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수궁 '구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특별 공개 정동은 근대의 여명이 처음으로 스며든 곳이다.
돌담 너머로 종소리가 들리던 대한제국의 궁궐과 붉은 벽돌 공사관들이 마주한 거리.
1896년, 고종은 갑작스레 경복궁을 떠나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며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모색했다.
고종이 서양 외교관과 문물을 접하던 길은 오늘날 시민에게 '고종의 길'로 열려 있다.
고종의 길 초입. 덕수궁 돌담과 미 대사관저 담이 나란히 이어진다.
이 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이 제국주의의 파도 속에서 국가의 생존을 위해 걸었던 통로다.
왕이 나가던 길이자, 나라의 근대화가 들어오던 길이었다.
돌담길의 그림자는 그때 그 시절, 나라를 잃은 군주의 고뇌와 맞닿아 있다.
◆ 잃어버린 선원전, 복원을 향한 첫걸음 '고종의 길'을 따라가면 돌담이 끝나는 자리, 넓은 잔디밭이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선원전(璿源殿) 터다.
선원전은 조선 왕실의 어진(御眞)과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궁궐 안에서도 가장 신성한 공간이었다.
덕수궁의 선원전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왕실의 위상을 새로이 세우기 위해 지어졌으며, 1901년 완공 당시에는 정전과 제례 공간, 부속 건물 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다.
선원전 터 안내판. 조선 왕실 제향 공간의 흔적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1920년대 일제강점기, 이 건물은 흔적도 없이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1938년 '조선저축은행'이 들어서고, 이어 미군정·주한미국대사관 등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한 세기의 시간 속에서 선원전의 존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졌다.
하지만 2021~2022년 진행된 발굴 조사는 상황을 바꾸었다.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현재 국립문화유산연구원)는 건물 기단석, 석축 계단, 초석 위치, 기와편 등을 다수 확인했으며, 이는 향후 복원 설계의 실증적 근거로 활용될 예정이다.
현장에는 발굴 조사 항목과 유구(遺構) 사진이 안내판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관람객은 사라진 전각의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지금 보이는 이 잔디밭이 바로 정전의 자리입니다."
현장에서 만난 덕수궁관리소 학예사는 손가락으로 지면의 흔적을 가리켰다.
"1901년 완공 당시 이곳은 덕수궁 내에서도 가장 엄숙한 공간이었죠. 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거나 고위 관리들이 국왕의 어진 앞에서 예를 올리던 곳입니다. 이번 발굴은 단순히 건물의 흔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제례 문화의 맥락을 복원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원전 권역 발굴 현장. 기단석과 건물 배치 흔적이 남아 있다.
◆ 근대 건축 속에 깃든 사람의 이야기 선원전 터 바로 옆에는 흰색 회벽과 스페인풍 기와를 얹은 양옥 한 채가 서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저축은행이 고위 간부를 위해 지은 중역사택이다.
당시로서는 최고급 주거 건축물로, 유럽풍 베란다와 대칭형 창문, 돌기둥 구조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구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외관. 근대 주거 양식의 상징.
2020년 국가유산청은 이 건물을 보수하며 내부를 전시 공간으로 개방했다.
현재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제22회 졸업 전시가 진행 중이다.
학생들은 각자 전국의 사찰·고택을 실측하고 3차원 입체(3D)로 복원한 모형을 선보인다.
전통 건축전 전시실 내부. 전통과 현대 기술이 만나는 공간.
한쪽 벽면에는 '군수리사지 복원안'이 전시되어 있었고, 도면 옆에는 학생들이 기록한 건축 용어와 구조 비율이 빼곡했다.
"단순히 옛 건물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그 시대의 건축 철학을 복원하는 작업이에요." 라고 말한 전시 담당 교수의 말처럼, 젊은 세대의 눈으로 본 전통은 더 이상 과거의 잔재가 아닌 '살아 있는 유산'으로 재해석되고 있었다.
학예사는 "이 공간의 복원 목적은 건축물 보존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의 삶과 기억이 함께 복원되어야 진정한 문화유산이 됩니다" 라며 "그래서 시민이 쉬어갈 수 있는 벤치, 야외 전시, 작은 음악회도 함께 기획 중" 이라고 덧붙였다.
◆ 정동으로 이어지는 외교의 길 - 러시아 공사관까지 사택을 뒤로 하고 담장 따라 후문 쪽으로 나서면 담장 끝으로 붉은 벽돌 지붕이 보인다.
이 구간은 덕수궁 외곽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 터로 이어지는 근대 외교의 길이다.
미 대사관저의 담장을 따라 올라가면 선원전 권역 후문에 닿고, 문을 나서면 정동공원이 나타난다.
공원 안쪽 언덕 위로 하얀 탑 모양의 건축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러시아 공사관 터,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덕수궁 중역사택 뒤편. 돌담길을 따라 올라서면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 터로 이어진다.
1896년 2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곳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약 1년 동안 머물며 대한제국 수립과 근대 개혁을 구상했고, 훗날 1897년 덕수궁으로 돌아와 황제로 즉위했다.
지금은 공사관저 건물 대부분이 사라지고 탑 형태의 상징적 구조물만 남아 있지만, 이곳은 여전히 한 시대의 격동을 증언하는 공간이다.
◆ 역사는 공유하는 공간 - 청소년이 본 선원전과 중역사택의 의미
현장 체험학습 중 만난 학생들. 직접 보고 듣는 역사 교육의 순간.
현장을 나서는 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우연히 한 무리의 모교 후배들을 만났다.
교사의 인솔 아래 '근현대 문화 탐방 학습'에 참여하고 있던 학생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오늘 본 선원전 터와 옛 일본인 사택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덕수궁 뒤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선원전 터 안내판을 보면서 정말 신기했어요. 사진으로만 보던 장소가 눈앞에 있으니까, 교과서 속 이야기가 현실처럼 느껴졌어요."
학생들은 선원전이 조선 왕실의 제례 공간이었다는 사실과, 그 자리에 일본인 사택이 세워졌다는 역사적 맥락을 직접 확인하며 한 시대의 단절과 복원이 지닌 무게를 느꼈다.
다른 학생은 중역사택 내부 전시를 본 인상을 덧붙였다.
"우리가 흔히 '한옥' 하면 그냥 전통적인 집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여기 전시된 한옥의 구조를 현대 기술로 복원해서 보여주니까, 그 안에 담긴 과학적인 원리까지 알게 됐어요."
그리고 "덕수궁의 담장과 서양식 건물이 한눈에 보이는 게 정말 인상적이었다" 라고 말했다.
잠시의 대화였지만, 역사를 멀리서 바라보는 대신 지금, 이곳에서 마주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담겨 있었다.
◆ 기억의 복원, 도시 속의 유산으로 '구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과 선원전 터, 그리고 고종의 길은 서울 도심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맞닿는 특별한 지점이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정동 일대는 19세기 말 조선이 근대문명과 처음 만난 공간이자, 서울의 도시 정체성이 형성된 출발점" 이라며 "이 지역을 '역사 문화지구'로 지정해 보존과 활용을 병행할 계획" 이라고 밝혔다.
선원전 터 전경. 복원 현장 너머로, 과거와 현재의 서울이 겹쳐진다.
기억의 복원은 단순히 옛 건물을 다시 세우는 일이 아니다.
사라진 의식과 관계, 그리고 사람들의 시간을 되살리는 일이다.
덕수궁의 담장과 고종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한 왕의 꿈과 한 시대의 상처가 나란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