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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잇는 사람들, 국가유산 보존과학의 20년을 따라가다

국립고궁박물관 개관 20주년 특별전 'RE:BORN, 시간을 잇는 보존과학'
보존과학의 20년을 전시로 풀어낸 국가유산 행정 현장(25.12.3.~26.2.1.)

2025.12.16 정책기자단 정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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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유물을 만날 때 우리는 대개 완성된 모습만을 본다.

깨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태 자체가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상태가 유지되기까지 어떤 판단과 선택이 있었는지를 떠올리는 일은 쉽지 않다.

국립고궁박물관 개관 20주년 특별전 <RE:BORN, 시간을 잇는 보존과학>은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한 전시였다.

왕실 유산 보존을 책임지는 국가유산청의 정책 현장, 국립고궁박물관.
왕실 유산 보존을 책임지는 국가유산청의 정책 현장,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장은 일반적인 박물관 전시라기보다 연구실을 엿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보존과학이 기술과 밀접하게 연결된 분야인 만큼, 공간 전체에서 과학적이고 최첨단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평소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는 박물관 보존과학실의 역할을 '전시'라는 형식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보존과학은 문화유산 행정의 핵심이지만 대부분 비공개 공간에서 이루어져 왔다.

이번 전시는 그 과정을 국민 앞에 꺼내 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보존과학실의 연구 환경을 반영해 구성된 전시 공간.
보존과학실의 연구 환경을 반영해 구성된 전시 공간.

1부 'Lab 1. 보존 처리, 시간을 연장하다'에서는 최초 공개되는 대한제국기 유물 '옥렴'을 비롯해 실제 보존 처리가 이루어진 유물들이 소개됐다.

특히 각 유물 옆에 놓인 캡션이 눈길을 끌었다.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상태 진단과 함께 보존 과학자의 고민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초 공개된 대한제국기(추정) 유물 <옥렴>.
최초 공개된 대한제국기(추정) 유물 <옥렴>.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유물 세부 문양 관찰.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유물 세부 문양 관찰.

'옥렴'의 경우, 구슬을 연결한 견섬유 끈이 손상되어 구슬이 분리·소실된 상태였고, 이에 따라 구조적 안정화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전시에는 기존 끈을 최대한 활용해 현재의 형태를 유지할 것인지, 끈을 교체해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것인지 그에 대한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보존과학이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 사이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관람객이 직접 선택하며 보존과학의 사고방식을 체험하는 정책형 콘텐츠.
관람객이 직접 선택하며 보존과학의 사고방식을 체험하는 정책형 콘텐츠.

관람객이 직접 참여하는 질문형 콘텐츠도 인상적이었다.

'보존 처리에 어떤 재료를 사용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 앞에서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게 하고, 그 결과를 스탬프로 남기는 방식이었다.

모든 질문에 답하고 나면 자신이 어떤 유형의 보존 과학자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단순히 '쉽게 제거 가능한 재료가 정답'이라는 고정관념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만들었다.

보존은 언제나 상황과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이해하게 됐다.

조사부터 복원까지, 보존 처리의 전 과정을 시각적으로 공개했다. (색회꽃무늬 항아리)
조사부터 복원까지, 보존 처리의 전 과정을 시각적으로 공개했다. (색회꽃무늬 항아리)

투명 스크린을 통해 보존 처리 과정을 단계별로 보여주는 영상도 유익했다.

처리 전 상태 조사와 기록, 보존 처리, 복원까지의 흐름이 시각적으로 정리되어 있어 보존과학의 전반적인 과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과학적 분석으로 제작 기법과 시대를 규명한 환수 고려 나전칠기.
과학적 분석으로 제작 기법과 시대를 규명한 환수 고려 나전칠기.

2부 'Lab 2. 분석 연구, 시간을 밝히다'에서는 과학적 분석이 문화유산 연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었다.

2023년 일본에서 환수된 고려 나전칠기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는 X선 투과 조사 결과와 함께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를 통해 제작기법과 구조를 어떻게 밝혀내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보존과학이 단지 유물을 '고치는 기술'이 아니라, 문화유산의 진정성과 역사를 규명하는 연구의 기반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문헌 자료와 기록을 바탕으로 구현한 태조어진 디지털 복원본.
문헌 자료와 기록을 바탕으로 구현한 태조어진 디지털 복원본.

3부 'Lab 3. 복원·복제, 시간을 되살리다'에서는 소실된 '태조어진'의 디지털 복원 과정을 다뤘다.

화재로 절반가량이 소실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태조어진을, 1910년대 유리건판 사진과 전주 경기전 봉안본을 참고해 디지털로 복원한 과정이 비교 이미지로 제시됐다.

디지털 기술이 문화유산 기록과 관리에서 어떤 가능성을 열어주는지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선택의 결과를 공유하며 보존과학의 판단 과정을 함께 고민하게 한다.
선택의 결과를 공유하며 보존과학의 판단 과정을 함께 고민하게 한다.

전시의 마지막에서는 관람객들의 선택 결과가 집계되어 공개되고, '과학의 탐구자', '전통의 계승자', '조화의 설계자' 중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보존과학을 어렵지 않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 전달하려는 전시의 의도가 잘 드러나는 장치였다.

끝없이 늘어진 어보가 장관을 이루다.
끝없이 늘어진 어보가 장관을 이루다.

보존과학은 중요하지만, 국민이 직접 만날 기회는 많지 않다.

우리는 보존 처리된 유물을 감상하지만, 그 뒤에서 어떤 판단과 수고가 이어졌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번 특별전은 보이지 않던 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특히 국립박물관 단위에서 보존과학실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곳이 많지 않다는 점을 떠올리면, 국립고궁박물관의 보존과학 20년을 조망하는 이 전시는 곧 한국 보존과학의 기록과 역사를 보여주는 자리라 할 수 있다.

문화유산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시간을 다루는 일이다.

이번 전시는 그 시간이 어떻게 관리되고, 연장되고, 다시 기록되는지 차분히 보여주었다.

보존과학이 앞으로도 국민과 더 가까운 자리에서, 문화유산의 내일을 준비하는 행정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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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 독립운동가 동암 장효근 일기 보존처리 현장

정책기자단 정수민 사진
정책기자단|정수민sm.jung.fr@gmail.com
글을 통해 '국민'과 '정책'을 잇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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