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외교사에 큰 획을 그으신 공로명 前 장관님의 별세에
외교부 모든 직원과 함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장관님께서는 명실상부한 우리 외교의 산증인으로서
우리 외교사의 중대한 기점마다 큰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
그 분이 걸어오신 길은 단순히 한 공직자의 이력을 넘어,
우리 외교의 지평을 확대하고
국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진력해 왔던 치열했던 현장의 기록이기에
그 분의 빈자리를 큰 슬픔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장관님께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이셨습니다.
학자 못지 않은 전문성과 이론적 식견을 갖추시고,
탁월한 판단력과 협상력으로 중요한 협상의 고비마다 활약하셨고,
주위로부터 지지와 존경을 이끌어 내는 리더십으로
seasoned diplomat의 모범적인 像을 보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균형이 깨어진 견해나 급진적인 주장이
우리 외교에 유익하지 않고 국익을 훼손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셨습니다.
또한, 우리 외교의 담론이 보다 균형있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따라서, 한일관계 발전에 대해 논의하는 오늘 회의를
공 장관님을 기리는 『공로명 장관 추모 학술대회』로 명명하고,
균형있고 전략적인 시각을 가진 인사들이 두루 참여하게 된 것은 매우 의미있다 하겠습니다.
장관님께서는
한일 과거사 문제, 구소련과의 수교, 남북 핵 협상 등 난제 앞에서
국익 수호를 위한 균형있는 입장을 고심하며
늘 당당하고도 의연한 자세를 보여주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끝없는 노력은
故人의 주일대사 시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총체적 강제성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한 '고노담화'와
외무장관 시절 일본 정부의 식민 지배에 대한 첫 사죄를 담은
'무라야마 담화'라는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외교 현장을 떠나신 뒤에도 한일포럼 회장,
동아시아재단 이사장, 세종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원로로서 우리 외교에 많은 기여를 해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한일 관계가 어려움에 처할 때면
긴 안목에서 상호 신뢰와 이해를 강조하시고,
양국 모두에게 쓴 소리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일본의 심기를 헤아려야 한다는 등
일각의 편향된 주장은 그 분이 지향하신 바와 맞지 않습니다.
제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장관님의 모습은
외교관은 집요하게 국익을 추구하는 공직자임을 역설하던 장면입니다. 1994년 당시 외무부와 상공부의 통상기능을 통합하여 통상산업부를 출범시키는데 강한 반대입장을 표명하면서
"외무부 뒤에는 오직 국익 밖에 없다"라는 일성을 내셨습니다.
짧은 한 마디였지만, 이 말은
외교부는 특정 산업이나 단체의 이익이 아니라,
오직 대한민국 전체의 국익만을 생각한다는 자부심의 표현이자,
외교부 정체성(identity)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는 이제 脫-탈냉전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제가 유엔대사로 근무하던 2021년 당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간의 무력 충돌을 보면서,
앞으로 드론과 같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전쟁의 양태를 완전히 변화시킬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국제질서의 근간인 주권과 영토 보전 원칙을 뿌리째 흔들며
'역사의 귀환(the return of history)'을 실감하게 했고,
급기야 금년 3월부터는 이란에서의 무력 충돌이
전례없는 규모의 지역전 양상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 격랑의 전환기가 궁극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지금 단계에서는 누구도 확실하게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어내고,
그에 기반하여 우리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을 찾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공 장관님은 "한국은 항상 우리보다 크고 강대한 이웃과
평화롭고 안정된 여건 하에서 어떻게 생존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라고 고민해 오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도 이와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한반도가
새로운 분쟁의 단층선이 되지 않도록
한반도에서의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함과 동시에,
동북아에서 진영간 대립구도가 형성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우리의 자체 국방력을 확충하며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해 나가겠습니다.
남북 핵통제공동위원장으로서 북한과 직접 협상하며
한반도 평화를 위해 애쓰셨던 고인을 본받아,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서도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동북아 역내 긴장 완화를 위해
한·중·일 3국이 공통점을 찾아 소통하며
협력할 수 있도록 필요한 역할을 해 나가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주권이나 정체성은 결코 훼손될 수 없으며,
과거사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도
원칙에 기반하여 대응하겠습니다.
또한, 고인께서 중국·소련과의 수교를 통해
냉전 구도를 넘어
우리의 전략적 공간을 확대하기 위해 힘쓰셨음을 기억하며,
우리의 외교의 자율 공간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지정학적 대전환 가운데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앞두고,
고인의 발자취를 기리며,
장관님의 국익을 위한 헌신과 사명감을
이어받겠다는 각오를 다시 한 번 다지게 됩니다.
끝으로, 오늘 학술회의가
장관님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한일 관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