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서 계속>
항주 임시정부 청사(호변촌)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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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차 아침, 항주 임시정부 청사(호변촌)에 방문했다. |
3일차 아침, 항주(항저우) 시기(1932년 5월~1935년 11월)에 청사로 사용했던 항주 임시정부 청사에 방문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주로 이동했다. 군무장 김철이 머물던 청태 제2여사를 청사로 사용하다가,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호변촌 23호에 청사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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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고 깔끔한 느낌이라 낯선 기분마저 들었다. |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 쬐는 항주 임시정부 청사는 평화로운 느낌마저 드는 조용한 공간이었다. 유럽 느낌이 나는 주거지를 마주하고 있어 100년 전 임시정부 요인들이 있었다는 것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 때와 마찬가지로 영상을 시청하고 답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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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전시와 공간들을 볼 수 있어 유익했다. |
2층 구조로 이뤄진 청사 건물은 당시 청사로 사용된 공간의 복원실과 3개의 전시실로 이뤄져 있었다. 1층에는 접견실과 주방이 있고 2층에는 크고 작은 침실들이 있어 역시 소박한 느낌이 강했다.
항주 임시정부 청사는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 비해 전시물이 다양했고, 자유로이 사진을 촬영할 수 있어 여유 있는 취재가 가능했다. 항주로 이동한 후의 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한 내용들이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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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의 흉상과 독립정신이란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
김구 선생 피난처에서 봤던 김구 선생님의 흉상을 다시 한 번 마주 할 수 있었다. 흉상 옆에 김구 선생의 친필로 쓰인 ‘독립정신’이라는 글씨가 유독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독립정신이란 단어가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김구 선생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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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서 바라본 항주 임시정부 청사의 모습. |
서포터즈로 참여한 김정하(24, 학생) 씨는 “임시정부 현장답사는 가슴을 요동치게 만든 경험이었다. 직접 와본 임시정부 청사와 그들이 걸은 길은 글과 콘텐츠를 통해서 느껴지던 것과 사뭇 달랐다. 현장이 남아있음에 감사했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임시정부요인들에 대한 존경과, 자랑스러움, 스스로에 대한 창피함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경이다” 라고 말했다.
한국독립당 사무소터(사흠방), 청태 제2여사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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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당 사무소 터인 사흠방에 도착했다. |
이어 항주 임시정부 청사에서 도보로 이동하며 항주에 위치한 여러 유적지를 답사했다. 처음으로 들른 곳은 한국독립당 사무소터인 사흠방이었다. 사흠방은 한국독립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따라 항주로 이동하여 사무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표적인 정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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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오복리 2가. |
사흠방을 지나 조금 더 발길을 재촉해 항주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인 오복리 2가 2호다. 상해를 떠난 임시정부는 항주에서 약 3년 6개월여 동안 머물렀는데,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이곳에서 1935년 11월까지 있다가 임시정부가 이동할 때 함께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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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에서 처음 청사로 이용됐던 청태 제2여사. |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앞서 언급했던 호변촌 항주 임시정부 청사 전 임시정부 청사였던 청태 제2여사다. 지금은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최태성 강사와 함께한 역사 토크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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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별쌤으로 유명한 최태성 강사의 강의 및 토크콘서트가 시작됐다. |
항주 임시정부 관련 유적지를 둘러본 후 숙소에서 최태성 강사와 함께하는 토크콘서트가 진행됐다. 1부 순서에서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주제로 최태성 강사의 강의가 진행됐다. 이날 토크콘서트를 위해 항주까지 날아온 최태성 강사는 특유의 언변과 구체적인 사례들을 바탕으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요성에 대해 강의를 펼쳤다.
