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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싶다, 골목의 맛 부산 할매가 만드는 팥빙수 빙수는 신비로운 존재였다. 사각사각, 기계에 넣고 갈아서 쏟아지는 얼음 알갱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더위를 쫓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부산에 가면 '할매'라는 이름이 붙은 온갖 상품이 있다. 부산에는 부산만의 빙수가 있는데, 여지없이 '할매'가 붙어 있다. 박찬일 셰프 예전에는 여름이면 방송사마다 '납량특집'이라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었다. 텔레비전 시청률이 높던 때라, 인기 있는 방송은 방영 다음 날이면 시중의 화제가 되곤 했다. 지금도 회자되는 전설의 고향은 바로 여름이 대목이었다. 한 맺힌 소복 귀신이 나와서 복수를 한다는 얘기는 오싹 얼어붙기에 딱 알맞은 소재 아닌가. 참고로 '납량(納凉)'이란 시원함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귀신물이 방송의 납량이라면, 음식은 빙수가 그 몫을 했다. 나는 빙수를 워낙 좋아해서 십 원짜리 빙수부터 즐겼다. 아니, 즐기지는 못했다. 늘 십원이 주머니에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인천 중구 영종하늘도시 신축공사 현장에 폭염을 대비한 팥빙수 차가 근로자들을 위해 마련돼 있다. 2024.7.29.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학교 앞에는 무허가 분식집이나 만화가게가 많았는데, 여름이면 빙수를 팔았다. 에펠탑처럼 생긴, 주물로 만든 수동 빙수기계로 만든 빙수 한 그릇이 십 원이었다. 1970년대의 풍경이다. 빙수 만드는 장면은 얼마든지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다. 빙수를 사 먹을 돈이 없어도 침을 흘리며 그 기계 구경을 했던 까닭이다. 돈을 내면 주인이 아이스박스에서 얼음을 꺼내 기계에 턱 건다. 손잡이를 돌리면 얼음이 빙빙 돌면서 날에 깎여 받쳐둔 그릇에 수북이 떨어졌다. 색소가 든 병을 들어 휙휙 뿌려 숟가락이랑 내주는 걸 받아서 합판으로 대충 짠 탁자 위에 놓고 먹었다. 시내에 가면 팥빙수와 '후루츠칵테일' 빙수를 먹는 날이었다. 보통 제과점에서 팔았다. 동네의 꾀죄죄한 빙수와는 격이 다른, 아주 고급한 맛이 났다. 우유며 연유를 넣고 얼음도 더 곱게 갈아서 혀에서 부드럽게 녹았다. 산처럼 갈아낸 얼음이 가득 담긴 그릇도 이내 북극 빙하 무너지듯 쓰러지게 마련이어서 그때마다 내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90년대 들어서 눈꽃 빙수라는 게 생기고 여름 전용 '납량' 얼음과자의 왕에서 사계절 별미로 자리를 바꾸었다. 빙수 전문 카페가 생기고 호텔마다 십만 원에 육박하는 최고급 빙수를 경쟁적으로 낸다. 우리는 빙수 왕국에 산다. 부산의 국제시장에서 판매하는 팥빙수. (사진=기고자 제공) 하지만 진짜 빙수 왕국은 부산이다. 광복동에도 용호동에도 빙수 거리가 있다. 국제시장 안에서 빙수 한 그릇을 먹자면 줄을 서야 한다. 왜 부산이 빙수의 도시인가. 주인은 별 걸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대꾸한다. 생선 얼려두자면 얼음이 필요하고, 그게 다 빙수 재료 아니오. 아하. 게다가 날도더우니 빙수 한 그릇이 더 절실했을 것이다. 부산에 비싸고 요란한 빙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시민들이 사랑하는 건 수수하고 담박한 옛날 빙수다. 부산은 국밥에도 '할매'라는 상호가 붙는데, 빙수도 그렇다. 할매 빙수라. 그저 이름만 들어도 구미가 당기고, 푸근하게 한 그릇 비워내고 싶어진다. 부산 빙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고명은 올리지 않는다. 대신 팥을 푸짐하게 얹어준다. 전국을 석권하고 당대 빙수의 첨단이 된, 얇게 깎아 사르르 녹는 보드란 식감의'눈꽃 빙수'의 오리지널이 부산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것보다는 소박하고 투박한 부산식 할매 빙수가 좋다. 너무 달지 않은 팥이, 마치 할매의 정을 보여주듯이 얼음 위로 푸짐하게 담아서 한 그릇 먹고나면 간식이나 디저트가 아니라 한 끼 식사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런 빙수 말이다. 미국 가서 사는 내 친구는 냉면광인데, 여름이 되면 큰 도시로 몇 시간씩 차를 몰아 간다. 오직 냉면을 먹기 위해서. 한 그릇 잘 먹고 그냥 돌아가기 서운해서 팥빙수도 한 그릇 사서 먹는다. 몇 해 전인가, 그가 실없는 문자를 보내왔다. "내가 서울 살 때 동빙고동 살았잖니. 조선시대 얼음창고가 있었다는 동네 말이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에는 겨울이면 한강에 불려나가서 얼음 부역을 했다잖니. 팥빙수 그릇 앞에 두고 있으면, 왜 그 생각이 나는지 몰라. 나도 늙어간다 야." 시민들이 줄을 서서 빙수 구매를 기다리고 있다.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조선시대에는 그렇게 캐온 한강 얼음을 강가에 있는 서빙고, 동빙고에 저장해 두었다가 여름이 되면 궁으로 날라다 썼다. 차가운 수정과 같은 음료도 만들었겠지만 기본적으로 당시 얼음은 궁의 창고에 쟁여 냉장고 용도로 썼다. 왕이 먹는 음식 재료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였다. 서민들이 얼음을 볼 수 있는 건 겨울 뿐이었다. 여름 얼음은 궁에서나 보는 호사였고 상상 속의 물체였다. 얼음 귀한 건 이렇게 옛날 얘기를 들어야 실감이 난다. 그건 그렇고 얼음으로 만든 최고의 음식인 팥빙수 먹으러 부산 가야겠다. 여름이 저물기 전에. ◆ 박찬일 셰프 셰프로 오래 일하며 음식 재료와 사람의 이야기에 매달리고 있다. 전국의 노포식당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일을 오래 맡아 왔다.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등의 저작물을 펴냈다. 2025.08.07 박찬일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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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새 지평 '코리아 퍼스트' 전방위 실용외교로 국민 이익 극대화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도 당당하게 '한국 우선주의(Korea First)' 정책을 추구하려 한다전방위 우호협력을 도모하는 실용외교야말로 국민들의 이익을 최대한 증진할 수 있는 대외전략이다. 