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일, 가는 곳, 만나는 사람은 거의 정해져 있다. 그 틀을 깰 수 있는 건 여행뿐이다. 정서적 환기가 필요한 순간이라면, 떠나는 거다. 짐을 싸고, 정해진 길에서 살짝만 벗어나면 그만이다. 행복해지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여행은 설레임을 쫓는 일이다. 짐을 싸는 순간 마주한 세상의 중심엔 선명한 ‘봄’이 있다. 망설임 없이 떠나 가슴을 채워보자. 일탈의 짜릿함에서 얻은 추억으로 한동안 고고하게 버틸 수 있을 거다. 고민하는 사이, 기어코 봄은 사라진다. 마침 4월 29일부터 5월 14일까지 봄 여행주간이다.<편집자 주>
5월 황금연휴를 앞두고 가족회의가 열렸다. 평소에는 “우리 이번에는 어디로 놀러갈까?” 하는 고민을 했다면 이번에는 “멀리서 전라북도에 오는 사람들에게 어디를 추천해줄까?”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다.
우리 가족은 전라북도 부안군에 산지 25년차 되는 전라북도 토박이다. 대학 때문에 나는 서울에 올라와 있지만, 부모님과 동생들은 지금도 전라북도에 살고 있다. 첫째인 내가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 가족은 틈이 날 때마다 나들이를 즐겼다. 전라도의 웬만한 관광지는 다 가봤는데, 그 중 진짜로 갈 만한 관광지는 우리만의 단골코스로 만들어 자주 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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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소풍러’ 우리 가족이 전주, 군산, 부안, 고창 코스 중 진짜 가볼만한 곳을 엄선해 봤다. |
나는 가족들에게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을 보여주고 어디를 추천하고 싶냐고 물었다.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은 3~4개의 지방자치단체를 하나의 관광권역으로 묶어 이를 집중적으로 발전시키는 5개년 프로젝트다. 총 10개의 테마여행 중 7번 ‘시간여행’이란 이름으로 전주, 군산, 부안, 고창 코스가 포함됐다. 전주, 군산, 부안, 고창을 셀 수 없을 만큼 놀러 다닌 ‘프로소풍러 가족’의 눈으로 진짜 여행 갈 만한 장소를 꼽아봤다.
급하지 않은 마음으로 급하지 않은 길을, 선운사
엄마와 아빠가 동시에 꼽은 일등 여행지는 고창 선운사다. 실제로 부모님은 도시에서 손님이 오면 자주 선운사에 데려간다. 아빠는 주변에 내소사, 개암사 등 유명한 절과 산이 많지만 손님과 함께 둘러보기 좋은 산은 선운사가 있는 선운산이라고 했다. 선운사 주차장에서부터 본격적인 등산로까지 경사가 완만한 산책로가 긴 편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긴 선운사 산책로를 천천히 걷는 것을 즐긴다.
산책로에서 조금만 더 용기를 내면 경사가 급한 등산로를 오를 수 있다. 본격적인 등산로는 산책로에 비해 훨씬 짧은 대신 경사가 급하고 계단이 많다. 경사로를 오를 때면 자연스럽게 아빠 손을 잡게 되고 동생 손을 잡게 된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채 들기 전에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경치를 한번 둘러보고 다시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면 제대로 나들이를 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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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도 하고 꽃구경도 하기 좋은 선운사. 지금 가면 화려한 철쭉과 푸른 녹음을 볼 수 있다. |
선운사 주변은 예쁘기까지 하다. 가을에는 꽃무릇이 피고 겨울에는 동백꽃이 많아 유명하다. 지금 봄에는 빨갛고 하얀 철쭉과 푸른 녹음을 볼 수 있다.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푸른 나무 사이를 걸으면 아주 오래 잊고 있던 사람의 안부마저 궁금해진다. 집에서는 현실적인 일에 치여 미뤘던 이야기를 선운사 산책로에서는 마음껏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즐기는 전주한옥마을
올해 20살난 대학 새내기 남동생은 전주한옥마을을 추천했다. 전주한옥마을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볼 것 없다.”고 하는 곳, 묘미를 아는 사람은 두고두고 즐겨 찾는 장소다.
