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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차이나] 문화대혁명 신호탄 “5.16통지”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사구(四舊,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습, 낡은 습관)타파”와 “계급투쟁”이란 명목으로 귀중한 전통문화가 파괴되고 경제적 가치는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흔히들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역사를 적게는 20년, 많게는 50년은 뒷걸음질치게 했다고 말한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란”이라 불리는 문화대혁명의 출발 총성은 바로 마오쩌둥(毛澤東)의 “5·16통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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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대혁명에서 공개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은 10년 동안 문혁의 행동강령이 될 마오쩌둥(毛澤東)이 기초한 “5·16 통지”를 통과시켰다. 이 통지는 3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문격인 첫 번째 부분은 마오쩌동의 대약진운동 실패를 거울삼아 새로운 경제도약을 위한 강령과 조직인 “2월제강(二月提綱)”과 “문화혁명 5인소조”를 우익 수정주의로 몰아 철폐하고, 새로운 “문화혁명 소조”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공산당내에 문화대혁명을 추진해 갈 일종의 조직구성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은 우파적 수정주의를 낱낱이 비판하고 새로운 “좌익혁명사상”을 정책노선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결론인 세 번째 부문에서는 혁명성과 당성이 강한 각성, 시급 당위원회가 자산계급세력을 몰아내고 모든 영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라는 지시였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1958년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어 주석직에서 물러났던 마오쩌둥이 자신의 권력을 만회하기 위한 대반전의 기회로 문혁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1957년 제1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한 마오쩌둥은 1958년2만6000여 개의 인민공사를 설립하고 15년 만에 영국을 따라잡자며 철강생산을 위해 100만 개 이상의 원시적 용광로인 “투파루(土法爐)”를 만들었다. 이름 하여 “대약진운동”이다. 그러나 결과는 4300만 명이 굶어 죽는 참담한 실패였으며 1959년 마오쩌둥은 리우샤오치(柳少奇)에게 국가주석 자리를 물려주어야 했다.
무언가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마오쩌둥은 1960년부터 시작되는 3년간의 자연재해로 인한 대기근으로 재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이 때 그의 레이다에 걸려든 것은 1960년 발표된 베이징부시장 우한(吳含)의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이었다. 황제의 잘못을 용감하게 직언하던 명대의 충신 해서를 그린 역사극을 그의 부인 장칭(江靑)이 비판하고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목한 린삐오(林彪)가 거들기 시작한 것이다.
<해서파관>논쟁을 통해 적과 아군을 명확히 파악한 마오쩌둥은 결국 1966년 리우샤오치와 덩샤오핑(鄧小平)을 자본주의로의 우경화를 주도하는 우익세력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5.16통지”를 통해 정치적 반격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이틀 뒤 곧바로 “마오주석은 천재이며 마오주석의 말은 곧 진리이다”는 린삐아오의 충성 담화가 발표되니, 1억 명의 중국인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보게 되었다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순간이었다.
베이징=국정넷포터 김대오 (dae55555@hana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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