최태성 강사는 러시아 무르만스크 철도공사 현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도움으로 프랑스 중부 마른(Marne) 지방의 소도시 쉬프(Suippes)에 정착할 수 있었던 한인 노동자 30여 명에 대한 이야기로 임시정부가 당시 어떤 일을 했었는지 설명하며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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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응답과 퀴즈 등으로 흥미로운 토크콘서트가 진행됐다. |
2부에서는 ‘나의 대한민국은?’ 이라는 주제로 심층적인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중국이 일제 파시즘 침략에 맞선 부분을 우리의 독립운동과 어떻게 연관 지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최태성 강사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항일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생겼다는 점일 것이다. 이로 인해 항일연합전선이 구축될 수 있었다”라며 “답사를 다니다 보면 ‘왜 중국이 우리나라 독립운동 유적지를 지켜주고 있지?’라는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여러 이해관계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저 고맙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라고 갈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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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도 다양한 질문에 현명한 답을 내놓은 최태성 강사. |
‘어린 학생들에게 어떻게 제대로 된 독립운동사를 가르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최태성 강사는 “우리나라의 역사 이야기에는 ‘사람’이 없다. 그저 암기를 해서 시험을 보는 과목일 뿐이다.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기에 사람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교육이 효과적일 것 같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문민정(23, 학생) 씨는 “토크콘서트에서 중국과 형성했던 항일전선의 의미를 말씀해 주셨는데 좀 더 크게 바라볼 수 있는 설명이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때의 협력이 현재 중국 정부와 한국 정부가 협력해 역사 유적이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금 알 수 있었던 뜻 깊은 시간이었다” 라고 소감을 밝혔다.
중국 내 마지막 임시정부, 중경 임시정부 청사(연화지)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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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 임시정부 청사(연화지)에 도착했다. |
토크콘서트로 감동 가득했던 3일차 밤이 지나가고 정신없는 4일차가 시작됐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중경(충칭)으로 가는 중국 국내선 비행기를 타야했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고 중경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중경 임시정부 유적지 답사가 진행됐다. 살인적인 일정에 힘들 법도 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청사에 간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피곤한 얼굴임에도 두 눈 만큼은 맑게 반짝이는 탐방단이 눈에 띄게 많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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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간 걸어온 임시정부의 여정이 마무리된 중경 임시정부 청사. |
중경 임시정부 청사(연화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중경으로 옮겨온 뒤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사용한 청사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항주, 가흥, 진강, 장사, 광주, 유주, 기강을 거쳐 중경에 이르기까지 27년간의 여정이 바로 이곳에서 마무리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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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 임시정부 청사의 복원을 기념하는 기념비. |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곳 청사에서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활발한 항일투쟁을 펼쳐나갔다.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이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본국으로 환국한 뒤 연화지 청사는 여관, 학교, 주택 등으로 사용되다 1994년 6월 한, 중 정부의 협력으로 복원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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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건물에서 다양한 전시와 복원 공간을 둘러볼 수 있었다. |
1호부터 5호까지 다섯 채의 건물로 이뤄진 중경 임시정부 청사는 이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전시하는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중국 정부로부터 국가 2A급 관광지로 지정받았으며, 중경시 시급문물보호단위 65-38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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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하고 알찬 전시를 통해 못다한 임시정부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
상해, 항주 청사에 비교했을 때 큰 규모의 청사였기에 전시물의 내용과 다양한 공간들이 인상깊게 다가왔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단체사진으로 유명한 계단을 오를 때는 27년 간 꿈에서도 그렸을 광복을 맞이한 그 벅찬 순간이 떠오르며 감동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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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함께 모여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불렀다. |
태극기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박광일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등 각자 저마다의 시간을 보낸 뒤, 답사를 함께한 모든 사람들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제창했다. 1절부터 4절까지 애국가를 부르면서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고 저마다의 감정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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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박 6일 동안 동행한 박광일 작가의 자세한 해설은 답사 내내 큰 지침이 됐다. |