홍현익 전 국립외교원장 국민의 권익 증진 지향하는 '실용 외교안보' 이재명 정부는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건설한다는 기치 하에 대외전략으로 국익 증진을 향한 실용 외교안보를 추진한다. 국민이 주인이므로 당연히 국민의 권익을 증진하는 것이 최고 목표다. 윤석열 정부는 이념 중심의 외교를 추진해 국제사회를 편가름해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미국의 이익 증진에 기여하고 일본에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외교를 펼쳤다. 남북관계는 완전히 망가지고 중국과의 관계는 불편해졌으며 러시아와는 비우호적인 관계가 됐다. 평화롭고 안정된 한반도 안보질서 구축이라는 국익은 외면당했고 국민들은 불안해졌으며 많은 해외 진출 기업들과 교민들의 이익도 침해당했다. 이재명 정부는 이런 부조리들을 시정하고 합리적인 외교를 시행하고자 한다. 대외관계를 정상화하고 국익 중심의 외교안보를 실현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며 국민들이 편안하게 일상 생활을 누리고 안심하면서 생업에 전념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국제사회의 최강국들부터 자국 이익 중심의 대외정책을 펼쳐왔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 1기부터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기조로 삼았고 이제는 이를 넘어 '미국 유일주의(America Only)'를 사실상 추구하고 있다. 미국보다 먼저 중국은 시진핑 주석이 사실상 '중국 우선주의(China First)' 정책을 펼쳐왔다. 세계 4위 경제를 가지게 됐고 2050년 이전 세계 3위가 될 것이 확실한 인도는 동서구와 두루 우호외교를 펼치는 한편 글로벌 사우스의 맹주를 자처하면서 국익 증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도 당당하게 '한국 우선주의(Korea First)' 정책을 추구하려 한다. 이재명 대통령(뒷줄 가운데)이 지난 6월 17일(현지시간) 캐나다 앨버타주 캐내내스키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장에서 G7 및 초청국 정상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국익 증진 외교안보 정책을 펼치려면 우선적으로 국내질서를 바로 잡고 국민 통합을 이루면서 외교안보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인재를 육성하고 첨단 기술을 개발하며 경제력 향상을 이루는 것은 물론이고 자주 국방의 각오로 자강력을 증진하고 국방력을 키워 정예 강군을 건설해야 한다. 먼저 12·3 비상계엄에 동원된 군을 개혁해 문민통치를 확립하며, 인공지능(AI) 기술력과 첨단 장비로 무장시켜 국민에게 신뢰받는 정예 강군을 육성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나라는 우리가 지킨다'는 자주 국방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정찰 감시장비를 갖추며 작전기획 및 지휘 능력을 조속히 갖추는 한편 한미 동맹을 견실하게 유지하고 대북 억지를 확고히 지키는 한 치의 빈틈없는 국가안보태세를 유지하면서 미국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취지 하에 전작권을 국군이 행사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이러한 확고한 안보태세를 기반으로 그간 대북 강경 일변도 기조로 완전히 단절되고 무너진 남북관계가 우리 국익을 저해하지 않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정상화해 화해·협력관계로 재정립하고 평화공존을 제도화하도록 노력하는 한편, 인도적 문제를 해결하면서 가능하다면 호혜적으로 공동 성장하는 평화경제가 구축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외교는 경제외교 역량을 강화하면서 실용외교를 통해 주변 4강국과의 관계를 최적화하고 북핵문제를 해결하면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모색하는 동시에 세계 질서에 참여하고 기여하며 재외국민과 동포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전방위 실용외교를 지향한다. 난관 넘어 국익을 지키는 전략 전략 목표와 전략을 합리적으로 설정했더라도 환경과 여건이 쉽지 않으므로 정부는 많은 난관을 현명하게 헤쳐나가야 한다. 먼저, 군과 검찰은 잘못을 성찰하고 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한미 동맹을 발전시키고 자강력을 증진하며 확고한 국가안보태세를 갖추면서 전작권을 성공적으로 전환받아야 한다. 체제 경쟁에서 뒤처진 북한은 여간해서는 남북 대화 재개와 관계 정상화 요청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남북 간 신뢰 구축 조치를 단계적으로 밟아가되, '좋은 관계'로 직행하기 어렵다면 일단 적대 관계 해소와 '나쁘지 않은 관계'부터 만들어야 한다. 또 북미 대화가 먼저 시작되면 한미 공조를 강화하면서 북핵문제 해결과 함께 남북 대화 재개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동시에 정부는 한미동맹을 건실히 하고 한반도 평화와 안정 구축에 대한 주변 강국들의 협력을 구축해 북한이 결국 대화와 화해를 거쳐 호혜적 협력에 호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외교적으로도 한미동맹 관계를 대외전략의 주축으로 유지하고 첨단기술 및 우주 동맹으로 발전시키면서 개선된 자강력을 기반으로 미국의 동맹 관계 조정 요구에 슬기롭게 대응해야 한다. 