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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바꾼 것은 유가가 아니라 질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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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란 전쟁 휴전에도 호르무즈 해협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은 평시의 10%에 불과하고, 에너지 시장은 충돌의 종료보다 불안의 상수화를 가격에 반영하고 있다. 얽힌 선박 스케줄과 폭등한 보험료, 파열된 물류 계약이 정상화되려면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전투는 멈춰도 비용은 남는다.
이번 사태가 남긴 교훈은 세계 교역의 대전제였던 자유로운 항행과 예측 가능한 공급망이 더 이상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전쟁은 1970년대 오일쇼크나 1991년 걸프전과도 다르다. 과거가 원유 가격 급등의 충격이었다면, 지금은 원유와 LNG뿐 아니라 비료, 헬륨, 황, 석유화학 원료 등 산업 밑단의 중간재까지 흔드는 복합 공급충격이다. 여기에 미국의 해상질서 보장 축소 신호가 겹치며 세계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이 변화는 에너지 정책도 바꾸고 있다. 화석연료의 지정학적 인질극이 상시화되면서 에너지 전환은 이제 기후정책을 넘어 안보정책으로 읽힌다. 각국 정부가 추진하는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 전기차 및 배터리 공급망 강화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원유와 천연가스 의존도를 구조적으로 낮추지 못하면 국가 전체가 지정학의 파도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이번 위기는 탄소중립의 당위보다 에너지 자립이라는 생존의 현실이 더 시급함을 보여준다.

한국이 이번 충격에 더 민감한 이유는 산업구조에 있다. 한국은 원유를 단순히 소비하는 나라가 아니라, 나프타와 산업가스, 화학원료를 들여와 이를 반도체·배터리·석유화학·자동차 같은 주력 제조업으로 연결하는 경제다. 따라서 중동발 공급 차질은 단순한 유가 부담을 넘어 제조업의 출발점 자체를 흔들 수 있다. 특히 적시생산에 익숙한 산업 구조에서는 작은 물류 지연이나 원료 부족도 곧바로 생산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제 에너지, 통상, 산업은 따로 볼 수 없으며, 산업 밑단까지 포괄하는 경제안보의 시각이 필요하다.
이번 전쟁은 국가 전략의 재설계를 요구한다. 우리 취약성의 핵심은 원유 수입 자체보다, 제조업 투입재가 외부 에너지와 공급망에 깊게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초소재와 물류까지 포함한 가치사슬 전체를 국가안보 시야로 끌어와야 한다. 공급망 취약성을 상시 점검할 통합 컨트롤타워를 세우고, 미국과의 관계도 단순한 원유·LNG 구매를 넘어 원전·핵연료·전력망·에너지 인프라를 포괄하는 산업안보 파트너십으로 격상할 필요가 있다. 대미투자 역시 관세 회피가 아닌 공급망 안정과 산업거점 확보를 위한 전략적 투자로 설계해야 한다.
또한 한국은 단순히 충격을 버티는 나라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에서 쉽게 대체되지 않는 협력국가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방산·조선·반도체뿐 아니라 첨단공정과 운영역량 자체를 전략 자산으로 만들어 협상력을 키워야 한다. 중동 의존을 줄이기 위한 물류·에너지 선택지도 넓혀야 한다. 북극항로와 북극해 개발은 당장은 어렵지만, 중장기적으로 공급 다변화와 리스크 완화를 위한 전략 카드로 검토할 가치가 크다. 향후 미·이란 관계 정상화를 대비해 미국이 추진하는 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IMEC)에도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일본 종합상사 모델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5대 상사는 가스전부터 터미널, 발전까지 포함한 전체 가치사슬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며 2024년 자주개발률 42.1%라는 성과를 냈다. 그 결과 일본은 에너지 안보의 보험을 비교적 두텁게 마련했다. 한국도 이제 사오는 방식에서 확보하는 방식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이번 전쟁이 보여준 것은 기존 세계질서의 장치가 더 이상 예전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이다. 대한민국은 남의 질서에 기대는 나라가 아니라, 스스로 공급망의 규칙을 설계하고 연결하는 나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호르무즈의 경고를 넘어 제조업 강국의 미래를 지키는 길이다.
◆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연세대 경제학과와 KDI대학원(MBA)을 거쳐 건국대에서 무역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 한국무역협회 입사 후 30년 이상 수출입 동향분석과 글로벌 통상전략 수립을 주도해온 무역 전문가다. 현재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으로서 수출경쟁력 강화, 산업별 공급망 안보, 신통상질서 대응 등 급변하는 대외 환경 속에서 우리 기업이 나아갈 이정표를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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