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눈앞에서 놓쳤다. 다음 열차가 오기까지 지루함을 달래고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하철 벽면에 붙어있는 상자모양의 설치물이 눈에 들어왔다. ‘제세동기’라 쓰여 있었다. 생소한 사자성어를 마주한 듯 머릿속이 하얘졌다.
단어의 난해함에 당황했지만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설치물을 뚫어져라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위급환자에게 사용되는 심폐소생술 관련 기구로 보였다. ‘나 원 참, 굳이 저리 어렵게 썼을까? 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라고 꿍얼거리며 도착한 열차에 탔다. 어려운 한자어에 당황했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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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장소에 설치돼 있는 제세동기. |
‘제세동기(除細動器)’는 심정지 상태에 빠진 환자의 심폐소생을 위한 응급장비를 말한다. AED(Automated External Defibrillator), 자동제세동기, 심장제세동기 등 모두 심폐소생술의 기본 장비를 지칭하는 용어다.
하지만 이름만 가지고서는 일반인들은 그 기능을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또한 유사용어가 남발되면서 급박한 상황에서는 혼란만 가중시킨다는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기성세대가 알아듣기 힘든 소위 청소년들의 ‘외계어’ 남발도 문제지만, 안전 분야에서는 명칭을 들어도 쉽게 연상되지 않는 어려운 용어가 부지기수다.
이외에도 인근 공사장에서 볼 수 있는 ‘저류조(貯溜槽)’, 토지 관련 문서에 자주 등장하는 ‘공지(空地)’, 구매한 식품류 포장지 뒷면에 인쇄된 ‘소분(小分)’ 등 아직도 그 위상을 든든히 하고 있는 난해한 단어들이 많다. 한마디로 소통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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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던 어려운 한자, 일본식 한자 용어의 예. |
그러나 앞으로는 쉬워질 전망이다. 공공시설에 다수 설치돼 있는 ‘제세동기’는 ‘심장충격기’로 보다 쉽게 바뀐다. 행정안전부는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안전 분야 전문용어 42개를 알기 쉬운 용어로 순화한다고 지난달 22일 밝혔다.
행안부는 “그간 안전 분야에서 뜻이 어려운 한자 용어, 일본식 한자어 등이 많이 사용돼 국민들이 안전 관련 정보를 얻거나 법령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면서 “관련 중앙부처와 협의한 뒤 의견 수렴을 거쳐 대상 용어를 선정해 순화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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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제세동기는 심장충격기로 순화된다. |
주요 순화 사례를 살펴보면 ‘도괴(倒壞)’는 ‘무너짐’, ‘소손(燒損)’은 ‘타서 손상됨’, ‘수검(受檢)’은 ‘검사 받음’, ‘검체(檢體)’는 ‘검사 대상물’ 등으로 순화된다. 의약품을 보관하는 방법을 설명할 때 많이 사용하는 ‘냉암소(冷暗所)’라는 용어는 ‘차고 어두운 곳’으로 순화해 사용토록 했다.
아울러, 건축 분야에서 주로 쓰이는 ‘저류조(貯溜槽)’는 ‘(물)저장시설’, ‘구거(溝渠)’는 ‘도랑’, ‘도교’와 ‘교량’은 다리로 순화한다. 산업 분야에서 사용되는 ‘구배(勾配)’는 ‘기울기’로, 교통 분야 등에서 쓰이는 ‘계선(繫船)’은 ‘배묶기’, ‘양묘(揚錨)’는 ‘닻올림’으로 순화되는 등 어려운 용어가 알기 쉽게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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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네뷸라이저는 의료용 분무기로 순화된다. |
일본어식 한자 용어인 ‘시건(施鍵)’은 ‘(자물쇠로)채움, 잠금’으로, ‘고박(固縛)’은 ‘묶기, 고정’으로 순화된다. 또한 이비인후과에서 주로 접하게 되는 외국어 용어인 ‘네뷸라이저(nebulizer)’는 ‘의료용 분무기’로 순화된다.
행정안전부는 확정된 용어를 중앙행정기관에 통보하여 소관 법령을 개정하도록 권고하고, 법령 개정 이전이라도 공문서 작성 등 행정업무에 순화용어를 쓰도록 할 계획이다.
류희인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은 “재난·안전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어려운 용어를 찾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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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는 어려운 안전 분야 전문용어 42개를 순화했다.(출처=행정안전부) |
단어를 보고 이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선 평상시 한자 공부를 게을리 했던 점을 반성하며 대충의 눈치와 암기로 상황을 모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급한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단어에 대한 빠르고 정확한 이해는 생사를 갈리게 할 만큼 촉각을 다투는 일이 된다.
그만큼 안전 분야에서 국민의 이해도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순화된 용어 사용은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언어는 소통이다. 앞으로도 사회구성원들이 언어장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최대한 쉽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