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72주년 되는 해입니다. 광복 72주년을 맞아 법학, 식품공학, 국문학 전공의 정책기자 3명이 ‘알쓸신기(알면 쓸데 있고 신비한 기자단)’ 팀으로 뭉쳐, 해방 전후 격동기를 견뎌낸 민중들의 이야기를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문학, 공연, 음식, 그리고 우리 동네에 얽힌 해방 당시 우리네 이야기입니다.
이번 세 번째 기사의 주제는 ‘해방시대 서민들이 즐겨먹었던 음식들’입니다. 투박한 음식 한 그릇에 함께 담겨져 나오는 당시의 생활상, 그리고 이따금씩 뒷맛이 아려오는 역사의 맛을 함께 곱씹어보시길 바랍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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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천변풍경’ 중 냉면 배달에 대해 묘사한 대목. |
<1930년대, 서울을 휩쓴 인기 배달음식 ‘평양냉면’>
김연수 기자(이하 김) : 여름날엔 역시 냉면이 제격이 아닐까? 시원하고 맑은 고기 육수에, 메밀면 한 뭉텅이 돌돌 감아 아삭한 무와 고기 절편 곁들여 놋그릇에 담은 냉면 한 그릇이면… 보기만 해도 더위가 가실 것 같아.
우인혜 기자(이하 우) : 맞아. 특히 이 평양냉면은, 슴슴하고 시원한 육수맛이 여름 더위를 날리는 데는 제격인 것 같아. 냉면을 먹다 이따금씩 숟가락으로 놋그릇을 부딪치며 내는 ‘쨍-’하는 소리도, 마치 얼음장 같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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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시원한 육수와 담백한 메밀면 맛이 특징인 평양냉면. |
한초아 기자(이하 한) : 평안도가 고향이신 우리 할아버지는 유독 평양냉면을 좋아하셨어. 명절이면 평양냉면을 먹을 정도로, 우리집 연례행사에 늘 빠지지 않던 단골 음식이었지. 그렇다면 남한에서 평양냉면이 유행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6.25 전쟁 이후 북쪽 실향민들이 월남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다는데, 정말일까?
김 : 6.25 전쟁 전후, 월남한 실향민들을 통해 이북 지방 냉면이 대중화된 것은 맞지만, 사실 그 이전 일제 강점기에 이미 서울에서 평양냉면이 인기를 끌었어.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냉장고가 최초로 등장했고, 일제 제분기 유입, 일본인들의 메밀면 선호 식성 등 여러 시대적 요인이 맞물려, 서울에서도 평양냉면 전문 음식점들이 생겨났다고 해.
근대화, 도시화된 경성 분위기와 맞물려 냉면 배달까지 생겼는데, 한 손으론 자전거를 운전하며 한 손으론 냉면 그릇과 주전자를 가득 얹은 목판을 들고 골목을 누비는 배달부의 모습이 정말 진풍경이었다는데. 냉면은 주식이었다기보단 지식인들이나 기생, 노름꾼들의 별식이나 야식으로 인기였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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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을 배달하던 냉면 배달부들의 모습.(출처=KBS ‘한국인의 밥상’) |
한 : 잠깐 상상을 해봤는데, 기예의 한 장면처럼 신기하게 느껴져. 배달 음식의 원조는 짜장면이 아닌 평양냉면이었구나.(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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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금의 정열’ 중 설렁탕의 인기에 대해 묘사한 대목. |
<설렁탕에 녹아있는 일제 강점기 한반도 소 사육 정책>
한 : 난 일제 강점기 서민 음식하면, 가장 먼저 ‘설렁탕’이 떠올라. “설렁탕을 사다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라는 김 첨지 대사로 유명한, 현진건 작가의 ‘운수 좋은 날’을 비롯해, 여러 문학과 칼럼에서 설렁탕을 언급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어. 설렁탕도 일제 강점기 때 인기 배달 음식이었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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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당시에도 인기 서민 음식이었던 설렁탕. |
김 : 맞아. 설렁탕은 서울 음식이자, 일제 강점기 때 또 다른 인기 배달식이기도 했어. 조선시대부터 설렁탕은 천민들이 소를 잡고 남은 쇠머리, 뼈와 부산물을 끓여내 밥을 말아먹는 음식으로 이미 존재했지만,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소 사육 정책과 함께 한반도에 한우 마릿수가 폭증해 쇠고기가 돼지고기보다 값이 저렴해지면서 설렁탕 값도 매우 낮았다고 해. 그래서 더욱 서민들이 많이 먹게 되었어. 값싸면서도 든든하게, 빨리 ‘설렁 설렁’ 먹을 수 있는 점이 설렁탕을 대중화시킨 비결이었지.