서포터즈 김보관 씨는 “광복이란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했던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를 보니 감격스럽다.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광복을 맞이하고도 몇 달 뒤에나 돌아올 수 있었던 꿈에 그리던 독립된 조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그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또 앞으로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를 위해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할까 생각해 볼 수 있던 기회였다”고 말했다.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던 중경의 유적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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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막 사이로 살펴본 오사야항 청사 터의 모습. |
중경 임시정부 청사에서의 감동적인 순간을 뒤로하고 중경에 위치한 또 다른 독립운동의 현장들을 답사했다. 첫 번째 코스는 중경 임시정부 청사 바로 근처에 있는 ‘오사야항 청사 터’였다. 오사야항 청사는 임시정부가 앞서 소개한 연화지 청사로 옮겨갈 때까지 중경에서 가장 오래 사용한 중경 내 세 번째 청사였고, 2층 목조 가옥으로 방이 70여 칸이나 되는 규모였다 전해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재개발이 결정되어 철거됐고 현장에서도 가림막이 있어 제대로 된 터조차 볼 수 없었다. 중경시 정부는 재개발 후 청사를 복원한다는 계획이지만 이미 원형이 모두 사라져 아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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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복원 기념식이 열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
이어 ‘광복군 총사령부’로 향했다. 1940년 9월 17일 창설식을 거행한 광복군 총사령부다. 당시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광복군을 창설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중국군사위원회 실무자들은 조선의용대의 전례를 들며 광복군의 독자성을 부인했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자적으로 광복군을 조직하기로 방침을 마련하고 1940년 9월 광복군 창설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지난달 29일 복원 기념식을 거행해 이낙연 국무총리가 직접 방문한 장소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탐방단이 방문한 21일에는 개방이 되지 않아 밖에서 외관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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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사위원회의 옛 건물에 도착했다. |
이어 세 번째 답사지로 앞서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명하며 언급된 중국군사위원회의 옛 건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과 중국 국민당 장개석(장제스) 군사위원회 위원장의 면담이 진행된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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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위원회 옛 건물 앞에서 카이로 회담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해당 면담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카이로 회담 개최 소식을 접한 뒤, 회담 참가국인 중국 국민당 정부에 ‘한국의 자유독립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은 ‘전후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하자’고 주장했고 이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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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산 한인묘지의 터, 담장 넘어로 멀리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
네 번째로 ‘화상산 한인묘지’를 들렀다.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들의 묘지가 있었던 자리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이었던 ▲ 송병조 ▲ 차리석 ▲ 손일민 ▲ 김구 선생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 ▲ 김구 선생의 장남 김인 등의 묘지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곽낙원 여사와 김인의 유해는 1948년 환국했다.
다만 이들 외에 20여 명의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묘지도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공장과 쓰레기 처리장 등이 생겨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됐다. 현장에서도 담장 넘어 저편이 한인묘지가 있던 자리다 정도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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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제1지대 본부 터로 예상되는 곳. |
마지막 다섯 번째 답사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 본부 터였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 옆쪽 언덕에 올라가서 바라본 한국광복군 제1지대 본부 터는 흔적조차 희미한 곳으로 처음에는 정확히 어디를 바라봐야하는지도 애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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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멀리서 위치를 예측해 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
1942년 한국광복군 제1지대의 본부가 있던 곳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고속도로 개통되고 현지 주민들의 의견도 일치하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 어렵다. 그저 저 일대가 옛날 한국광복군 제1지대의 본부였으리라 여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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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의 휴대폰에 찍힌 장소와 현장을 비교해보며 안타까움을 달랬다. |
