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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4km, 인간의 속도

전범권 산림청 산림이용국장

2011.08.10 전범권 산림청 산림이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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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말 외환위기 이후 직장인 사이에서 마라톤 붐이 일었다. 생활체육 토대가 취약한 우리나라에서 갑자기 일어난 마라톤 붐은 단순한 건강관리 차원의 관심 때문이 아니었다. 영원할 것만 같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광경을 지켜보며 믿을 것은 내 실력과 체력 밖에 없다는 절박함으로 많은 직장인이 극기 스포츠인 마라톤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후 10여년이 흘렀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이번에는 세계적 금융위기가 강타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새로 등장한 트렌드 중 하나는 뜻밖에도 ‘걷기’였다. 마라톤을 한다고 하면 하다못해 주위 사람들도 대단하다는 평가를 하며 그 사람을 다시 본다. 그러나 걷기는 그렇지 않다. 누군가의 시선을 바라고 걷기를 시작하는 사람이 없듯이 걷기에 빠졌다고 타인의 남다른 평가를 기대하는 경우도 없다. 그렇기에 걷기 열풍은 수십년간 한국인의 가치관을 강압적으로 견인했던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식의 압축성장 모델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의미심장한 작은 사건으로 설명할 수 있다.

걷기 열풍의 첫 히트작은 제주도 올레길이었다. 올레길은 한라산 정상을 오르는 데는 아무 관심이 없다. 남쪽 해변에서 시작해 중산간으로 올라가는 듯하다가 작은 오름 하나를 끼고 돌아 시골 마을을 지나 내려오는 식이다. 올레길 여정에는 개발연대 한국인 마음을 사로잡았던 고난을 넘어서는 도전정신, 정상을 향한 클라이맥스와 같은 외형적 기승전결이 없다. 오히려 우리 선조들이 산을 오르는 행위를 ‘입산(入山)’이라고 했던 것처럼 지리적인 공간이동 보다는 자기 내면을 탐색하는 측면이 커 사람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는 사이 걷기 열풍은 소수 마니아의 전유물에서 범국민적 여가생활로 확산됐다. 급기야 삼성경제연구소는 2009년 10대 히트상품 중 하나로 ‘도보여행 상품’을 선정하기에 이르렀다. 빛의 속도로 정보가 확산되고, 국경도 세대도 없는 무한경쟁 시대에 어떻게 걷기가 사람 마음을 파고든 것일까. 역설적으로 속도와 경쟁이 인간이라는 생명체에게는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산림청의 여러 정책 중 근래 가장 국민 반응이 뜨거운 것 역시 숲길이다. 숲길은 ‘걷기’와 ‘자연’이 만나는 가장 이상적 모델이다. 콘크리트 도심을 떠나 숲속 오솔길을 걸으며 사람들은 자신과 만나고 가족과 만나며, 침묵의 가치와 대화의 소중함을 재발견한다. 산림청이 조성한 ‘지리산 둘레길(300km)’ ‘금강소나무숲길(33km)’ ‘한라산둘레길(9km)’ ‘울릉도둘레길(49km)’ 등의 숲길도 정상의 권위에서 벗어나 주변의 아름다움과 다양함에 초점을 맞춘 코스다. 사람들은 높은 곳에 잠시 머무는 외로운 등정보다 평범한 일상을 닮은 친근한 숲길에서 더 큰 애정과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숲길 걷기처럼 며칠이 걸리는 느린 여행은 숲길 코스가 지나는 농산촌 지역에도 기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숲길 주변 마을에서의 민박, 식사, 신토불이 농·임산물 구매 등으로 농가 수입이 늘어난다. 숲길 개통으로 연간 5만명이 방문한다고 가정하면 해당지역에 45억여원의 경제적 파급효과와 53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발생한다고 한다.

지리산 숲길에는 지난해 45만여명이 방문했다.

사람이 두발로 자연스럽게 걷는 속도는 시속 4km 정도라고 한다. 빠른 사람이라야 기껏 5~6km일 것이고 느려도 시속 3km는 걸을 수 있다. 이 속도는 비행기나 자동차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다. 그러나 시속 4km는 풀과 나무가 자라는 속도, 우리 아이들이 커 가는 속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정과 사랑이 자라나는 느림의 리듬과 속도를 닮아있다. 삶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이 스르르 빠져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 삶의 에너지가 조금씩 고갈돼 간다는 느낌이 든다면 지금 당장 여름 숲길을 걸어보시라. 한없이 느리지만 정직하게 한발한발 몸과 마음을 채워나가는 ‘인간의 속도’, 그 충만감을 만나게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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