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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사가 반영된 개헌이라야 한다

2018.04.05 이진순 (재)와글 이사장(국민헌법자문특위 국민참여본부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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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재)와글 이사장, 국민헌법자문특위 국민참여본부 위원)
이진순 (재)와글 이사장(국민헌법자문특위 국민참여본부 위원)
“임신 7개월의 임산부입니다. 오늘 7시간 반 동안 토론회에 앉아 있느라고 힘들었는데, 곧 태어날 우리 아기가 살아갈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 참여했습니다.”

“주일날 여기 오느라고 새벽에 교회 다녀왔어요.”

“아버지가 국가유공자예요. 개헌토론에 참여할 수 있어서 아들로서 자랑스러워요.”

지난 3월초, 주말을 반납하고 숙의형 시민토론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지방분권과 직접민주주의, 대통령과 국회 권한조정이라는 묵직한 화두를 놓고 오전 11시부터 저녁6시반까지 격론을 벌였다. 전국 4개 지역별 시민토론회와 청소년/청년 토론회에 초청되어 온 시민들은 헌법전문가들이 아니었다. 성별, 세대별, 개헌에 대한 찬반 입장별로 국민을 대표해 무작위 추출된 명단에 따라 초대된 이들은 10대 청소년부터 80대 노인까지, 나이도 직업도 의견도 다양했지만 우리 사회를 구조적으로 리모델링하는 논의에 참여한다는 사명감만큼은 한결같았다. 토론회 당일 긴급한 용무로 참석하지 못할 사람들을 예상하고 정원을 약간 넘는 인원에 초대장을 보냈지만 내가 참석한 두 군데 토론회는 모두 예상보다 많은 숫자가 참석해서 부랴부랴 의자를 더 내와야 했다.

지난 2월 13일 출범해서 3월 13일 대통령에게 <국민헌법자문특위>의 개헌안을 제출하기까지 나는 자문특위의 국민참여본부 위원으로 일했다. 정해구 위원장을 비롯해서 33명의 자문특위 위원이 참석하는 전체회의는 늘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12~13시간씩 새벽까지 마라톤회의가 이어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자구 하나, 조문의 배치 하나를 놓고서도 진지하고 열정적인 논쟁을 벌인 특위 위원들이나, 거의 매일 밤을 밝혀가며 보고 자료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한 자문특위 지원단의 노고는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것은 개헌토론에 임하는 시민들의 사명감과 자발성이었다. 사전에 우송된 토론 자료를 꼼꼼히 읽고 요점을 메모해 온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긴 토론시간 내내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으며 쉬는 시간까지도 옆 사람과 진지하게 토론을 이어가는 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 촛불들이 여기 다시 모였구나!’

개헌은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일단 개헌의 뚜껑을 열면, 국가의 근본과 관련된 모든 이슈와 쟁점들이 쏟아진다. 그 논의의 결과가 항상 더 나은 개헌안으로 귀결된다는 보장도 없다. 현행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과 법정신이라도 제대로 지켜지도록 하는 게, 소모적인 정쟁과 어설픈 타협으로 이도 저도 아닌 개헌을 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냐는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이후 9차례에 걸친 개헌이 있었지만, 제헌헌법에 비해 오히려 퇴행적인 개헌이 된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도 이런 회의론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개헌이라는 큰 다리를 건너지 않고 촛불항쟁의 위대한 시민정신을 우리 사회의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로 전환할 수 있을까? 광장의 민주주의는 철저한 제도개혁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힘을 잃는다. ‘아침이슬’은 아침이 지나면 사라지고, 촛불의 파도도 반딧불처럼 흩어질 수 있다. 87년 6월항쟁 이후 어렵사리 얻어낸 제도개혁의 기회는 여야 정당에서 차출된 8인 회의에 의해 급조된 개헌안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대통령 직선제는 따냈지만 결선투표제는 검토조차 되지 않았고 득표수와 의석수의 비례원칙도 명기되지 않았다. 그 결과 30%대의 역대 최저득표율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고 지역주의에 기반한 정당구조가 온존되었다. 광장의 승리는 시민이 주도하는 제도개혁으로 이어질 때만이 시민의 실제 삶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다준다.