다섯 곳을 답사하면서 느낀 것은 ‘생각보다 너무 많은 유적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섯 곳 중 광복군 총사령부는 다행스럽게도 복원됐으나 나머지 장소들은 이미 완전히 사라져버렸거나 재개발이 끝난 후에 복원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타국의 사정이니 이해를 하는 바이지만, 한국인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5일차, 기강 박물관 및 이동녕 선생 거주지, 토교촌 한인거주 옛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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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차 아침 기강으로 이동해 기강박물관에 도착했다. |
엄청난 일정을 소화했던 4일차가 지나고 사실상 답사의 마지막 날인 5일차 아침이 밝았다. 살짝 비가 내려 추운 날씨였으나 탐방단의 모습은 밝디 밝았다. 중경에서 기강으로 이동해 기강박물관으로 향했다. 기강에는 임시정부 청사가 남아있지는 않으나 기강박물관 3층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의 흔적과 전시물을 볼 수 있다. 다만 아쉽게도 현재 3층에 대한 보수가 이뤄지고 있어 전시를 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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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강박물관의 의의에 대해 설명하는 박광일 작가. |
박광일 작가는 “기강박물관이 가지는 의의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일단 지금까지 우리가 다닌 유적지는 한국과 중국 정부가 협조 하에 복원한 것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기강박물관에서는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자료들을 정리해 박물관에 전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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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강 이동녕 선생 거주지의 모습. |
다음으로 많은 탐방단들이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로 꼽은 ‘이동녕 선생 거주지’를 찾았다. 임시정부의 네 번째 주석으로 선출된 후, 김구 선생과 함께 전시 내각을 구성, 서안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한 것으로 유명한 이동녕 선생은 임시정부가 기강에 머물던 시기에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건물에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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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건물들 사이에 이동녕 선생 거주지만 보존되어 있다. |
특이한 것은 이동녕 선생 거주지를 제외한 주변으로는 모두 높은 아파트와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마치 이동녕 선생의 거주지만 빼놓고 건물들을 올린 듯 보이는데, 실제로 중국 정부의 배려로 이동녕 선생의 거주지를 피한 나머지 대지에만 건물을 올려 거주지가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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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터에 비석만이 남아있다. |
이어 중국 임시정부 탐방의 마지막 코스인 ‘토교촌 한인거주옛터’에 들렀다. 토교촌 한인거주옛터는 김구 선생이 중경에 도착해 중국의 전시구호기관인 진제위원회와 교섭해 토교 동감 폭포 위쪽의 한 구역을 매입. 100여 식구가 머물 수 있는 곳을 마련한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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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거주옛터임을 보여주는 유일한 흔적. |
임시정부의 안주인 역할을 한 정정화의 ‘장강일기’에는 이곳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으며, 물이 맑아 빨래도 하고 머리도 감으며 고향에 온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는 표현이 있다. 허나 100년 뒤 찾은 한인거주옛터는 스산한 느낌의 폐공장 근처에 남겨진 휑한 공터였다. 무너져 가는 담장 옆의 작은 비석 하나가 옛날 이곳에 한인들이 살았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표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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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일 작가의 설명을 듣는 탐방단의 표정에도 아련함이 묻어난다. |
서포터즈 김수현(22, 학생) 씨는 “한인들이 거주한 곳의 모습이 작은 비석으로만 남아있는 것을 보며 저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여기서 스스로 조국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개인적 평안과 안위를 찾던 그들의 모습을 그리다보니 마음이 아팠다. 임시정부 탐방 내내 느꼈던 아련한 마음에 정점을 찍은 가장 인상 깊은 답사지였다” 라고 감상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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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박 6일의 답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
토교촌 한인거주옛터를 끝으로 5박 6일간의 모든 답사 일정이 마무리됐다. 일정 내내 전문적인 해설로 답사의 열매를 맺게 해준 박광일 작가는 “답사를 마친 후, 독립운동 유적지와 사건들을 보면 독립운동가들이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의 모양을 자세히 살피면 안에서 밖으로 내젓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는 독립 운동가들이 우리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라’ 라는 말을 전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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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당당히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
임시정부 요인들이 27년 간 걸어온 길을 고작 6일 만에 따라 걸으면서도 확실하게 느낀 것이 있다. 우리는 ‘100년 전 그들의 피와 눈물이 있었기에 지금의 일상을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일정을 마치는 지금. 100년 전 그들에게 우리가 남길 수 있는 한 마디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이 한마디를 꼭 전하고 싶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대한민국 정책현장을 누비는 열정 가득한 정책기자입니다. 다양한 정부부처 기자단 경험과 장관상 7회 수상의 경험을 살려, 생생하고 정확한 정책기사를 작성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