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4박 6일 일정의 G20 정상회의를 마치고 10일 귀국했다. G20 정상회의는 세계 주요 정상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각국의 이해관계를 살피고, 세계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중요한 행사다.
G20 정상회의 기간 문재인 대통령은 9개국 정상과 양자회담을 갖는 등 다자외교 데뷔전 무대를 성공적으로 치렀다는 평가다.
 |
문재인 대통령이 7월 5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독일 동포 오찬 간담회에서 동포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출처=공감포토) |
문 대통령은 엥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비롯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9개국 정상과 연달아 양자회담을 가졌다. 특히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은 그간 여덟 번 진행됐지만 공동성명이 발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 만큼,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한미일 3국의 공조는 굳건함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가운데 필자에게 눈길이 간 장면은 따로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첫 일정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 등 동포를 만나 위로한 자리였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파독 간호사들의 헌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문 대통령은 격려사를 통해 “이역만리 독일의 뜨거운 막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병원의 고된 일을 감당하신 여러분의 헌신이야말로 대한민국이 기억해야 할 진정한 애국”이라고 말했다. 또 “여러분의 헌신과 애국이 있었기에 조국이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흰 백발이 날리는 어르신이 됐지만 파독간호사에 대한 애정을 과감 없이 드러낸 것이다.
50년 전 경제발전의 한 축 ‘파독 간호사’
필자는 얼마 전 경남 남해에 있는 독일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여행이라는 목적으로 갔지만 이곳에서 마주한 파독 간호사들의 모습은 필자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국에서 겪어야 했던 노동과 외로움은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
남해 파독전시관에 선보이고 있는 파독 노동자들의 사진. |
문재인 대통령마저 큰 애정을 드러낸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시계를 50년 전으로 거꾸로 돌려보자. 당시 정부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외화획득과 실업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해외인력수출의 하나로 독일에 간호사와 광부들을 파견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극심한 실업난이 문제가 됐고, 경제발전을 위해선 외화가 필요한 시기였다. 반면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인한 노동력 감소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노동력 부족사태를 앉고 있었다. 외화벌이와 노동력 부족이라는 두 나라 간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 가운데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들은 매년 1천만 마르크(75억 원) 이상의 돈을 국내로 송환했고, 이 외화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G20 정상회담 첫 일정으로 파독 간호사들을 찾은 것은 이들을 국가적으로 예우한다는 점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
독일마을 표지석. |
독일마을서, 생생한 육성과 생필품 확인
경남 남해군에 있는 독일마을은 1960년대 독일에 파견 간 광부와 간호사들이 조국으로 돌아와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고 국민들에게는 독일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2001년 남해군에서 30여 억원을 투입해 3만여 평의 부지를 마련했고, 건축은 교포들이 직접 독일의 재료를 수입하여 전통 독일식 주택을 신축했다. 실제로 마을 곳곳에는 독일 교포들이 생활하고 있으며 관광객을 위한 민박을 운영하기도 한다.
독일마을 입구에는 ‘남해 파독전시관’이 자랑스럽게 자리해 있다. 1960년대 독일에 파견된 한인 노동자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다.
 |
독일에 파견된 광부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조형물. |
전시관에 들어선 순간 당시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의 애절한 사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벽면에는 필자의 눈시울을 붉히는 글귀들도 있었다.
‘독일 광산에 가면 매월 600마르크(당시 4만 원)씩 준다는데 하루 두 끼도 못 먹는 고향의 가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망설이지 않고 독일로 가기로 결정했다 - 파독 광부 권이종’, ‘나는 용감했기 때문에 독일로 갈 수 있었고, 지금도 용감하게 산다. 앞으로도 후회 없이 용감하게 내 삶을 개척할 것이다 - 파독 간호사 서부임’.
고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가족애’가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
파독 간호사들이 사용한 물품들. |
파독 간호사들의 당시 생생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생필품도 전시되어 있다. 1976년까지 정부가 독일에 파견한 간호사는 1,200여 명에 달했다. 꽃다운 청춘의 이들은 이역만리에서 차별을 견디며 급여 대부분을 고국으로 송금했고 이는 경제건설의 초석을 다지는데 보태졌다.
파독 간호사의 계약 기간은 대개 3년이었지만 대부분 연장 근무를 신청했다. 이들은 평균 25∼40년 정도 근무하면서 모국으로 계속 송금해 실제 외화 송금액은 통계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독일 정부, 파독 노동자 정신 기려
파독 간호사들은 결혼 적령기가 되자 대부분 독일 남성과 결혼했고, 일부는 파독 광부와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이들의 헌신을 하늘도 알아준 것일까. 독일 정부는 파독 노동자들이 기초를 다진 현지 한인사회를 ‘이민통합의 롤모델’이라 부른다.
이번 G20 정상회의를 통해 한국과 독일의 우호적 관계가 다시 한 번 확인됐다. 앞으로도 두 나라는 경제부흥과 다양한 문화교류로 끈끈한 우정을 과시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 파독 간호사와 광부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함께 국가를 헌신한 이들에 대해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있었으면 한다.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이현주 ad_mvp@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