미국이 동북아에 신냉전구도를 구축하려 하더라도 이에 순응하기보다는 21세기 평화와 공동번영의 시대정신에 맞는 국제 및 지역협력공동체 구축을 목표로 함께 추구하자고 설득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한미일 안보 협력은 유지하되 국익에 입각해 추진하고, 한일관계도 영토와 과거사 문제는 원칙에 입각해 대응하면서 안보나 경제·사회·문화 등은 미래지향적으로 협력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그간 불편했던 한중관계를 10월 시진핑 주석의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참석을 계기로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완전히 회복하고, 비우호관계로 전락한 한러관계도 진출 기업들과 교민들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전쟁이 끝나는대로 관계를 정상화하고 호혜적인 협력을 재개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기후·환경 등 신안보 의제 논의에 적극 참여하고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견실히 증진하며 다양한 다자협력외교와 함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교량국 역할도 충실히 하는 동시에 해외 교민과 동포 이익 증진도 적극 지원해야 할 것이다. 전방위 우호협력을 도모하는 실용외교야말로 국민들의 이익을 최대한 증진할 수 있는 대외전략이다. ◆ 홍현익 전 국립외교원장 27년 간 세종연구소에서 북핵문제, 남북관계, 한미동맹, 한러관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 한국의 국가안보와 국가전략을 연구했다. 한반도 정세 안정과 평화 구축 및 평화통일을 위해 화해와 공동번영 및 국익 극대화를 지향하는 실용외교를 주창해왔다. 국정기획위원회 외교안보 분과장을 맡았다. 2025.08.05 홍현익 전 국립외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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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경제다 전례 없는 위기, 전례 없는 대응 민주주의 회복에 힘입어 경제심리와 주식시장, 성장률 등이 빠르게 회복하며 우리 경제는 위기의 늪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민생회복 소비쿠폰은 빈사 상태의 소비를 살리는 불쏘시개 역할을 할 것이다. 이처럼 인수위 기간 없이 출발한 지난 2개월 새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은 성공적이었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코로나 펜데믹으로 미국이 기록한 2020년 성장률 -2.2%는, 1950년 이래 금융위기 충격에 따른 2009년의 -2.6%를 제외하면, 가장 낮은 수치였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한 민주당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당일인 2021년 1월 20일에 '미국 구조 계획법(the American Rescue Plan Act)'에 서명하고, 경기부양을 위해 2021년 미국 GDP의 8%에 달하는 1.9조 달러 예산을 의회에 요청하였다. 이 추경안이 상원 예산위원회에서 3월 6일 통과되었을 때 이 추경안에 붙은 제목이 "전례 없는 위기에 대한 전례 없는 대응"이었다. 그 결과 코로나 충격으로 2020년 1분기부터 정상적인 추세에서 추락해왔던 소비지출은 2021년 2분기부터 완전히 회복되었고, 심지어 장기 추세를 초과하였다. 소비지출의 완전한 회복 덕택으로 바이든 대통령은 임기 중, 2000년 이후 역대 정부 중 최고의 기록인, 연평균 3.6% 성장률을 달성하였다. 한국의 일부 인사들은 이러한 '전례 없는 대응'을 미래 세대에게 재정 부담을 떠넘기고 소비 부양 효과도 제한적인 '퍼주기' '현금 살포' '포퓰리즘'으로 비난한다. 그러나 비난과 달리, 높은 성장률은 정부채무의 안정적 관리에도 도움이 되었다. 코로나 확산으로 미국 정부채무는 2019년 말 GDP 대비 99.5%에서 (추경 집행 직전인) 2021년 1분기까지 121.4%로 무려 21.9% 포인트나 증가했지만, 추경 집행 이후 빠른 경기회복과 GDP 증가로 2023년 1분기까지 109.5%로 하락했다. 가계 구제 지원에 힘입어 가계부채도 2019년 말 74.6%에서 2023년 3월에는 73.2%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소비 부양, 경제 성장, 정부와 가계 채무 등 네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다. 반면, 2020년 한국도 우여곡절 끝에 전국민 재난지원금으로 14.2조 원을 투입했는데 이는 그해 GDP의 0.7%에 불과한 규모였다. 그 결과 2020년 가계 소비지출은 (코로나 충격이 없었을 때보다) GDP의 3.9% 규모인 79조 3394억 원이나 감소하였다. 경기가 회복하면서 2022년까지 소비지출의 감소액은 GDP의 3.2%까지 축소되었으나, 2023년 4.0%, 24년 5.1%, 올해 1분기에는 5.5%까지 하락폭이 확대되었다. 그 결과 지난 3년간 가계 대출, 자영업자 대출, 중소기업 대출 연체액은 각각 약 2배, 4배, 5배가 증가하였다. 경기가 갈수록 악화하며 올해 1분기까지 GDP는 지난해 1분기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가계의 (실질) 가처분소득은 2020년 수준으로, 가계 (실질) 소비지출은 2016년 수준으로 후퇴하였다. 코로나 충격 이전에 미국보다 앞섰던 성장률은 충격 이후 미국에 뒤처졌고, 그 결과 정부채무도 2019년 말 GDP 대비 35.4%에서 2023년 말 46.9%로 증가했고, 가계부채 역시 2019년 말 89.6%에서 2023년 9월에는 99.2%까지 급증하였다. 재정 부담을 내세워 고통을 가계에 떠넘긴 결과, 내수 침체, 성장 둔화, 가계와 정부 재정 악화 등 '전례 없는' 4중고를 겪고 있고, 국내외 기관들이 올해 우리나라가 성장률 1%조차 달성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한 배경이다. 지난 3년간 '경제 전염병'이 확산하며 (경제심리 추락 및 실질소득 하락 등으로) 경제주체들은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코로나 펜데믹 때의 상황이 경제 외적 요인에 의한 강요된 경제생태계의 붕괴였다면 최근 상황은 경제주체들의 자신감 상실에 따른 '자발적' 경제생태계 붕괴 상황이라는 점에서 코로나 펜데믹 충격보다 더 심각하였다. 민생회복 소비쿠폰 지급 이후 첫 주말인 7월 27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종합시장의 한 점포에 민생회복 소비쿠폰 사용가능 점포 안내문이 붙어 있다.