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어느 날. 손소독제와 마스크가 동이 났다. 불안은 선명했다. 약국의 지인에게 마스크를 구했다는 친구가 부러웠다. 5월 20일 국내에 유입돼 217일 만에 종식을 선언한 메르스 얘기다. 치사율 20.4%, 186명의 감염자 중 38명이 사망했다. 우리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메르스 환자가 두 번째로 많이 발생한 국가였다.
이게 다 바이러스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21세기형 공포가 됐다. 사스와 에볼라에 이어 메르스와 지카, 독감에 AI까지, 변형된 바이러스가 인간을 공격하고 있다. 올해 초 옥스포드대 연구소는 ‘세상의 종말을 이끄는 12가지 시나리오’ 보고서 중 인류 멸망 원인 1순위로 ‘세계적인 전염병’을 꼽았다.
바이러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컨테이젼’은 바이러스 감염 후의 세상에 집중한다. ‘아무것도 만지지 말고, 누구도 만나지 말라’는 타이틀로 그 치명적 사태를 정직하게 나열한다. 일상과 관계를 파괴하고, 사회가 무너진다. 호러나 귀신이 아닌, 진짜 공포가 나타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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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모를 바이러스로 사람들이 죽고, 일상이 마비된 영화 ‘컨테이젼’. 그 와중에 대중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 음모론을 주장하며 가짜 치료제로 돈벌이를 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출처=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
홍콩국제공항, 마른기침을 하던 여성이 집에 돌아와 쓰러져 발작을 일으킨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다. 여성이 죽고 감염된 어린 아들마저 사망한다. 홍콩의 구룡, 영국의 런던, 일본 도쿄 등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 바이러스로 가차 없이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결제용 카드나, 문 손잡이, 엘리베이터 버튼, 정수기 등 모든 게 병균을 옮겼다.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와 스위스 세계보건기구(WHO)는 감염자와 의심환자를 격리하고, 발생지역을 검역한다. 역학조사에 나선 직원 역시 감염돼 비닐에 쌓인 시체가 된다. 스크린은 절망할 틈도 주지 않는다. 환자 1명으로 인한 재감염 수는 4명, 4명에서 열여섯 명, 수백, 수천 명으로 늘어난다. 전체 인구의 1% 사망이 예상되는 ‘팬데믹(pandemic)’(대유행) 단계에 이른다.
질병관리본부는 박쥐의 병균이 돼지로 옮아가 생긴 변종 바이러스임을 밝힌다. 중요한 건 치료법도 백신도 없다는 거다. 사망자는 속출하고, 사회는 마비된다. 공항이 폐쇄되고, 군이 도로를 막고, 버스는 운행을 멈추고, 약탈과 사재기, 방화가 도시를 장악한다. 대통령은 지하 벙커로 피신하며 국회는 인터넷을 통해 운영한다.
아내와 아들을 잃고 장례도 치르지 못하는 남자는 슬프거나 분노할 여유가 없다. 정서가 마비된 상태, 이것이 바이러스 재앙의 속성이다. ‘컨테이젼’은 바이러스 감염의 정교한 재난 보고서다. 전염병이 퍼지는 과정을 역추적하며 벌어지는 관계기관과 대중의 온도 차를 조명한다. CG를 사용하지도, 감정을 강요하거나 영웅을 만들지도 않는다. 침착한 카메라로 차갑게 현실을 직시한다. 때문에 더 지독한 공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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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아 소두증을 유발하는 지카 바이러스는 모기에 의해 전염된다고 알려졌다. (출처=pixabay) |
메르스를 겪어낸 세상에 지카 바이러스가 등장한 것은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아서다. 뒤이어 독감 환자가 넘쳐났으며, 어김없이 조류독감이 들이닥쳤다. 이에 3천만 마리의 닭들이 폐사되고, 계란 가격이 폭등했다.
유럽도 피해가 속출했다. 프랑스는 지난해 11월, 서남부 지방 양계장 80여 곳에서 AI가 발생, 중서부 지역으로 발생 범위가 넓어져 오리와 거위 수십만 마리를 매몰 처분했다.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등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조류인플루엔자는 스위스, 프랑스, 덴마크, 폴란드, 핀란드, 스웨덴 등 사실상 유럽 전역으로 확산했다.
2015년 12월, 정부는 ‘감염병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개정했다. 감염병 전문병원을 설립 또는 지정 운영하고, 감염병 환자 발생 의료기관 병동 폐쇄 등에 따른 손실을 보상, 국가 감염병 위기 시 의료인력 동원과 감염병 환자의 재정지원 및 유급휴가 지원 등의 내용이다.
더불어 지난 달, 감염병 관리를 위해 분류체계와 관리체계를 일원화했다. 신고우선순위 확립과 긴급도, 질환의 심각도, 전파력에 따라 재분류 되는 등의 감염병 분류를 1~5급으로 나누고, 1~2급 감염병은 국가, 3~5급 감염병은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리하도록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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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관리본부가 ‘국가방역체계개편’에 따라 기 편성된 즉각대응팀을 재편성 하고자 지난 12월 직무 교육을 실시했다. 즉각대응팀은 감염병 현장 방역 조치를 위해 민·관 합동으로 즉시 출동하는 대응팀이다.(출처=보건복지부) |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5,000만 명이 사망했으며, 2008년 멕시코의 돼지인플루엔자가 인간에게 감염된 신종플루로 최소 1만7,538명이 사망했다. 세계보건기구는 이에 전염병 대유행 단계인 ‘팬데믹’을 선언했다.
지금보다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나타날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그것이 언제가 되느냐의 문제다. “늑장대응으로 국민들이 죽기보다 과잉대응으로 비난받는 게 낫다.” ‘컨테이젼’ 중 질병통제본부 박사의 대사다.
전염성 바이러스로부터 안전을 지키는 것은, 개인의 위생관리와 더불어 국가차원의 예방과 필사적인 방역 시스템이다. 과거에 존재했던 바이러스는 현재도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진화와 변이를 거듭하며 말이다. 바로 지금,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