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싯적 얘기다. ‘조선시대 여자 같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남자가 그랬다. 지나치게 얇고 가벼운 관계였기에, 애매한 미소를 날렸더랬다.
‘꽃놀이를 갈 수 없고, 재혼은 할 수 없으며, 알아도 나서지 않고, 자기주장 따위는 길가는 개에게나 줘야 한다.’ 이는 조선시대가 바라던 여인의 덕목이었다. 좌우지간 조용히 순종하라는 얘기다. 속 터지는 마음을 무엇으로라도 다스렸을 터. 이를 예술로 승화시킨 여인들이 있으니,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다. 그들의 삶을 조명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인문열차, 삶을 달리다’ (국립중앙도서관, 조선일보, 코레일 공동 추진) 탐방이 그것. 10월은 ‘조선여성의 예술세계’라는 주제로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고향, 강릉을 찾았다. 초청강사로 역사학자 신병주 교수(건국대)가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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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의 모습. 오른쪽 방은 신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율곡 이이를 낳았다는 몽룡실이다. |
‘10월 8일. AM. 7시 30분. 청량리역.’ 출발 하루 전날 도착한 안내 문자에 엔돌핀이 솟았다. ‘이 얼마 만에 청량리역인가’를 되새기느라 잠도 안 왔다. “답사의 절반은 출발지점으로 오는 것”이라 말문을 연 신병주 교수는 이번 탐방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문학, 그 이해의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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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의 영정이 보관돼 있는 사당 문성사의 모습. |
첫 번째 탐방지는 ‘오죽헌’(보물 165호)이다. 청량리에서 원주행 기차를 타고, 거기서 다시 버스로 이동해 세 시간여 만에 도착했다. 입구로 들어서자, 드넓은 공간에 초록이 우거져 스르르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걸으니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동상이, 조금 더 들어서니 사임당이 자주 그렸다던 초충도 화단이 있었다.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있어 ‘오죽헌’이라 불리는 이곳은 율곡 이이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태어난 곳이다. ‘몽룡실’은 신사임당이 용꿈을 꾼 후 대학자 율곡 이이를 낳은 곳이며, ‘문성사’는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단층 팔작지붕 양식으로 된 오죽헌은, 한국 주택건축 중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해 의미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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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 박물관 입구에 자리한 어머니 신사임당과 아들 율곡 이이의 동상. |
신사임당은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이씨 사이의 다섯 딸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신인선’(1504~1551)이다. 어릴 때부터 글과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무남독녀인 어머니의 외가에서 태어났기에, 어머니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조선전기는 아들이 없는 집안에 출가한 딸이 부모를 모시는 풍습이 남아 있던 시기였다.
사임당은 19세에 남편 이원수와 혼인해 4남 3녀를 출산하고, 그 중 친정에서 셋째 율곡 이이를 낳는다. 남편의 외도에도 아이들을 정성으로 돌보며 붓을 놓지 않았고, ‘화가 신씨’로 불리며 그 능력을 당당히 인정받지만, 4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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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과 친정 어머니, 율곡 이이가 거쳐했던 오죽헌 내부의 모습들. |
5만 원 지폐의 모델로 신사임당이 선정되기까지 의견이 분분했다.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보편적 여성상’으로 자리 잡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염려였다. 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명성이 자자한 화가로 이름을 알린 것은 율곡 이이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다. 사임당은 남성 중심의 시대배경에도 불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예술가로 인정받은, 확고한 정체성을 지닌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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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의 천재시인 허난설헌의 동상과 그녀가 생전에 거처했던 생가. |
오죽헌을 나오기 전, 신사임당의 동상 앞에선 깜짝 이벤트도 있었다. 일명, '신사임당 닮은꼴 선발대회'로, 부상으로 신병주 교수의 책도 준비됐다. 고개를 숙이며 다소곳한 자태를 선보인 지원자 모두 조금씩 사임당과 닮은 듯 보였으며, 틈새의 즐거움을 선사한 순간이었다.
산채비빔밥과 어우러진 건강식으로 식사를 마친 우리는 허난설헌의 생가로 향했다. 기념공원에 들어서자, 허난설헌의 동상과 허씨 5문장가의 시를 새긴 비석을 볼 수 있었다. 생가 터 주위로 조성된 소나무 숲은 그 기품이 한옥과 어우러져 그윽한 자태를 드러냈다. 고즈넉한 분위기로, 생각보다 둘러볼 곳이 많았으며, 보존이 잘 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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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허난설헌 생가의 모습들. |
조선중기의 허난설헌(1563~1589)은 신사임당 60년 후의 인물로 본명은 ‘허초희’다.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의 누나이자 요절한 천재시인으로, 아버지 허엽과 강릉 김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유로운 세계관을 지닌 아버지 허엽 덕에 허난설헌은 남자와 똑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니, 그녀의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드러낸 허난설헌은 나이 8세 때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라는 한시를 지었으며, 15세에 명문가의 김성립과 혼인한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불행했으며, 아들과 딸까지 잃는 슬픔을 겪고, 27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고통의 세월을 보낸 허난설헌은 생전에 꿈의 세계를 그리며, 천여 편이 넘는 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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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시가 새겨진 비석과 생가 주위 솔숲의 풍경. |
그 당시 허난설헌의 시가 알려지지 못한 것은, 시댁과 사이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생 허균이 누이의 시를 명나라에 전하며, 그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한다.