(ⓒ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러한 배경 속에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민생 회복과 성장에 총력을 기울이고, 김민석 총리가 '제2 IMF'로 비유할 정도로 우리 경제는 '전례 없는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정부에게 필요한 역량은, 위기를 잘 관리하고, 나아가 새로운 기회로 전환하는 역량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인수위 기간에 해당하는 지난 두 달간 보여준 위기관리 역량에 시장은 합격점을 주고 있다. 소비심리지수가 빠르게 회복하면서 34개월 지속한 부정적 경제심리가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지난해 2분기부터 4개 분기(1년간)까지 지난해 1분기 GDP 수준에 미달했으나, 올해 2분기에 늪에서 드디어 벗어났다. 가계소비가 2분기 성장률 0.6% 중 0.2% 포인트를 끌어올리는 등 2분기 내수의 성장기여도가 그 이전 1년(4분기)의 -0.2% 포인트에서 플러스(+) 0.3% 포인트로 급반등한 결과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주식시장이 빠르게 반응을 보인 배경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민주주의 회복과 이재명 정부의 위기관리 역량의 결과물이다. 심리 개선을 넘어 실물경제의 방향을 확실히 전환시켜야 한다. 실물경제 개선이 없는 한 심리 개선은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물경제 개선은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이 고조된 상황에서) 가계에 대한 구제/지원을 통해 가계 소득을 강화해야만 한다. 제도적/구조적으로 강화하기 전에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하는 단기 대책(산소호흡기)이 일명 '소비쿠폰'으로 불리는 '민생지원금'이다. 그러나 12.1조 원은 1분기 가계지출 부족분 36조 4099억 원에 비교하면 1/3 규모에 불과하다. 145조 6395억 원이라는 가계소비 연간 부족분을 고려하면 '언 발에 오줌누기'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7월 22일 "각 부처 단위로 추가적인 소비 진작 프로그램을 준비해 달라"고 당부한 배경이다. 이와 더불어 서민과 중산층 생계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식음료와 에너지 등 생활물가 안정이다. 2020년 대비 지난달(6월)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6.3% 상승했으나, 식료품 및 에너지 물가는 27.3%나 올랐을 정도로 고물가는 서민과 중산층의 실질소득에 훨씬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재명 정부에서 "서민들이 체감하는 밥상물가와 에너지 비용 등 생활물가 안정을 위해 가용한 정책 수단을 총동원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도 서민과 중산층 생계에 대한 물가의 심각성을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싱가포르의 경우 소득계층별 물가 상승률을 조사하고,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물가 상승률이 전체 물가 상승률보다 높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소비쿠폰은 산소호흡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재정 부담으로 지속하기도 어렵다. 급한 불을 끄고 나면, 정기적 민생지원금 지급, 정확히는 재정 부담이 없는 정기적 사회소득(임금) 지급의 제도화가 민생 회복의 충분조건이 될 것이다. ◆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자 최배근 경제연구소 이사장. 건국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사학회 회장, 민족통일연구소 소장, 대안학교인 민들레학교 설립자이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누가 한국 경제를 파괴하는가, 화폐 권력과 민주주의 등이 있다. 2025.07.31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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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일의 미래 AI 시대, 일 잘하는 공무원 인공지능에 파편화된 문장만 마지못해 주는 조직과, 모든 맥락과 검토에 사용한 참고 자료까지 넘겨주는 조직 사이에서 인공지능의 지능 격차가 얼마나 클지 생각해 보라.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데이터는 D 드라이브에 "그 자료 어디 있어?" "김 과장이 갖고 있습니다." "가져와 봐" "김 과장 어디 갔어요?" "서울 올라갔는데요?" "아 큰 일이네, 국장님이 지금 자료 찾으시는데" "잠깐만요, 전화해 볼게요." "김 과장님 국장님이 그 자료 찾으시는데 컴퓨터 비번 좀 불러주세요." "D 드라이브 어느 폴더에 있어요? 아, 찾았다. 감사합니다." 인공지능(AI)이 하는 일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잠재된 패턴을 찾아내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잠재된 패턴을 찾아낼까? 무수히 많은 데이터를 학습해서 그렇게 한다. 맞다. 중요한 것은 데이터다. 충분히 많은 데이터가 확보되지 않으면 AI는 똑똑해질 수 없다. 과적합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이다. 가령 주사위를 세 번 굴렸는데 세 번 다 6이 나왔다고 하자. 그때 '이 주사위는 6이 많이 나와요'라고 하는 게 과적합이다. 너무 적은 데이터에서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다. 제대로 만든 주사위라면 천 번쯤을 굴려보면 1부터 6까지 비슷한 확률로 수렴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데이터는 어디에 있나? D 드라이브에 있다. 그래서 어떻게 되나? 수명을 다해 포맷될 때 함께 사라진다. 숱한 맥락이, 암묵지가, 과정이 포맷과 함께 사라진다. 한국의 공무원들이 장차 써야 할 인공지능의 미래도 아무도 알지 못한 채 함께 포맷된다. 자간·장평, 1페이지 보고서 높은 사람에게 올라갈 보고서일수록 짧아져야 한다. 1페이지가 선호된다. 연차가 높은 공무원일수록 1페이지 보고서를 능숙하게 쓸 수 있다는 걸 자랑한다. "그게 '짬'이지!" 자간과 장평을 귀신같이 다루는 것도 물론이다. 