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 중 가장 영향력 높은 사건은 무엇일까? 미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혁명, 시민혁명보다 더 큰 사건은 바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이다.
구텐베르크는 1455년 금속활자를 발명해 ‘구텐베르크 성경’ 180부를 인쇄했다. 이 인쇄술은 당시 비싸고 구하기 힘들어 보급되지 못했던 필사본을 오타가 없이 짧은 시간에 인쇄해 지식과 정보의 보급에 앞장섰던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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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부스를 통해 우리의 전통 직지를 알리고 있다. |
그런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78년이나 빠른 금속활자가 청주에서 발견됐다. 정식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고려시대 승려인 경한이 불교에서 말하는 선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정리해 엮은 책인 직지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만들어진 현존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으로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본래는 상, 하권으로 구성된 책이지만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만 남아있다.
그런 직지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한 만남이 청주에서 열렸다. 지난 9월 1일부터 8일까지 고인쇄박물관과 청주예술의전당 일대에서 직지코리아국제페스티벌이 열렸다. 직지의 시간적·역사적 가치보다 창조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계승하고자 ‘직지, 금빛 씨앗’을 주제로 11개국 35개 팀의 아티스트가 직지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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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기부한 책으로 만들어진 책의정원. 직지의 글자수만큼 책을 모아 전시했다. |
전시장 입구에는 시민들이 기증한 책으로 만들어진 책의 정원이 우릴 맞는다. 시민들의 책 모으기 캠페인으로 기증받은 책 2만9183권으로 미로처럼 된 프랑스식 정원을 표현했다. 이 책의 권수는 직지 활자수인 2만9183자를 상징한다.
책을 직접 기부했다는 최윤정 씨는 “집에서 안 읽는 책을 기부했다. 지금처럼 쉽게 원하는 책을 구할 수 있게 된게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이 신기하다. 이번 페스티벌을 통해 직지가 굉장한 사건이었음을 다시 깨닫게 됐다.”고 전했다.
이번 전시의 포인트는 유물부터 미디어아트까지 소재의 구분이 없이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됐다는 점이다. 작가들은 파빌리온, 유물, 회화, 설치미술, 사진, 스테인드글라스, 미디어 아트, VR 등 다양한 형태로 직지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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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호 금속활자장의 작품. 우리 선조들처럼 한자한자 만들어 인판을 재연해냈다. |
특히 전시실 1층 대전시실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01호 임인호 금속활자장이 복원한 인판이 전시됐다. 조선의 첫 금속활자 ‘계미자’와 세종 16년(1434)때 만들어진 ‘갑인자’도 볼 수 있었다.
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직지의 금속활자판을 시작으로 왕실목활자, 훈련도감자, 한글 활자, 활자로 인쇄한 특별한 책 등 다양한 인판이 전시돼 있었다.
임인호 활자장의 시연에도 참석했었다는 박현주 씨는 “금속활자 주조 시연을 통해 활자 하나하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니 참 힘들게 하나의 글자를 얻는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복원된 인판을 보니 더욱 뜻깊다.”며 “앞으로도 전통 인쇄술에 관심을 갖고 바라봐야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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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기. 아래에 활자판을 넣어 압착하는 방식이다. |
인판 뿐만 아니라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도 함께 볼 수 있어 더욱 뜻깊다. 실제로 프레스 방식으로 42행 성서 요한복음 1장 15절 낱장을 찍어보며 고대 서양의 인쇄술은 어떻게 진행됐는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전통적인 인쇄방법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것도 특별하지만 다양한 미디어 전시도 눈길을 끌었다. 활자를 미디어로 표현한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유리창을 가득 메운 스테인드글라스는 햇빛에 비쳐서 아름다운 글자를 내보였다. 특히 VR로 즐기는 활자가 가장 인기가 높았다. 머리위에 헬멧을 쓰고 즐기는 활자는 단순히 글자가 아니라 하나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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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늦은 시간까지 고려시대의 주막체험을 즐기고 있다. 멍석 위에 앉아 한잔 기울이는 막걸리의 맛을 즐기고 있다. |
다양한 부대행사도 이어졌다. 고인쇄박물관 주차장에 들어선 ‘1377고려, 저잣거리’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초가부스로 옛 저잣거리를 재현한 고려 저잣거리에는 환복소가 마련돼 고려 복장으로 갈아입을 수 있다. 또한 민화 그리기, 한지 공예, 서예 등 다양한 전통체험과 바닥에 깔린 멍석 위에 앉아 주전부리도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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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부스에서 책과 인쇄술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
2004년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유네스코 직지상은 올해로 6회를 맞았다. 올해는 중남미 국가들이 기록유산 보존 등을 협력하기 위해 1999년 공동 설립한 ‘이베르 아카이브’가 선정됐다. 이들은 중남미 지역에서 기록 유산 보존과 교육 등에 끼친 영향이 높이 평가받아 직지상을 받았다.
활자는 지금도 늘 우리 곁에 있다. 배움과 뜻을 함께하고 나누기 위해 발전해온 인쇄술은 인류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서양과 동양의 첫 인쇄물이 종교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의미가 있다. 깨우치고 배운 것을 나누기 위해 발전해온 활자는 앞으로도 더 큰 의미를 담기 위해 발전해 나갈 것이다. 직지 속에 담긴 의미는 세상을 사랑하기 위한 애민정신이 아니었을까.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권혁미 fivewo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