우: 대개들 설렁탕은 국물이 뽀얄수록 뭔가 더 영양가 있고 제대로 우려냈을 거란 편견들이 있어. 하지만 실제로 소의 온갖 부위를 푹 고아 기름을 말끔히 걷어낸 설렁탕 색깔은 너무 뽀얗지 않은 게 좋아. 그리고 흔히들, 설렁탕에 살코기가 별로 없으면 투덜대곤 하는데 사실 설렁탕의 맛은 살코기보다 앞서 말한 부속 부위들이 끓으면서 내는 그 맛이 일품이야. 그래서 나는 살코기 외 부속 부위들도 살뜰히 넣어주는 오래된 설렁탕집이 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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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기 팀의 대화 모습. |
김 : 역시 식품공학전공자는 다르네.
한 : 설렁탕 국물에 깍두기 풀어 밥을 말아 얹어 먹는 것도 잊으면 안 되지.
김 : 맞아. 설렁탕에 깍두기는 예나 지금이나 필수지. (일동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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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운수 좋은 날’에서 묘사된 김첨지의 추어탕 식사 대목. |
<농민의 음식에서 문인들의 음식으로 부상한 추어탕>
김 : 서울은 사실 노동자들의 음식인 탕의 고향이야. 설렁탕, 해장국, 추어탕… 수도 서울에서 노동자들의 음식이 발달한 이유는 조선왕실과 양반들의 거주 도시이기 때문에 그만큼 그들의 수발을 드는 노동 수요도 많았기 때문이래. 이 중 추어탕은 논농사 중심인 한반도에서 예로부터 벼가 익기 전 냉해를 막기 위해 논두렁 물을 뺄 때, 겸사겸사 몸보신용으로 미꾸라지를 잡아 탕을 끓여 먹는 게 일반적이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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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식 추어탕(경상북도). |
한 : 서울식 추어탕과 남도식 추어탕이 다르다고 하는데, 서울식이 미꾸라지를 갈아 만든 것 맞지?
김 : 나도 문헌을 읽다 알게된 내용인데, 서울식은 미꾸라지를 갈지 않고 그냥 ‘통마리’를 넣는 방식이고, 곱게 갈아 체에 내려 뼈를 추려 만든 게 남도식이래.
우 : 어? 정말? 뭔가 서울 사람들이 징그러운 미꾸라지를 싫어해서, 갈아서 국물과 함께 끓여먹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추어탕을 좋아하는 나도 몰랐던 사실이야.
김 : 서울에서 남도식 추어탕을 흔하게 팔다보니, 이제는 서울에선 보기 힘들어진 서울식 ‘통마리’ 추어탕이 뭔가 남도식이 아닐까 하는 편견을 갖게 하는 것 같아. 약간 아이러니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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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어탕에 미꾸라지를 갈지 않고 통으로 넣는 것은 서울식 조리법이다. |
한 : 원래 추탕으로 많이 불리던 이 음식이 해방 시대에 여러 문인들이 즐겨먹던 음식이라고도 하더라고.
김 : 해방 전후에 걸쳐, 추어탕은 여러 문학가들과 언론인, 정재계 인사들이 즐겨 찾는 음식이기도 했어. 정지용 시인, 변영조, 박종화 작가 등은 1923년부터 있던 서울의 오래된 추어탕집인 용금옥의 단골이었고, 이용상 시인은 아예 이 용금옥에 대해 ‘용금옥 시대’라는 한 편의 책을 낼 정도로 이 오래된 추어탕집을 현대사의 산 무대로 그려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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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문인들의 단골 추어탕집 용금옥. |
한 : 광복절을 앞두고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해방 당시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음식과 그 맛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듯해. 우리 역사와 광복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 같아.
우 : 음식에 쓰인 식재료, 해방 시대에 음식이 유행하게 된 이유 하나 하나에 시대상이 모두 담겨있으니까.
김 : 맞아. 그게 바로 내가 해방 시대에 유행했던 음식들을 함께 살펴보고 싶었던 이유야.
우 : 그럼, 든든하게 한 끼 채웠으니 슬슬 산책하며 소화를 시켜볼까? 걷는 동안에도 함께 나누고 싶은 해방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아.
한 : 좋아. 어떤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궁금하네.
※ 담론에 참조한 서적 : 박찬일 ‘백년식당’(중앙 m&b), 정은숙·황교익 ‘서울을 먹다(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따비)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김연수 siren71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