끝에 한 글자가 흘러넘쳐 줄을 바꾸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뒤 페이지로 두 줄이 넘어가는 것도 치욕이다. 아래아한글에는 아예 공무원만 쓰는 전용 폰트가 따로 있을 정도다. 문장은 모두 개조식이다. 음슴체다. 지난 2월 19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세미콘 코리아 2025'에서 관람객들이 전시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은 기고 내용과 무관함.(ⓒ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세상에서 가장 일을 잘한다는 실리콘밸리에선 어떻게 할까? 세계 최고의 AI를 만들고 있는 곳들도 이렇게 '세상에서 제일 바쁜' CEO에게 반드시 1페이지 보고서를 정리해서 드리고 있을까? '6 페이저(6 Pager)'라는 게 있다. 아마존의 회의 규칙이다. 아마존에선 구성원 모두가 6페이지 분량의 메모를 작성해 회사와 공유하고 진행 상황을 업데이트한다. 당연히 완전 문장으로 서술체로 쓴다. 회의에 참석하면 참가자 전원이 첫 30분간을 이 메모를 읽는 데 쓴다. 그러고 나서 회의를 한다.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참석하는 회의라고 예외가 없다. 실은 베이조스가 만든 규칙이다. '6 페이저'의 구조는 도입부, 목표, 원칙, 사업 현황, 교훈, 전략적 우선순위, 부록으로 이뤄진다. 목표와 원칙을 맨 앞에 정리함으로써 길을 잃지 않게 만든다. '음슴체'와 유사한 게 아마도 파워포인트로 만든 보고서일 것이다. 아마존, 링크드인 등 많은 실리콘밸리 회사들이 사내 회의에서 프레젠테이션 문서를 금지하고 있다. 파워포인트(PPT)를 금지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베이조스는 "파워포인트는 판매 도구다. 내부적으로는 끝까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이 판매하는 것"이다며 "파워포인트의 불릿 포인트(글머리 기호) 뒤에는 많은 엉성한 사고를 숨길 수 있다. 서술 구조를 가진 완전한 문장을 써야 할 때는 엉성한 사고를 숨기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좋은 4페이지 메모를 쓰는 것이 20페이지 파워포인트를 '만드는' 것보다 어려운 이유는 메모의 서술 구조가 더 나은 사고와, 무엇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강제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요한 보고일수록 클라우드를 써야 한다. 실리콘밸리의 협업 시스템은 클라우드를 기본으로 한다. 위키 엔진을 기반으로 한 게시판을 주로 쓴다. 모든 게시판은 기본적으로 공개가 원칙이다. 대개 재무와 인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서가 게시판을 공개로 설정해 두고 있다. 구글에 입사한 개발자는 첫날부터 회사의 핵심 자산인 검색엔진의 소스코드를 들여다볼 수 있다. 게시판을 공개로 하면 모든 참가자가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강력한 장점이 생긴다. 그간의 모든 논의 과정과 자료가 다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문서를 공유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맥락'을 공유할 수 있다. 문장(text)이 아니라 문맥(context)이 기본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다른지는 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클라우드를 쓰고 게시판을 공개로 두면 내가 만든 모든 자료, 내가 검토한 모든 참고 자료가 고스란히 조직 내에 쌓이게 된다. 인공지능이 얼마나 좋아할 일인가!! 인공지능에 파편화된 문장만 마지못해 주는 조직과, 모든 맥락과 검토에 사용한 참고 자료까지 넘겨주는 조직 사이에서 인공지능의 지능 격차가 얼마나 클지 생각해 보라! 1페이지 요약을 가능한 한 하지 말아야 한다. 전체 소요 시간을 생각해 보자. '6 페이저'를 받은 사람과 1페이지 요약을 받은 사람의 전체 효율을 생각해보면 '6 페이저'가 압도적으로 나을 거라는 건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보고서를 읽는 시간과 전체 업무시간, 업무의 효율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언제나 총소유비용(TCO)을 생각해야 한다. 잉크젯 프린트를 싸다고 덜렁 샀다가 잉크값으로 돈이 줄줄 새는 것과 마찬가지다. 1페이지 보고서는 잉크값이 다락같이 비싼 싸구려 잉크젯이다. 주요한 결정이 필요한 보고서는 반드시 서술체로 작성해야 한다. 음슴체는 '많은 엉성한 사고를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서술 구조가 더 나은 사고와, 무엇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강제'한다. 무엇보다도 음슴체보다 서술체가 인공지능을 학습시키고, 맥락을 공유할 수 있게 하는데 백만 배 낫다. 대한민국 공무원은 훨씬 더 뛰어난 인공지능을 쓸 자격이 있다. ◆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KTH, 엠파스 등 IT 업계에서 오래 일했으며 현재 녹서포럼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IT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21년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눈 떠보니 선진국, 박태웅의 AI 강의 등이 있다. 2025.07.28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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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고령화 대극복 K-아빠, 돌봄의 새로운 트렌드 : 기업과 함께 세계로 한국 아빠들의 변화는 개인의 진심에서 출발했지만, 그 여정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 주체는 기업과 사회, 그리고 국가다. 지금 우리는 '일하는 아빠'와 '돌보는 아빠' 사이에서 균형을 만들어가는 전환기에 있다. 이제는 아이를 돌보는 아빠가 세상을 움직일 차례다. 