지난 3월 26일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면서, 국회가 개헌논의를 재개하기로 한 데 이어 4월3일에는 자유한국당이 자체 개헌안을 내놓았다. 작년 1월에 구성된 국회 개헌특위가 1년이 넘도록 지지부진했던 점에 비춰보면, 대통령 개헌안이 국회와 사회 전반에 개헌과 관련한 개혁의 담론을 다시 활성화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589만여명의 국민이 제안하거나 논쟁하고 숙의한 논의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통령 개헌안을 일부 야당이 ‘관제 개헌안’이라고 비방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달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문특위 국민참여본부는 헌법논의를 위한 온라인 국민참여플랫폼과 SNS를 운영하면서 69만 여건의 의견을 접수하는 한편 빅데이터 질적 분석을 통해 전체여론과 사안별 의견의 키워드를 분류 분석했고, 무작위 추출된 전국 2000여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벌였으며, 시민 950여명이 참여하는 숙의형 토론회, 16개 시도별 지역 간담회, 총 22회에 걸쳐 개헌관련 기관과 학회, 시민단체 간담회를 개최하고 주요헌법기관과 정당을 방문해서 8회에 걸쳐 의견을 경청했다.

물론 그 다양한 논의의 결과가 모두 통일된 의견으로 일사불란하게 모아진 건 아니다. 여론조사에선 반대가 많았으나 상호토론과 숙의과정이 포함된 토론회에서는 찬성이 많은 경우도 있었고, 온라인상에선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지만 지역간담회나 유관단체 간담회에서는 긍정적인 의견이 대세를 이루는 사안도 많았다.  지방분권과 관련된 조항이나 성차별 배제와 관련된 사항에선 특히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는데, 이럴 경우 어떤 의견을 우선할 것인가에 대해 자문특위 내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분명한 것은, 어느 쪽 의견을 무조건 배제하기보다는 제안의 본래 취지를 살리되 그 부작용을 우려하는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서 보완책을 포함시키기 위해 절치부심했다는 점이다. 물론 자문특위 위원들 사이에서도 일부 조문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고, 특위 내에서 합의된 조문이라도 대통령의 검토 단계에서 최종적으로 채택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국민의 헌법개정 발의권이 대통령 안에서 누락된 것이나 성차별 철폐에 대한 적극적 개정안이 채택되지 않은 것도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대통령안의 주요 골자 가운데 기본권 확대, 국민발안제와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신설, 대통령 4년 연임제, 토지공개념과 경제민주화 등은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로 큰 이견이 없었던 조항들이다. 촛불항쟁을 이끌어낸 국민들은 30년 전 국민들이 아니다. 주권자 의식과 공공성의 강화, 생명권과 안전권에 대한 요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이런 변화를 반영한 개헌안이 아니었다면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개헌안 찬성율이 높아지진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국민들이 참여해서 개헌안이나 정치개혁법안을 만들어낸 사례는 아일랜드, 아이슬랜드, 남아공, 멕시코, 에스토니아 등에서 이미 시도된 바 있다. 그러나 시민 참여의 폭과 열기에 있어서 세계 어느 사례와 견주어도 우리 시민들이 한 단계 앞선 수준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실로 세계사적으로나 우리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시민 참여형 개헌논의였다. 대한민국의 촛불항쟁이 전 세계의 이목을 끌며 민주주의의 귀감으로 칭송을 받듯이 이번 개헌국면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성숙한 태도는 해외 여러 나라들의 모범으로 남을만한 것이라고 자부한다. 섣부른 헌법 개정은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의견에 동의하지만, 여러 아쉬운 지점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개헌안이라면 현행 헌법을 고수하는 것보다는 촛불민심을 구현하는 데 훨씬 진일보한 안이라고 본다.

이번 개헌공방을 대통령 개헌안과 국회 개헌안 사이의 대결이나, 여야 정당간의 대결구도로 이해하는 것은 낡은 정치공학적 프레임이다. 국민이 주체로 참여해서 주권자 국민의 요구와 희망을 담은 개헌안을 택할 것인가, 정파적 유불리를 앞세운 소수 기득권자들의 개헌안을 택할 것인가.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부디 당리당략적인 유불리를 떠나서, 어떻게 더 국민의 뜻을 개헌안에 반영할 것이냐를 두고 생산적인 논쟁이 벌어지길 희망한다. 대통령 개헌안은 시간적 제약과 숙의과정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광범한 국민 참여와 여론수렴을 통해서 마련된 안이다. 누구든 더 나은 대안을 내놓고자 한다면, 더욱 폭넓고 깊이 있는 국민적 숙의과정과 의견청취를 거쳐서 검증된 것이라야 한다. 권력형태에 집착해서 정치적 기득권을 늘리는 데 개헌을 이용하고자 한다면 국민들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촛불은 이제 헌법 위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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