대개 전주한옥마을을 잘 모르는 관광객들은 한복을 빌려 입고 전동성당, 경기전 앞만 둘러보고 길거리 음식을 먹는 정도로 체험을 마친다. 이렇게 하면 전주한옥마을은 겨우 1시간짜리 코스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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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박물관에서 부채 만들기 체험을 하는 어린이. 전주한옥마을에는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많다. |
전주한옥마을을 제대로 즐기려면 겉만 보는 관광 말고 다양한 체험을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전주한옥마을에는 골목 사이에 숨겨진 체험 장소가 생각보다 많다. 지난 주말에 여동생과 함께 방문한 ‘부채박물관’이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에 가면 직접 부채를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미리 예약을 하면 단체 체험도 가능하다. 특히 체험 전에 약 20분 가량 부채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시간도 있어 학생들, 외국인 관광객들의 반응이 좋다고 한다. 최명희문학관, 전주소리문화관 등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체험 활동에도 참여하면 더욱 풍성한 여행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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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 벽화로 가득한 자만달동네. 나와 동생도 이곳에서 인생샷을 남겼다. |
전주한옥마을과 인접한 ‘자만달동네’도 꼭 가보기를 추천한다. 한옥마을 끝에서 육교 하나를 건너면 나오는 자만달동네는 집집마다 벽에 예쁜 벽화들이 그려져 있는 마을이다. 벽화가 워낙 화사해서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사진이 너무 잘 나와 여행을 즐기는 것만큼이나 예쁜 사진을 남기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나와 여동생도 ‘인생샷’을 남기자며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돌아왔다.
최고의 드라이브코스 새만금 방조제
새만금은 내가 강력하게 추천하는 장소다. 서울에서 “고향이 부안이다.”라고 하면 “부안이 어디예요?”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안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부안을 소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만금이 있는 곳이에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사람들에게 유명한 새만금이지만 그곳이 얼마나 좋은 드라이브코스인지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나는 바다가 보고 싶어지면 서울을 떠나 가족들과 새만금으로 드라이브를 간다. 새만금 방조제를 따라 난 33km 가량의 도로를 쭉 달리는 것인데 다른 해안 도로보다 가까이서 바다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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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방조제 도로 위를 달리면서 보는 바다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 |
날씨 좋은 날 도로를 쭉 달리는 것도 좋지만 특히 해돋이, 해넘이가 장관이다. 새만금 방조제 도로 중간 중간에는 쉼터들이 여러 개 있다. 그 중 신시도 옆 쉼터는 우리 가족이 새해 첫 해돋이를 보는 단골장소다. 어쩌다 해질녘에 드라이브를 가면 해가 넘어가면서 바다를 온통 다홍빛으로 물들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럴 때 도로 위를 달리면 마치 다홍빛 물감 위를 달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여행추천 코스만 보면 다 좋아 보이는데 실제로 가보면 별 것 없어 실망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런 걱정에 치여 황금연휴에 뭘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 가족의 단골 나들이 장소를 과감하게 공개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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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곳을 보고 있는 아빠와 나. 우리에게는 또 이렇게 같은 추억이 생겼다. |
시간이 많아도 집에 있을 때는 가족끼리 속얘기를 할 여유가 없다. 멀든 가깝든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집을 나서면 그 때부터는 아주 사소한 이야기까지도 대화주제가 된다. 꿈을 찾아가겠다는 나와 대학교 4학년인 큰딸이 걱정이 산더미 같은 부모님. 거실 쇼파에서 우리의 대화는 대선후보 토론장을 방불케 하는 날카로운 것이는데 여행에서는 달랐다. 아빠가 “우리 딸은 뭐든지 잘 할거야.”라고 말하면 내가 “그럼요! 나는 완전 잘 할 수 있어요!” 하고 신이 나서 답하는 청춘 토크쇼가 됐다.
혹시라도 여행을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면 이번 연휴에 용기를 내 전라도로 떠나보는 것이 어떨까? 선운사 산책로를 걷다 보면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던 문제의 실마리가 보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김자현 eternity44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