김기탁 가치자람 아빠육아문화연구소장,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자문위원 지금 한국의 아빠들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유아교육 현장과 놀이터에서, 재택근무 중 점심시간을 쪼개 이유식을 먹이는 장면에서, 육아휴직 후 다시 돌아온 회의실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아빠상'을 목격한다. 남성 육아휴직자 수는 2024년 기준 4만 명을 넘어섰고, 주요 기업의 교육 프로그램이나 지역 커뮤니티에서 '아빠 육아 교실'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 변화의 핵심에는 디지털로 정보를 접하고, 아버지 세대의 부재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MZ세대 아빠들이 있다. 하지만 이 변화는 개인의 결단만으로 지속될 수 없다. 이제는 기업, 정부, 사회가 함께 '아이를 돌보는 아빠'가 일상이 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한국형 양육 문화 'K-아빠(K-DADDY, 케이-대디)'의 출발점이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막을 올린 '제47회 베페 베이비페어'를 찾은 관람객들이 다양한 유아용품을 살펴보고 있다. 2025.2.6.(ⓒ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유연근무·재택 기반의 돌봄 균형이 성과로 이어지다 기업은 돌봄에 무관한 조직이 아니다. 근로시간을 단축하거나 재택 기반 유연근무를 보장한 기업일수록 이직률이 낮고, 직원 만족도가 높으며, 성과 지표도 높다는 데이터는 이를 입증한다. 파르나스호텔의 경우 최근 3년간 육아기 단축근무제 사용률 2배 이상,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도 60% 이상 증가 등 가족친화적인 근무환경으로 자발적 퇴사율이 2023년 기준 8%에서 2025년 상반기 3%까지 감소하며 이직률이 낮아지고 신입사원 지원자는 늘어나고 있다. ◆ 'Care Buddy'와 'Care KPI'로 실질적인 문화 전환 돌봄 문화가 기업에서 작동하려면 제도만큼이나 '실행 구조'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육아휴직 전후 복귀자를 1:1로 연결하는 Care Buddy(케어 버디)를 통해 업무 공백을 최소화하고, 팀워크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다. 또한 조직 OKR(Objectives and Key Results)에 '휴가 사용률'이나 '돌봄 균형 지표'(Care KPI, 케어-케이피아이)를 포함하면, 상사가 먼저 실천하고 팀원이 따를 수 있는 흐름이 만들어진다. A 대기업에서 상급자가 2주간 육아휴직을 먼저 사용하자, 팀 전체 휴가 사용률이 약 18 %p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으며(기업 내부 보고 기준), 이는 '리더의 행동이 조직문화 전환의 실질적 계기'라는 조직심리학적 관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 양육친화기업 인증과 글로벌 확산 전략 정부는 지금이야말로 K-아빠 생태계에 필요한 정책을 구체화해야 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방식의 기업 참여 유도와 글로벌 연계 전략이 필요하다. 가족친화기업 인증 마크를 받은 중소기업에 대해 정부가 RD, 세제, 해외 진출 투자 우선 지원, 해외 투자 유치 설명회(예: KOTRA, 산업부 주관)에서 K-아빠 인증 기업에 대한 우대 투자 모델 제시 'Care ESG' 개념을 반영한 공공조달 및 정부 위탁 사업 우선 선정, '100인의 아빠단' 국제 공동사업화 UNESCO, OECD 가족정책 센터, 아세안 국가들과 협력해 아빠 육아 참여 확산 프로그램 수출, 아빠 대상 리더십 워크숍 등 이러한 제도는 단순한 복지정책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경제 생태계 구조 혁신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 K-아빠, 이제는 문화와 콘텐츠로 세계를 연결할 때 돌봄은 '감정'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문화 영역이다. 케이-팝(K-POP)처럼, 한국의 아빠들이 일상에서 보여주는 아이와의 애착, 성장, 협력의 이야기는 세계에 통할 수 있다. 소셜미디어(SNS)에서 공유되는 아빠들의 육아 챌린지 중 100인의 아빠단 콘텐츠의 누적 노출 조회수는 1800만 회에 달한다. 기업 주도의 아빠육아 일기 스토리텔링 마케팅, 유튜브·OTT를 기반으로 아빠 육아 웹시리즈, 브랜드와 협업한 육아 콘텐츠, 한국에서 활동 중인 외국인 아빠와 국내 아빠들의 글로벌 육아 교류 콘텐츠 제작 등 K-아빠 기반 공공외교형 플랫폼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상의 문화 콘텐츠가 한국문화의 인식을 바꾸고 세계로 연결될 수 있기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넘어 브랜드 신뢰도와 글로벌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가 된다. 돌봄은 더 이상 가족만의 일이 아니다. 한국 아빠들의 변화는 개인의 진심에서 출발했지만, 그 여정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 주체는 기업과 사회, 그리고 국가다. 지금 우리는 '일하는 아빠'와 '돌보는 아빠' 사이에서 균형을 만들어가는 전환기에 있다. 이 균형을 사회 전체가 지지하고 확장할 때, K-아빠는 단순한 캠페인을 넘어, 한국의 새로운 사회 혁신 모델이자 세계가 주목할 기준이 될 것이다. 이제는 아이를 돌보는 아빠가 세상을 움직일 차례다. ◆ 김기탁 가치자람 아빠육아문화연구소장,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자문위원 저출산고령화위원회 자문위원이자 가치자람사회적협동조합에서 아빠육아문화연구소장으로 근무 중이다. 보건복지부 100인의 아빠단으로 활동하며 세 아이와 함께 소통하는 아빠로 성장할 수 있었다. 아빠육아와 남성육아휴직 인식문화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5.07.24 김기탁 가치자람 아빠육아문화연구소장,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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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고령화 대극복 초고령사회…'어떻게 나이들 것인가'에 답해야 할 시간 고령화는 '장소에 머무는 상태'가 아니라, '시간에 따른 과정'이다. 