있고 머리 위에 주두를 얹었다. 네 기둥과 가운데 기둥은 오방(五方)을 뜻하는데 오방은 티베트 불교에서 우주의 표상이다.


다보탑 속에 두었을 유물 일제 때 사라져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보탑 자체는 신라의 독창적인 작품은 아니다. 다보탑은 칠보로 장식된 화려하고 장엄한 탑으로 묘사되어 법화신앙이 팽배하던 남북조시대에 중국인들이 건설하기 시작했다. 당나라 고종 건봉(乾封) 2년(667)에 혜상(惠祥)이 지은 '홍찬법화경(弘贊法華經)'에서 여러 기의 다보탑 건립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고 최완수는 적었다.

‘동진(東晋) 애제(哀帝) 흥녕(興寧) 2년(364)에 혜력(慧力)이라는 승려가 건강(建康; 현재 남경) 와관사(瓦官寺)에 돌로 다보탑 하나를 만들었다. 송(宋) 문제(文帝) 원가(元嘉) 5년(428) 팽성(彭城) 사람 유불애(劉佛愛)가 건강에 다보사를 짓고 또 다보탑 하나를 지었다.

제(齊) 고제(高帝) 건원(建元) 원년(479)에 예주(豫州)자사(刺史) 호해지(胡諧之)가 종산(鍾山)에 법음사(法音寺)를 지으니 사인(舍人) 서엄조(徐儼助)가 석조 다보탑 하나를 지었다. 당나라 국자좨주 소경(簫璟)은 난릉(蘭陵) 사람인데 양무제의 현손으로 누님이 수양제의 황후가 되었다.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집안 대대로 불법을 깊이 믿었으므로 수양제 대업(大業, 605~616년) 중에 스스로 ‘법화경’을 외우다가 경문(經文)에 의지하여 다보탑을 만들었는데 전단 향나무로 하였다.’

이 글을 보면 4세기 중반부터 7세기 중반까지 300여 년 동안 중국에서는 다보탑이 끊임없이 조성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현재 중국에서는 기록에 남은 다보탑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으므로 중국 다보탑의 형식이 어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운강석굴에서 보이는 다보탑 안에는 항상 지붕과 탑신을 갖춘 일반형의 목조다층탑 양식으로 하층부에 다보불과 석가모니불이 함께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이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불국사 다보탑도 중국에서 건설된 역대 다보탑을 참고한 후 그 틀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가미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한다. 불국사 다보탑은 중국식의 누각형 층탑개념에서 벗어나 스투파(stupa) 원형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국의 석탑양식으로 변모시킨 작품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그 동안 성덕왕릉을 비롯한 스투파식 왕릉을 축조하면서 터득한 지혜가 다보탑을 건립할 때 영향을 끼친 결과일 수도 있다고 최완수는 적었다. '법화경' 견보탑품에서 다보탑을 서술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운교의 구고현, 청운교·백운교는 33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유일한 신라의 다리이다(신영훈은 원래 36계단이라 설명).


‘그때 부처님 앞에 칠보탑(七寶塔)이 있으니 높이는 500유순이고 가로와 세로는 250유순인데 땅에서 솟아나와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갖가지 보물로 장식하니 오천의 난간과 천만의 감실(龕室)이 있고 무수한 당번(幢)으로 장엄하게 꾸몄으며 보배영락을 드리우고 보배방울 만억을 그 위에 달았다. 사면(四面)에서 모두 다마라발전단향(多摩羅跋檀香)의 향기가 나와 세계에 두루 가득 차고, 모든 번개(幡蓋)는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진주, 매괴 등 칠보(七寶)로 합쳐 만드니 높이가 사천왕(四天王) 궁전까지 이르렀다.’


법화경의 진리 구현한 다보탑 변화무쌍



이런 내용을 가능한 한 조형적으로 완벽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 불국사 다보탑이라는 설명으로 세계에서 한국의 다보탑처럼 변화무쌍하면서도 '법화경'의 진리를 이상적으로 구현한 탑은 찾아볼 수 없다.

다보탑에는 지금 사자 한 마리가 서있다. 하지만 원래는 네 마리였다. 1902년 일본인 세키노 다다스(關野貞)도 다보탑을 조사한 후 사자 네 마리가 있다고 기록을 남겼는데 1909년 다시 왔을 땐 두 마리만 남았다고 했다. 1916년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사진에 두 마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1902년부터 1909년까지 두 마리가, 1916년 이후 다시 한 마리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빙허의 '불국사기행'에는 “이 탑의 네 귀에는 돌사자가 있었는데 두 마리는 동경의 모 요리점의 손에 들어갔다 하나 숨기고 내어놓지 않아 사실 진상을 알 길이 없고 한 마리는 지금 영국 런던에 있는데 다시 찾아오려면 500만원을 주어야 내어 놓겠다 한다던가? (중략) 이 탑을 이룩하고 그 사자를 새긴 이의 영이 만일 있다하면 지하에서 목을 놓아 울 것이다”라고 썼다고 홍석민은 적었다. (계속)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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