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다. 한국사를 넘어 세계사적으로도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순간이다.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이후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이 열리기까지 북한과 미국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그것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성사 여부를 두고 마음을 졸여야 했다.
모든 국민의 눈과 귀가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싱가포르로 향해 있었다. 필자 또한 하루 종일 북미정상회담 뉴스특보를 틀어놓고 지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만난 세기의 회담을 지켜보면서 문득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통일을 위해 애쓰다 돌아가신 분이 생각났다.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다. 김구 선생의 뜻을 기리며 그 분이 최후를 마쳤던 경교장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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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 건물. |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강북삼성병원 입구로 들어서면 하얀 병원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2층짜리 석조건물이 눈에 띈다. 대한민국 사적 제 465호로 지정된 ‘경교장’이다.
8.15 해방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공간이면서 김구 선생이 서거한 역사의 현장이다. 지하 1층부터 2층까지 전시실로 꾸며져 있다. 병원 건물의 일부로 사용했던 실내를 지난 2010년 복원공사를 거쳐 과거 경교장의 원형 그대로를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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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 1층 응접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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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을 위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
1945년 11월, 중국에서 조국으로 돌아온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경교장에 머물렀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벗어난 8.15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 둘로 나뉘어졌다.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남과 북의 역량을 단결하여 자주 통일의 구체안을 완성하기 위한 국무위원회를 지속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추진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통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의도가 분명해지자 당시 남한에서는 비합법 투쟁으로서 유격대 투쟁과 합법적 정치 투쟁으로서 남북협상이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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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 앞에서 시위하는 학생들. |
1948년 2월 10일 김구 선생은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이라는 호소문을 통해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표명했고, 2월 16일 김규식과의 공동 명의로 단독 선거 강행을 저지했다. 또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공식 제의했다.
“한국이 있고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마음속의 38도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도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3천만 동포, 자매, 형제여!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깊이 생각하라.“ -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중
김구 선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의 서거와 이듬해 6월 25일 한국전쟁의 발발, 12월 10일 김규식의 서거 등으로 통일국가 수립은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종결됐다. 그리고 김구 선생이 우려했던 대로 분단은 고착화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벌써 분단 70년의 기나긴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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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 2층 총탄이 지나간 유리창. |
김구 선생은 경교장 2층에서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돌아갔다.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그의 간절한 바람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도 총탄이 뚫고 가면서 사방으로 금이 간 창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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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 서거 당시 피 묻은 옷. |
지하 1층 전시실에는 당시 김구 선생이 입고 있었던 피 묻은 옷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선명했던 핏자국도 빛이 바랬다. 하지만 김구 선생의 피 묻은 옷은 우리에게 교훈으로 다가온다. 필자처럼 전시실을 둘러보던 사람들이 피 묻은 옷을 자세히 보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네 소원(所願)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大韓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自主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 김구, ‘백범일지’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이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통일을 바랐던 김구 선생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고, 그 분의 간절한 바람이 이제야 그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가슴 벅찬 하루였다.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윤혜숙 geowins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