그렇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지원'이 아니라, '동행'이며, '정책'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 반응하는 환경'이다. 고영호 건축공간연구원 연구위원·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민간위원 "어떻게 나이들 것인가"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급속한 인구 고령화는 이제 대한민국 사회 전체의 구조를 바꾸고 있다. 평균 수명은 늘어났지만, 일상의 기반이 되는 주거와 지역, 서비스 체계는 여전히 '젊고 건강했던 시절'에 머물러 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기 삶이 점점 불편해지고 불안해지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고령자'라는 이름의 대상 정책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회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필자가 정책 칼럼을 통해 반복적으로 강조해 온 '과정으로서의 고령화'에 대응하는 생활환경의 전환이라는 관점이다. 초고령사회는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정책이 여전히 특정 연령대만을 겨냥해 설계되고, 고령화에 따른 다양한 욕구가 개별적으로 분절된 채 대응된다면, 결국 그 피해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미래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 글은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책브리핑에' 10편의 칼럼을 통해 필자가 제안해 온 정책 메시지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서, 새 정부가 초고령사회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이제 '고령자 지원'의 차원을 넘어, 모든 시민의 생애주기 전반을 통합적으로 설계하는 사회적 전환기에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정책과 제도는 고령화의 결과로 나타나는 일상생활의 복합적 문제를 분절적으로 다룬다. 돌봄은 복지의 영역으로, 건강은 의료의 영역으로, 주거는 부동산의 영역으로 각각 흩어져 있으며, 이들 간 유기적 연결은 제도적으로 거의 설계되어 있지 않다. '살던 집에서 나이 들기(Aging in Place)'는 오랫동안 고령친화적 삶의 이상으로 여겨졌고, 많은 정책과 사업이 그에 맞추어 설계됐다. 하지만 실제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건강 상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고, 돌봄과 지원에 대한 욕구는 점진적으로 혹은 급격하게 증가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한 사람의 '노화'가 기존 주거지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전제를 고수하고 있다. 이는 결국 고령자의 삶을 특정 공간에 고립시키고, 다양한 사회적 자원과의 연결 가능성을 차단하게 만든다.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린 2022 대한민국 주거복지대전 내 주거약자 케어존에서 관계자가 노인체험복을 설명하고 있다. 2022.12.21.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즉, '장소에 머무는 노화'에서 '과정에 대응하는 생활환경'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고령화는 장소가 아니라 과정이며, 따라서 대응도 고정된 공간이 아닌 유연한 생활환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거 공간이 변화에 적응하고, 복지 서비스가 연계되며, 이동성과 사회적 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일상의 기반이 필요하다. 단순히 집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반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대응은 고령자만을 위한 정책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고령친화도시는 특정 세대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모든 세대가 '나이 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도시여야 한다. 결국 오늘의 청년도, 중년도, 노년도 각자의 시점에서 자신이 살아갈 미래의 도시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진정한 초고령사회 대응은 '고령자 정책'을 넘어서 생애주기 전체에 대응하는 정책 전환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전환의 시작점은 '어디서 나이 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고령화 대응의 방향이 '공간에 머무는 것'에서 '함께 살아가는 관계망의 재구성'으로 전환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NORC(Naturally Occurring Retirement Community), CCRC(Continuing Care Retirement Community), UBRC(University-Based Retirement Community) 등의 모델은 고령자의 신체적 변화에 대응하는 다양한 서비스 연계는 물론, 사회적 고립을 막고 삶의 목적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주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발전한 NORC는 인위적인 고령자 거주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고령자가 밀집된 지역을 기반으로 건강관리, 주거관리, 커뮤니티 프로그램 등을 통합적으로 제공한다. 이는 '어디에 사는가'보다 '어떻게 연결되는가'가 중요하다는 관점을 잘 보여준다. 또한 CCRC는 건강 상태에 따라 독립적 거주에서부터 간병이 필요한 단계까지 연속적인 돌봄이 가능한 공간으로 구성되며, 고령자의 삶의 전환에 따라 적절한 환경이 유기적으로 제공되도록 설계된다. 