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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레만호, 2018년 판문점

2018.04.24 한기봉 언론중재위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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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봉 언론중재위원·칼럼니스트
한기봉 언론중재위원·칼럼니스트
1994년 10월 21일. 나는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스위스 제네바의 레만호 가에 있었다. 호수와 맞닿은 오비브 공원의 나무들은 색색의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가을 오후의 정경이었다. 나는 바로 그 근처 북한의 ‘영토’ 안에 합법적으로 들어가 있었다. 레만호가 바로 코앞인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제네바 북한대표부. 비교적 널찍한 정원을 가진 아담한 2층 양옥이다.

유럽 주재 한국 특파원들과 미국과 유럽, 일본, 중국 등 세계 각국에서 온 기자들이 마당에 꽉 들어찼다. 기자들은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차관보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제1부부장이 제네바 기본합의서에 서명하고 악수하는 걸 지켜봤다. 역사적 순간이라는 언론의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북한이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시작된 북미 고위급회담은 그 4일 전에 이미 끝나 합의문이 발표됐고 이날은 서명식 행사만 있었다.(사실 그날 공교롭게 서울에서는 성수대교가 붕괴되는 대사건이 발생해 국내 언론에는 서명식 사진 정도로만 간단히 보도됐다.)

강석주는 매우 기분이 좋아보였다. 평소의 호방한 스타일답게 서명식을 마친 후 한국 특파원들을 불러 고생했다며 뱀술을 한 잔씩 돌렸다. 그 강석주는 2016년 5월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그의 카운터 파트너 갈루치는 미국 대학의 한국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지금도 한반도 정세를 주시하고 있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아름다운 레만호를 볼 일이 없어졌다. 하지만 나는 섭섭하지 않았다. 그 지긋지긋한 북한 핵문제로 파리에서 수시로 출장을 다니며 기사를 써대야 하는 고생이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했다. 국내 언론들은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수교가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도했다.

국방부와 외교부를 출입하면서 오랫동안 북한 핵문제를 취재해온 나는 1992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으로 부임하면서 드디어 핵 없는 세상에서 살게 됐구나 생각했다. 더구나 1991년 12월 31일 남북한은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한 상태였다. 그러나 핵은 끈질기게 나를 따라 바다를 건너왔다.

세 차례 북미 고위급회담이 열린 곳은 제네바였고, 북한의 핵사찰 문제와 관련해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수시로 특별이사회를 연 곳은 오스트리아 빈이었다. 북미회담의 성과인 북한 경수로 건설 문제를 협의한 곳은 독일 베를린이었다. 각각 열 번 이상씩 출장을 다녔다. 언론진흥재단의 빅카인즈로 당시 내가 쓴 북한 핵 기사를 검색해봤다. 약 200건이 보였다. 1995년까지 3년간 유럽 전역을 커버하는 파리특파원을 하면서 가장 많이 쓴 기사는 파리의 멋진 문화예술 이야기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북한 핵문제였다. 

1994년 3월 23일에 쓴 ‘기자의 눈’은 이렇게 시작했다. “또 빈에 왔다. 벌써 아홉 번째다. 여섯 번째 북한 핵사찰 촉구 결의안이 통과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기사의 말미는 이랬다. “한스 블릭스 IAEA 사무총장의 보고와 윤호진 북한 대표의 연설 서두는 기묘하게 일치했다. 두 사람은 ‘특별이사회가 소집돼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며 연설을 시작했다. 같은 문장이지만 의미하는 바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로부터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고도 4년이 지났다. 그러나 북한 핵은 레만호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국제사회의 우려와 촉구와 제재, 북한의 약속불이행과 반발과 위협이 평행선을 달렸다. 경수로 건설은 물 건너갔고, 미국은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했고, 북한은 영변 원자로에서 폐연료봉 8000개를 다시 꺼내 재처리를 완료했고, 5차례 핵실험을 했고, ICBM을 발사했고, 드디어 그들의 숙원인 핵보유국 지위를 갖게 됐다고 선언했다.

