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어떤 국가였을까. 신라가 통일하기 전까지 700여 년 동안 한반도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한 때는 강국으로, 한 때는 대백제의 미래를 꿈꾸며 문화적 발전을 이뤘던 국가다. 그러나 통일신라나 고려, 조선에 비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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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을 시작하는 정책기자단. |
그동안 지자체 차원에서 관리가 되던 백제의 유적들은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관광자원화에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지구는 문화재청과 백제세계유산센터의 주도로 관광벨트를 만들어 ‘고도 세계유산 팸투어’를 운영하며 스토리와 체험, 먹거리, 접근성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했다.
지난 15일과 16일 백제 문화유산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도읍이 있었던 공주(웅진), 부여(사비), 익산 지역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대상 현장 탐방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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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는 BC 18년~660년까지 한반도에서 존속했던 고대국가 중 하나다. 한성백제 시대를 제외하고 고구려의 남하로 인해 맞이하게 된 웅진-사비(475~660) 시대가 백제역사유산 관광벨트의 대상지이다.
우리나라에서 12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의 공산성과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 부여의 관북리 유적,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백제 나성, 익산의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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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리 고분군. |
백제시대 고분군의 대표적인 곳으로는 현재 네 곳이 남아 있다.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 귀족들의 무덤인 수촌리 고분군과 백제 사비시대(538~660)의 왕릉묘역인 능산리 고분군과 귀족들의 무덤이라는 능안골 고분군이다. 그중 왕들이 묻혀 있는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과 부여의 능산리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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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
현재 무령왕릉은 훼손 등의 우려로 일반인에게 공개가 되지 않고 있어서 송산리 고분군 내에 있는 무령왕릉 복원 공간에서 체험을 해볼 수 있게 해놓았다. 당시 무령왕과 왕후가 누어 있던 공간은 백제 기술의 정수가 녹아들어가 있는 곳이었다. 특히 백제의 경우 연꽃 문양을 많이 사용했는데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다. 백제를 다스렸던 왕들은 백성을 자비로 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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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의 차 체험. |
공주의 마지막 여정은 전통문화체험관에서 차 체험으로 이어졌다. 백제시대에도 차를 즐겨 마셨는데 차는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며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을 만들어 준다. 차 체험관은 공주 한옥마을 내에 있으며 체험을 하려면 문의를 하고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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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마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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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의복 체험. |
옷이 날개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다. 체험관에서는 왕과 왕후가 되어볼 수도 있다. 백제의 패션은 화려하면서도 단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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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림사지. |
부여로 넘어가 처음 만난 정림사지는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데 백제가 사비시대를 열기 위해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에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건물 몇동과 정림사지 5층 석탑만이 남아 있는 상태지만 백제 기술의 정수인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어 그것만으로 충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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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5층 석탑 |
정림사지 5층 석탑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상당한 수준의 기술력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이야 말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가장 다가가고 싶으며 부담이 없는 유적이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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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 복원모형. |
사비시대의 정림사는 웅장하면서 소박했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했다. 절제할 때는 절제했었고 화려할 때는 기술을 마음껏 활용해서 과시하듯 표현했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백제의 흔적들을 살펴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나 작업을 함께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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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 고분군. |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의 중심에 자리한 지리적인 특징보다 이곳에서 발토된 금동대향로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1993년 백제 나성과 능산리 사이 절터 한쪽에서 백제의 금동 대향로가 출토됐다. 사비시대에 백제왕이 사용하던 귀한 물건일 가능성이 큰 금동대향로는 자체로도 너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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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나성과 고분군. |
백제의 나성은 안과 밖 2중으로 구성된 성곽으로 안쪽의 작은 성과 그 바깥의 도시를 감싼 긴 성벽을 말한다. 백제 나성은 발굴작업이 오랜 기간 이뤄지고 있다.