허난설헌이 특별한 것은 남편의 명성이나 자식의 출세가 아닌, 오직 자신이 쓴 시로써 이름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허난설헌의 시집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시집으로 기록된다. 그녀보다 백만 스물여섯 배는 좋은 세상에 태어나 이렇듯 사는 게 송구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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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호 트레킹을 시작하는 참가자들의 모습과 걸으면서 볼 수 있는 주변의 풍경들. |
애잔한 여운을 지닌 채 우리는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경포호 트래킹’이다. 2.8킬로미터 남짓 경포호를 끼고 걷는 코스는 조경시설이 잘 갖춰져, 어디에 멈춰도 그림이 됐다. 자전거나 인력거를 타며 가을정취를 만끽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경포대’라고 하면, 혹자는 해수욕장을 연상할 수도 있을 거다. 사실 나도 그랬다. 뭐 이러면서 배우는 거다. 경포대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경포호수 북쪽 언덕에 있는 누각이다. 고려 충숙왕 13년(1326)에 세워졌으며 조선 중종 3년에 현 위치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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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호수를 품은 절경에 취해 많은 문인들이 시를 지었다고 전해지는 경포대. |
경포대는 바다와 호수를 한 아름 안고 있는 빼어난 경치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시인들이 찾는 곳이다. 천장에는 율곡 이이가 경포대를 배경으로 지은 ‘경포대부’를 비롯, 숙종의 시문 등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늘에 떠있는 달’, ‘경포호수에 비친 달’과 ‘바다에 비친 달’, ‘술잔에 비친 달’과 ‘연인의 눈에 비친 달’. 이렇게 다섯 개의 달을 볼 수 있다는, 서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곧이어 향한 곳은 진짜 바다다. 가까운 곳에 유치한 경포해수욕장을 모른 체 하면 안 될 일. 역시 ‘바다는 동해다’라는 지론이 틀리지 않았다. 물은 투명했고, 갖가지 총천연색으로 빛났다. 자유 시간으로 가을 바다의 기를 한껏 품은 우리는, 마지막 탐방지인 선교장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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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필요없는 동해. 경포해수욕장의 하늘 아래 풍경. |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후손인 전주 이씨 가문의 것으로, 11대로 이어지는 사대부 가옥이며, 조선 상류층 가옥을 대표하는 곳이다. 쉽게 말해 좀 사는 집인 거다. 역시 단아하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선교장 입구 주변엔 드넓은 잔디밭이 있었고, 고택 뒤 위쪽으로 뻗은 소나무가 기와지붕과 어울려 장관을 이뤘다.
선교장은 이씨 일가의 살림집을 말하지만, 노비들의 초가집이 계급사회의 단면을 드러냈다. 사랑채인 ‘열화당’은 1970년대 후손이 미술관련 출판사 이름을 열화당으로 하면서 관심을 받는다. 이 집안의 인문학적 전통이 후손을 통해 현대적으로 잘 계승된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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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은 전주 이씨 가문이 살던 가옥으로 조선 상류 주택의 하나며, 노비들이 거주하던 초가집도 볼 수 있었다. |
탐방 일정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짜임새 있었다. 자신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적어 발표하고,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이름으로 4행시도 지었다. 역시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분들의 글 솜씨는 탁월했다. 강사로 함께한 신병주 교수의 입담 역시 훌륭했다. 어느 때 쯤 노곤해 하는지 포인트를 아는 듯 간간이 웃음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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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성의 예술세계를 향해 인문열차를 탄 60명의 참가자들. |
생각했다. 꽃놀이를 가고, 자기주장에 거침이 없는 시대를 살며, 나는 더 치열하고 당당했는지를 말이다. 어렵고 지루하다는 편견이 앞설 수 있는 인문학. 분명한 것은, 그 덜 재밌는 인문학도 결국 사람 사는 얘기라는 거다. 사람과 삶을 배우는 인문열차. 그 곳에서 내리는 순간, 2% 더 풍성한 감성을 지니게 될 거라 확신한다. 함께 떠나보자. 삶을 달리는 인문열차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