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안동에서 열린 ‘역사다방’에 다녀왔다. 역사다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행사 중 하나로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역사 토크쇼이다.
이번 행사는 4월 6일 안동에서 시작해 임시정부 수립 정확히 100주년이 되는 날인 4월 11일에는 서울, 4월 13일에는 인천에서 열린다. 이번 안동 편에는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이익주 교수와 ‘찌라시 한국사’의 저자 김재완 작가, 안동 MBC 강지혜 아나운서가 패널로 참석해 특별한 강연을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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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토크쇼 ‘역사다방’ 안동편. 강의 중 촬영이 금지되어 강의 사진은 찍지 못했다. |
1900년 전후의 세계 정세를 살펴보면 전 세계의 66.8% 정도가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고 인구수로 보자면 56.1%, 약 9억7000만 명의 사람들이 식민 지배하에 살고 있었다. 이 시대에 조선에서의 독립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끈질기게 일어났는데, 그 이유를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평화’와 ‘행복’에 있다.
3.1독립선언서에서 나타나 있듯 우리 선조들은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동양의 평화, 세계의 평화, 그리고 인류의 행복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대외명분으로 내세워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가운데, 경북 지역 그중에서도 안동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됐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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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내앞마을.(출처=다음지도) |
도산서원, 병산서원 등 대표적인 양반 마을이었던 안동은 조선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조선의 자존심을 가진 곳이었다. 그래서 특히 안동의 성리학자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 사실에 울분을 터뜨렸고, 위정척사운동을 시작으로 개화운동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안동의 인구가 16만인데 독립유공자가 350여 명에 이르며, 1910년대 안동 내앞마을 인구 대략 700명 가운데 독립유공자의 수가 17명이다. 안동이라는 도시에서만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독립운동가들은 만주로 이주해서 일본을 상대로 무력 항쟁, 즉 독립전쟁을 벌이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 중심이 된 인물이 바로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동산 유인식, 일송 김동삼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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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룡 선생.(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집안의 노비만 400명 가량 있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졌던 석주 이상룡 선생은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지난해 방영했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고애신(김태리 분) 집안의 정기를 끊기 위해 일본군이 고택을 허물고 철도를 까는 장면이 바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인 ‘임청각’에서 따온 장면이라고 한다.
실제로 일제가 항일 정기를 끊겠다며 마당을 관통하는 중앙선 철도를 놓기도 했는데 올해부터 2025년까지 복원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올해는 임청각이 지어진 지 정확히 500년이 되는 해로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안동읍 법흥동 출신의 이상룡 선생은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을 거쳐 대한협회 안동지회 지회장을 맡았다. 후에 대한협회가 일진회와 손을 잡자 안동지회는 이에 반발하며 해산을 했다. 이때 서간도에서 활동하던 애국계몽단체 신민회가 만주 이주를 제의했고, 1910년 말에서 1911년 초에 이시영 형제, 이상룡 선생 등이 100여 명 가족을 이끌고 삼원포로 이주했다.
당시의 간도 지방은 고구려와 발해의 옛 영토였다는 점에서 조선인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줬고, 국내가 아니었음에도 일본 타격이 충분히 가능한 거리였다는 이유로 많은 한국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해 거주했다. 3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려 만주에 도착한 이상룡 선생은 1911년 경학사를 설립했고 무장항일투쟁을 준비하기 위한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신흥강습소는 훗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흥무관학교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하지만 추위와 기근 등의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됐고, 상해 임시정부가 생긴 이후에 많은 사람이 상해로 이주했지만 끝까지 삼원포의 기지를 지킨 두 분이 바로 석주 이상룡, 그리고 일송 김동삼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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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 김동삼 선생.(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김동삼 선생은 안동 의병의 최고 지도자였던 서산 김흥락을 스승으로 모시며 정세 변화를 눈여겨보다 안동에 혁신의 바람이 불자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협동학교의 교감으로 지냈다. 이후에 만주로 이주하여 신흥학교 설립과 경학사 결성에 참여했으며, 1914년에 백서농장(白西農庄 : 백두산 서쪽의 농장)을 건립하여 장주가 된다.
표면상으로는 농장이었지만 실제로는 군사 훈련을 하는 독립군 기지였던 곳으로, 백서농장은 후에 서로군정서로 개편된다. 김동삼 선생은 1931년 일본군의 만주 침략 직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결국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다. 그는 유언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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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유인식 선생.(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선생과 함께 ‘혁신 유림’으로 불리는 한 사람이 더 있는데 바로 동산 유인식 선생이다. 그는 을미의병에 참여했고 1903년 서울 유학 도중에 신채호, 장지연 선생을 만나 사상의 전환을 이루고 안동으로 내려와 내앞마을에 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설립한다. 현재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 바로 협동학교의 옛터다.
협동학교에는 양반만이 입학할 수 있는 신분적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안동 지방의 경우, 유림 세력이 강했고 신분제 질서가 강하게 남아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유림을 상대로 하는 근대화 교육을 시행했다고 볼 수 있다. 유인식 선생의 활약으로 이상룡, 김동삼 선생처럼 근대화를 주장하면서 애국계몽운동에 동참하는 유림이 생기는데, 이들을 ‘혁신 유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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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내에 있는 추모비. |
3.1운동을 통해 독립에 대한 열망, 그리고 민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눈으로 확인했다.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을 때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가 바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이었고, 이는 민(民)의 힘을 믿은 것이다.
우리 민족은 계속해서 싸워왔다. 우리는 식민 지배의 역사를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식민지하에서 우리가 어떻게 싸웠고, 또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지에 초점을 둬야 한다. 수많은 무명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독립운동들이 여전히 너무 많다. 누가 얼마나 잘 싸웠는지 하나하나 사람들이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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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다방 공식 포스터.(출처=국가보훈처 공식블로그) |
4월 11일과 13일에는 각각 서울과 인천에서의 일정이 남아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행사인 만큼 사람들이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참여하면 좋을 것 같다.
▶ 국가보훈처 공식 홈페이지 https://www.mpva.go.kr/mpva/main.do
▶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위원회 https://www.together100.go.kr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 운동가 https://www.together100.go.kr/lay2/program/S1T8C14/people/index.do
▶ 역사다방 공식 홈페이지 http://www.remember0411.kr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문보미 ansqhal3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