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서울-도쿄 포럼 특별세션 기조발언(1.17.)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습니다.
이 자리에 초청해 주신 류진 서울국제포럼 이사장님, 그리고 나카소네 히로후미 나카소네평화재단 이사장님께
초청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며칠 전 일본 나라현에서 진행된 한일 정상회담 직후에 이런 모임에 와서 말씀을 드리게 되어
더 의미있게 생각합니다.
이번 정상외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또 상징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다카이치 총리의 깜짝 제안으로
이재명 대통령께서 드럼을 함께 연주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이번 정상외교의 의미는
정상 간 만남 그 자체에만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양국 정상이 만들어 낸 이러한 '선한 영향력'이
한일관계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 것인가,
그리고 그 변화가 우리 사회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체감되고 있는가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일 정상이 구축해 온 양호한 관계가
이미 양국 사회 곳곳에서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지, 작은 사례를 하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몇 년 전 저는 도쿄의 한 대형 서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이른바 '혐한 서적코너'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은 이야기로는,
'혐한 서적코너'는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한국어 서적코너'가 들어서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변화가 모두 정상외교의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 사이에 분위기가 달라질 때 사회의 공기와 일상의 풍경도 함께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장면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 간 관계는 외교 문서나 정상회담 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분위기와 시민의 일상 속에 스며드는 일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리처드 도킨스 교수의 '밈(meme)' 이론에 나오는 '사회적 유전자' 개념을 종종 인용해 왔습니다.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동물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듯 사회도 사회·문화적 유전자, 즉 가치나 규범, 정치적 습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유전자가 바로 사회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유전자란 한 사회가 위기와 갈등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방향으로 스스로를 교정해 나가는지를 결정하는 집단적 습성이 됩니다.
이는 오랜 역사적 경험 속에서 형성된다고 믿습니다.
이 점에서 일본 사회의 경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1998년 국빈 방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일본 국회 연설에서 "전전의 일본과 전후의 일본은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발언의 핵심은 과거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변화의 능력에 대한 신뢰였다고 생각합니다.
전전의 일본은 군사적 팽창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전후의 일본은 평화헌법이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고, 자유와 민주주의, 법의 지배를 전세계에 호소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책 전환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사회적 유전자가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께서도 이러한 선택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 오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러한 일본 사회의 선택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연대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군사독재 시절, 뜻 있는 일본의 정치인과 시민사회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일본이 동북아에서 평화국가로 인식되는 토대는 바로 이러한 전후의 선택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경험은 반면에 일본과 다른 경로로 발전해 왔습니다.
한국은 1987년 국민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2024년에는 이미 과거의 일로 여겼던 계엄과 내란이라는 사태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1979년 외교부에 입부했는데, 그 해 12월에 충격 속에서 겪었던 '계엄'이 2024년에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응이었습니다.
다수의 국민들은 응원봉을 들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국회는 헌법에 정해진 정당한 절차를 통해 계엄을 해제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비폭력과 법과 제도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국민주권정부의 출범이 그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는 다시 한 번 확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즉,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유전자'가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일본과 한국이 중요한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국은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졌지만,
위기의 순간에 사회가 스스로를 교정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민주주의 유전자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통의 기반 위에서 최근 한일 정상외교가 만들어낸 변화는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정상 간의 신뢰 회복은 외교 현안의 관리에 그치지 않고, 정부와 의회, 기업과 학계, 언론계 그리고 시민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이미 여러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안보와 경제 협력이 보다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고, 청년 교류와 문화 교류도 자연스럽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상대국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일상의 차원에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조금씩 스며들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고, 속도도 느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교의 진정한 성과는 바로 이렇게 조용하지만 지속적인 변화 속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참석자 여러분,
동북아는 지금 다시 한번 중대한 전환기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협력의 범위는 한일 양자 관계에만 머무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재명 대통령께서 이번 방일 계기 공동언론발표에서 말씀하셨듯이,
"한중일 3국은 최대한의 공통점을 찾아서 함께 소통하며 협력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한일 양국이 이사할 수 없는 이웃국가인 것처럼,
중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중일 3국은 서로의 차이점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대결보다는 대화를, 단절보다는 연계를
추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저는 어제 서울신문에 게재된
"나라에서 한일 정상이 다음 60년을 바라보다"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국과 일본, 또 한국과 중국 간의 관계는
양자라는 선이 아니라
동북아라는 면 위에 놓여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한일관계의 미래는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공유하는 데서 열린다고 믿습니다.
전후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던 일본의 경험과, 작년에 민주주의를 되살리는 선택을 했던 한국의 경험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보다 건강한 민주주의 국가,
또한 보다 견고하고 성숙한 양국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와 협력이 축적될 때, 한일 정상외교가 만들어낸 선한 영향력은 일시적인 외교 성과를 넘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 양국 시민들의 평온한 일상으로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포럼이 그러한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