7차 발굴에서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연화무늬 전돌이 출토돼 주목을 받고 있다. 공산성을 중심으로 웅진시대를 펼쳐나가고 있을 때 사비시대를 열기 위해 나성이 이미 축조되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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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단지. |
2일째 첫 일정의 대상지였던 백제문화단지는 옛 백제를 다시 복원해놓은 곳이다. 똑같이 복원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부분 고증에 의해 복원이 됐다. 백제문화단지는 1994년에서 2013년까지 무려 20년 간에 걸쳐서 만들어진 곳으로 6,000억원이 투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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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단지내의 정자. |
조선시대의 정자도 이렇게 규모가 있었을까. 아마 서울 압구정의 지역명을 만들게 한 한명회의 압구정이 이정도의 크기가 되지 않을까. 시대가 지나갔다고 하나 백제 궁성의 매력을 느낄 수 있게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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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게 복원된 백제의 건물들. |
일본 교토에 가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킨카쿠지가 있다. 화려한 금빛 누각이 인상적인 킨카쿠지는 교토를 상징한다.
백제문화단지에 있는 능사가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현존했다면 킨카쿠지(금각사) 못지 않은 곳이었을 것이다. 화려한 곳에서 내려다보는 연꽃은 더 화사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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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백제문화단지. |
전망대에 올라가서 바라보면 백제문화단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뒤쪽에는 위례성이 있는데 강력한 고대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춘 역사를 간직한 위례성은 한성백제의 중심이었다. 시조 온조왕이 도읍하고 무려 21명의 백제왕이 통치했던 위례성은 풍납토성이라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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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부소산성 입구. |
부여의 부소산성은 낙화암과 나루터를 중심으로 중국과 교역을 하던 중심지였다. 계획도시인 사비성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던 전략적 요충지이다. 부소산성은 성둘레 2,495m 와 면적 746,198평방미터의 규모로 조성된 복합식 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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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기자단. |
부소산성은 소나무 숲과 백제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어서 사색하기 좋은 곳이다. 현재 부소산에 위치한 부소산성은 백제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국가사적 제5호로 정해져 있다. 부소산은 소나무가 많은 산으로 알려져 있는데 백제시대 언어로 부소는 소나무라는 뜻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소나무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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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 낙화암. |
이곳이 그 유명한 낙화암이다. 백제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파괴될 때 사비성 내에 살던 궁녀와 여인들이 이곳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자신의 생을 끊었다고 알려진 곳이다. 의자왕들의 첩들로 알려졌지만 실제는 백제 여인의 충절이 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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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떠나는 백마강 여행. |
백제라는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지고 그 시대 사람들은 이곳에서 그 존망을 같이 하려 했던 것 같은데 암석만이 남아 허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배를 타고 백마강을 둘러보는 것은 아름다운 부여의 다른 이면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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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
익산 미륵사지. 미륵불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사찰 미륵사에는 한국석탑의 시원이라는 미륵사지 석탑이 남아 있다. 동양 최대, 최고의 석탑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변화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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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내의 공원. |
익산 유적지에 있는 저수지 중에 이처럼 아름다운 곳이 있었던가.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어떤 각도에서도 사진이 잘 나온다. 당시 국제적인 문화교류의 실상을 보여주는 미륵사지 석탑이 바로 이곳에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국에 수많은 사찰을 돌아다녔지만 당간지주가 두 개가 세워져 있는 곳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는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았다. 장은 마를 캐어 팔아 생업을 삼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 이름은 서동이었다.’ -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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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되고 있는 미륵사지 석탑. |
지금은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이곳에 왜 미륵사를 세웠을까. 무왕 재위 당시 국정의 최대 현안은 신라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당시 격전지와 가까운 곳이 바로 이곳 익산지역이었는데 그렇기에 국가를 지켜주는 사찰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무왕은 백제의 국력을 결집시켜 미륵사를 창건한다. 미륵사는 사랑꾼으로 알려진 무왕의 백제 부흥 프로젝트의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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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 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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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 동행한 기자단. |
공주와 부여, 익산 지역을 돌아다니며 백제의 오래된 유산을 만나보았다. 옛날에 비해 백제에 대해 많은 것이 밝혀졌지만 아직까지 백제의 모든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1박 2일 동안 기자단과 함께 동행한 현장 탐방은 백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 즐거운 여정이었다.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최홍대 chdspeed@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