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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광복 60년 ⑪] 식민지배 사죄 못받은 한일협정

격렬한 저항속 14년만에 조인…굴욕외교 비난속 경제발전 도움

2005.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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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일제 36년의 압제에서 벗어난 지 60주년 되는 해이다. <국정브리핑>은 광복6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이 걸어온 발자취를 사진을 통해 돌아본다. 사진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기록이다. 대한민국 발전 과정과 국민들 삶의 변화상이 고스란히 담긴 빛바랜 사진들을 보며 이 땅위에 펼쳐질 미래 ‘선진한국’은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가늠해 본다.<편집자주>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식 체결됨으로써 이승만 정권 때부터 추진해온 한일 국교정상화는 13년 8개월 만에 종지부를 찍는다.

36년간 식민 지배를 받은 일본과의 수교협상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1년 시작돼 65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14년여의 기간이 이를 잘 말해준다.

무엇보다 일본은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의 뜻이 전혀 없었다. 1953년 열린 3차 회담 석상에서 일본측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가 “일본에 의한 36년간의 한국 통치는 한국에 유익한 것이었다”는 이른바 ‘구보타 망언’을 하면서 회담은 향후 5년간 표류하게 된다.

지지부진하던 회담이 다시 진전을 보인 것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다. 경제건설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마련을 위해 일본의 자본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서두른다. 여기에는 소련과 중공을 견제하기 위해 한일수교를 강력하게 희망하던 미국의 의사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1962년 11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일본에 특사로 파견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회담을 갖는다. 여기서 ‘김-오히라 메모’로 불리는 비밀문서가 작성돼 한일협정의 최대 난관이었던 대일청구권 문제가 타결된다. 내용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 이후 최종 협정에서 상업차관 부분만 3억 달러로 조정된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이 1964년 조약 체결을 추진하면서 알려지자 야당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굴욕외교’라는 비난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6월 3일에는 시위가 절정에 달해 4.19를 연상시킬 정도로 확산되었으며, 급기야 서울시 전역에 비상 계엄이 선포된다. 계엄령은 55일이 지난 7월 29일에야 해제되었으며 그동안 학생, 민간인, 언론인 등 모두 348명이 구속되었다.

이듬해인 1965년 6월 22일 정식으로 조인된 한일협정은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과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교포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문화재·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 4개의 부속협정과 25개 문서로 이뤄졌다.

이로써 1966년부터 1975년까지 일본으로부터 받은 대일청구권자금과 국교정상화로 인한 일본과의 경제협력은 대일무역의존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기도 했으나 한국의 경제발전과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일합방이 원천무효임을 명시하지 못하고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조차 받아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일협정은 ‘굴욕외교’라는 비난과 함께 오늘날까지도 과거청산이라는 숙제를 남겨 놓았다. 한일수교 40주년을 맞는 오늘날 불고 있는 일본과의 갈등도 여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교착상태에 있던 한일회담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1962년 11월 일본에 특사로 파견돼 대일청구권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실마리를 찾는다. 사진은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모습.(1963.1.7)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조차 받지 못한 채 저자세로 진행된 한일회담은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1964년 6월 3일 시위가 절정에 이르자 계엄령이 선포된다.


야당 의원들은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일본의 경제식민지화 반대를 주장했다. 사진은 야당의원들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 데모.(1965.2.19)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조인식이 거행된 도쿄 소재 일본 수상 관저에는 일장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렸다.


조인식은 일본측 시나 외상과 한국측 이동원 외무장관 사이에 이루어졌다. 양측 대표는 조인을 마친 후 “이 조약이 아시아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바란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글:박미영(mypark@news.go.kr)
사진정리:장명섭(jms1101@allim.go.kr)
사진편집:이정운(woddnsl@new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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