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아우내장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유관순열사기념관이 있다. 유관순열사기념관을 뒤로 하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유관순 열사 추모각이 나온다. 유관순 열사 영정을 모셔둔 곳이다. 한복을 차려입은 꼿꼿한 유관순 열사의 자태에서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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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영정 앞에서 묵념하는 시민. |
4월 1일 정오를 지난 시각이다. 중년의 한 남성이 한참 유관순 열사 영정을 바라보다가 묵념을 올린다. 뭔가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뒤돌아서는 그에게 물었다. “유관순 열사와 관련이 있는 분이신가요?”
필자를 빤히 쳐다보면서 그는 이렇게 대꾸한다. “우리는 유관순 열사에게 커다란 빚을 진 채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 모두 채무자인 셈이지요.” 그렇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 누군들 순국선열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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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 기념식에 참가한 사람들. |
2019년 4월 1일 오전 10시. 천안 동남구문화원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천안에서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가 진행되는 날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4월 1일은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날로 남아 있다. 왜 그럴까? 정확히 100년 전 오늘로 거슬러 올라가자.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지금의 파고다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우리의 평화적인 시위에 일본군은 총칼을 휘두르면서 위협했다. 학생들이 가세하자 일제는 휴교령을 내렸다. 당시 이화학당에 재학 중인 유관순 열사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숨겨서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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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가 이어진다. |
천안 동남구문화원이 위치한 이곳이 아우내장터다. 4월 1일 오일장이 열리는 날에 맞춰서 천안을 비롯한 주변 24개 지역에서 온 3000여 명의 군중들이 장터에 모여들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날 정오에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때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이 일본군의 총칼에 돌아가시고 유관순 열사도 일본군에게 붙잡혀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는 수난을 당한다.
지난 3월 1일, 삼일절을 맞아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가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까지 전국 각지를 돌면서 독립의 횃불을 밝히고 있다. 세종에 이어 4월 1일, 독립의 횃불이 천안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부터 횃불봉을 든 국민주자, 천안 시민 등이 빼곡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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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독립만세운동 재현극에서 열연을 펼치는 출연배우들. |
양승조 충청남도지사는 “독립의 횃불이 독립투쟁의 성지인 천안에 도착한 것을 환영한다. 우리가 나라를 잃고 힘들었던 시절에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선열들은 나라를 위해 희생했다. 우리는 그분들의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라고 강조했다.
기념식에 이어 아우내장터에서 벌어졌던 4.1 독립만세운동 재현극을 무대 위에 올렸다. 오늘따라 유관순 열사가 부활한 듯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는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찬바람에 실려 아우내장터를 휘몰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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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독립의 횃불 릴레이 행렬. |
천안 독립의 횃불 릴레이 코스는 천안시 동남구문화원(아우내장터)에서 유관순열사기념관까지 총 1km 구간에 이른다. 긴 행렬의 선두에 대형 태극기를 펼쳐든 여학생들이, 그 다음 ‘독립의 횃불’ 플래카드를 든 남학생들이 앞장선다. 뒤따라 재현극 배우들이 태극기를, 독립의 횃불 주자들이 횃불봉을 들고 행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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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행렬. |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행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1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다함께 한마음으로 행진해서 그럴까? 1km 구간을 걷는데도 거리가 짧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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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어르신들도 만세를 외친다. |
정류장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던 어르신들도 릴레이 행렬의 “대한독립만세” 소리에 맞춰서 덩달아 두 팔을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사전에 연출된 장면이 아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반사적으로 나왔다. 독립을 열망하는 강렬한 외침을 들은 누구든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이 일본군의 감시 속에서도 전국적으로 퍼져 나간 이유일 것이다.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주독립의 열망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움직이게 만들었다. 남녀노소, 계층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자발적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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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독립만세운동 재현극이 이어지고 있다. |
유관순열사기념관에 도착한 뒤 유관순 열사의 동상 앞 너른 마당에 사람들이 운집했다. 4.1 독립만세운동 재현극이 이어졌다. 이번엔 일본군이 등장했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그만두라며 위협한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일본군은 총을 쏜다.
여기저기 쓰러지는 사람들 틈에서 울음도 잠깐이다.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일본군 앞에서 보란 듯이 당당하게 독립만세를 외친다. 마침내 일본군이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 마지막 장면은 1945년 8월 15일 우리가 해방되던 그날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다. 우리의 끈질긴 독립운동은 한때 반짝 그치지 않고 해방의 그날이 올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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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서훈 1등급 추서를 축하하는 메시지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
독립의 횃불 주자로 참가한 천안시 노인회 지회장 유홍준 어르신은 “열사의 고향 아우내 장터는 신분의 귀천 없이 모든 계층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4.1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라고 말씀하셨다. 유관순 열사가 탄생했고, 4.1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던 후손으로서의 강한 자부심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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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47분을 상징하는 추모비둘기를 공중으로 날려보내고 있다. |
4.1 독립만세운동 당시 희생된 순국선열 47분의 넋을 위로하고자 추모비둘기를 공중으로 날려 보내고, 유관순 열사 동상 앞에서 대전으로 이어질 횃불의 점등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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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자 추모각에서 순국선열 47분을 위한 헌화 및 분향이 있었다. |
곧이어 순국자 추모각에서 순국선열 47분을 위한 추모제가 있었다.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셔둔 추모각에 헌화 및 분향을 하고 추모의 글을 낭독하는 의식을 치렀다. "부디 이제부터 지하에서 편히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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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열사기념관 전시실에서 유관순 열사의 생애를 엿볼 수 있다. |
필자는 유관순열사기념관의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18세라는 짧은 생애가 말해주듯 전시실이 협소했다. 그래도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해서 그녀를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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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 만세운동 발생지에 기념비와 조각상이 있다. |
아우내 장터 입구에는 4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던 공간을 국가보훈처가 현충시설로 지정해두고 있었다. 4.1 독립만세운동을 벌였을 당시 일본군의 총칼에 맞서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장면을 곳곳에 조각상으로 형상화했다. 독립의 횃불은 오는 6일까지 예산(3일), 충주(4일), 청주(5일), 화성(6일)을 거쳐 11일에 다시 서울 임시정부수립기념식장에 도착한다.
필자가 천안에서 머물렀던 반나절에 불과한 시간 동안 형언키 어려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고귀한 희생으로 지켜내려고 했던 대한민국이다. 그분들께 진 커다란 마음의 빚을 갚는 길이 무엇일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생각해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