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평남 성천군 사가면에서 태어났다. 농업학교 학생이던 19세 때 곧 징집이 있을 거라던 선생님 말을 듣고 전쟁을 피해 산으로 도망쳤다. 그날, 동네 어귀 먼 곳까지 따라나와 손을 흔들며 ‘잘 숨어 있어라, 곧 만나자’고 눈물을 훔치던 어머니의 모습이 마지막이 되었다. 곧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아버지와는 작별의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산 속에서 붙잡혔고 곧 징집돼 인민군 병사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숱한 어려움과 죽을 고비를 넘기고 포로교환 때 남한을 선택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형과 누나들을 고향에 남겨두고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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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남북정삼회담을 코 앞에 두고 결혼 60주년을 맞아 엄마와 맥주 대신 보리차로 건배를 했다. |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온 때를 생각해 보니 지금 공익근무를 하고 있는 내 아들 나이 정도다. 아직 곁에 두고 살펴주고 챙겨주고 싶은 것이 많은 그 나이에 아버지는 홀로 사선을 넘어 왔다. 혈혈단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가장으로 열심히 살아왔다.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나서서 가족들을 찾진 않았다. 전국이 이산가족 찾기로 애끓던 그 시절에도 애써 TV를 외면하고 앉아계셨다. 생사확인이라도 해보라는 가족들의 말에 남한에 포로 출신의 가족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혹시라도 북에 사는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봐 싫다고 고개를 저으셨다.
포기도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었다. 그래도 이북5도민 행사에 빠짐없이 침석해 가족을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들로부터 바람결에 실려 오는 아주 작은 소식에도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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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명절에 고향의 고향의 부모님께 술잔을 올리고 있다. |
10년 전 쯤, 미국에 사는 친지에게서 누나가 고향집에 그대로 살고 있더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편지를 받은 것도 아니고 사진 한 장 건네받은 것도 없었다. 그저 ‘누나가 그 집에 살고있더라’ 이 한 줄 안부에 아버지는 폭풍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것 같다고 하셨다.
훗날 아버지는 그날 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살아계신지 돌아가셨는지 알 수가 없어 미루고 미뤘던 부모님께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10년이 흘렀다. 그 사이 아버지는 9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이젠 삶의 희노애락이 별 거 아닌 철학자 같은 나이를 살게 됐다는 아버지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비교적 담담하셨다.
점심 나절 복지관에 가서 바둑 한 판 두고 오는 일이 유일한 낙이지만 이제 그마저도 점점 힘에 부친 것 같다. 남북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맞은 결혼 60주년 축하 자리에선 맥주 대신 보리차로 건배를 해야할 만큼의 건강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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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게 차린 제삿상. |
아버지는 다른 때와는 달리 4월 27일 열리는 남북정상회담 소식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TV 볼륨을 크게 틀고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의제에 오를 것인지에 촉각을 세웠다. 북한은 믿을 수 없다면서 이전 남북회담이나 이산가족 상봉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던 아버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종전 선언이니 평화공존이니 하는 말이 나올 때마다 혹시라도 살아있을 가족의 생사확인에 대한 희망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가족을 만나거나 생사확인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통일부에 따르면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가 13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 중 생존자는 고작 5만8천여 명이다. 지난 3년 간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절반 이상이 가족과의 만남을 애타게 그리다가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마음 속 간절한 소원은 짐작만으로도 가슴 아프다. 이번 기회에 ‘이산가족 전원상봉’ 이라는 문재인 대통령 대선공약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최은주 tkghl22@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