북한 핵은 세계를 빙빙 돌아 이제 판문점으로 돌아왔다. 세계의 시선이 이곳에 집중되고 있다. 그런데 회담 테이블에 놓일 것은 24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다. 협상 대표의 얼굴과 북한의 플루토늄 및 고농축우라늄(HEU) 비축량, 미사일의 사거리가 바뀌었을 뿐 사실상 의제는 판박이다. 그 당시의 주된 의제도 북한의 핵동결과 궁극적인 비핵화,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 북미관계 개선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다른 점이 있다. 그건 바로 ‘상황’이다. 우선 과거에는 제네바에서처럼 미국이나 6자회담이 북한 핵문제의 해법을 주도했지만 지금은 이해관련국에 앞서 이해당사자 회담이 먼저다. 이어 북미 정상회담이나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이 기다리고 있다. 그간 남북정상회담이 두 차례 열리긴 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를 불과 몇 달 앞두고 김정일과 마주 앉았다. 정권은 바로 교체됐고 남북관계 개선은 동력을 잃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 대통령은 아직 임기 초반이다. 협상에 이어 그 이행까지 지켜볼 수 있는 시간표가 남아있다.

정상회담이 이뤄진 배경이나 회담에 임하는 3국의 절박성이나 진정성, 그리고 최고지도자의 캐릭터도 종전과는 크게 다르다. 핵무력을 완성했다고 주장하는 북한은 처음으로 비핵화 의지를 전 세계에 공개적으로 밝혔다. 김정은은 핵과의 병진이 아닌 경제재건으로 공화국의 노선을 수정했다고 대내외에 천명했다. 문재인 정권은 한반도 평화를 항구적으로 정착시키겠다는 의지가 어느 정권보다 강하다. 북한의 ICBM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트럼프 대통령은 가시적 치적을 원한다. 고빅(Go Big) 아니면 고홈(Go Home)이라며 끝장을 볼 생각인 것 같다. 또 이전과는 다르게 남북·북미 정상회담이 최고위급의 결단으로 성사된 만큼 해법은 사안별로 점진적 방식이 아니라 먼저 큰 틀을 합의한 후 단계적 이행으로 갈 가능성이 커졌다.

의제는 같다 해도 상황은 지난 사반세기의 데자뷔가 아닌 것이다. 한마디로 판 자체가 바뀌었다. 서로는 이제 갈 데까지 갔다. 이는 그만큼 절호의 기회가 왔음을 의미한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전쟁이 날 거 같다며 생존배낭을 비축하는 시민이 많았다. 일촉즉발의 위기 국면이 극적으로 반전한 것이다.

이런 모멘텀을 슬기롭게 살려내야 한다. 역사는 드라마적 요소가 있다. 큰 전쟁도 그랬고 독일 통일도 그랬다. 냉전의 유물로서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상징인 판문점은 그 드라마의 무대로 최적의 장소다. 문제는 국민통합이다. 국론통합이다. 분단 이후 반 세기가 훨씬 지났다. 이번 회담은 두 번 찾아오기 힘든,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과 미래가 달린 문제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을 초월하는 문제이며, 정략과 정권유지의 문제도 아니다. 단 한 번에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기대에 못 미쳤다 해도 북돋우고 인내하는 지혜가 국민 모두에게 필요하다.

고양 킨텍스에 모인 세계 각국의 유명 매체 로고와 긴장감이 감도는 기자들의 표정, 그 현장의 분주하고 뜨거운 취재 열기를 TV로 지켜보고 있자니 다시 현역으로 돌아간 듯 가슴이 뛴다. 24년 전 제네바 북한 공관에서의 내 모습이 오버랩 된다. 섣부른 기대일지 모르나 언젠가 살아생전 다시 아름다운 레만호를 찾게 된다면, 그 공관 대문에 붙어있던 명패가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 있는 걸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나는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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