이는 '고령자 시설'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넘어서, 삶의 변화를 수용하는 생활환경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주목받는 UBRC 모델은 대학 캠퍼스 인근 또는 내부에 고령자 주거지를 조성하고, 세대 간 교류와 평생학습, 건강 프로그램을 연계함으로써, 단순한 돌봄을 넘어 지속적인 삶의 의미와 소속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공유한다. 바로, 고령화라는 과정을 하나의 '삶의 통합적 변화'로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는 주거·의료·사회적 자원들을 '동선 위에서 엮어내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 모델은 단순히 복지시설의 하나가 아니라, 삶의 전환을 동반하는 인프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사회는 그동안 고령자 주거복지정책의 틀을 '시설'과 '재택'의 이분법으로 구분해 왔다. 그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령자의 삶의 전환 지점들, 그리고 그 지점마다 요구되는 환경과 서비스의 연속성은 제도 밖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계속 그 집에 살아야 오래 사는 것"이라는 단선적인 슬로건은, 오히려 주거 이전이나 환경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고, 결과적으로는 서비스 미이용이나 방치로 이어지는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고령자의 삶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역동적인 변화의 연속이다. 신체 기능의 저하, 배우자의 사별, 소득 구조의 변화, 돌봄의 필요 등은 시간과 함께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변화들이며, 주거와 복지, 보건의 영역은 이 변화에 따라 유기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따라서 이제는 '살던 집에 머무르는 것'을 절대적인 목표로 삼기보다는 고령자의 변화에 맞춰 주거와 서비스가 함께 이동하고 조정될 수 있는 유연한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곧 '지역사회 안에서 나이들기(Agin in Place)'와 '지역공동체와 함께 나이들기(Aging in Community)'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공간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데 있다. 고령자가 살아가는 공간은 더 이상 단독주택이나 아파트라는 물리적 단위에 갇혀서는 안 된다. 지역의 보건소, 작은 도서관, 마을식당, 경로당, 복지관, 공원, 골목길 모두가 고령자의 삶을 지탱하는 공간이며, 이들의 '네트워크'가 곧 고령친화도시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령자만을 위한 도시가 아닌, 모두가 나이 들어가는 도시, 즉 전 생애 주기를 포괄하는 연령친화도시를 정책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앞으로의 대한민국이 준비해야 할 초고령사회 대응 전략의 핵심 방향일 것이다. 대한민국은 초고령사회를 이미 현실로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고령자의 삶을 하나의 고정된 상태로 보는 정책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재택이냐 시설이냐, 복지냐 의료냐 하는 이분법적 틀에 머무르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령화는 진행형의 과정이고 이에 따라 주거환경과 서비스체계도 함께 유기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이러한 대응은 개인의 '집'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 지역사회와 도시 전체가 함께 유연하게 전환하는 구조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UBRC(대학 기반 고령자 커뮤니티), NORC(자연발생적 고령자 밀집 지역 지원), CCRC(연속적 돌봄이 가능한 주거복합체) 등 다양한 해외 모델은 참고할 만한 사례일 뿐, 중요한 것은 이러한 흐름을 우리 실정에 맞게 설계하고 구현하려는 정치적 의지와 정책적 통합력이다. 새롭게 출범한 정부는 현재 국정과제 설정을 위한 논의와 구상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초고령사회에 대한 정책 대응 역시 고령자 지원을 넘어, 모두가 나이 들어가는 사회 전체를 설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이제 정부는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에 머무르지 말고, '모두가 나이 들어가는 사회'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진정한 고령친화도시란, 고령자만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누구나 존엄하게 늙어갈 수 있도록 함께 준비하는 도시이며, 주거와 서비스, 커뮤니티가 함께 대응하는 시스템으로 삶의 유연성을 지켜주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늙음이라는 생애 과정을 '견뎌야 할 일'이 아니라 '함께 준비할 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방향도 바꿔야 한다. 지원이 아니라, 동행을 위한 체계로. 정책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 반응하는 환경으로. ◆ 고영호 건축공간연구원 연구위원,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민간위원 건축공간연구원 고령친화정책연구센터장, 기획재정부 인구위기대응 TF 고령사회 대응반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민간위원, 국토교통부 인구대응협의체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령자 주거와 복지의 연계, 고령친화 공동체마을 등에 대한 고령친화 건축도시공간 정책연구 전문가이다. 2025.07.22 고영호 건축공간연구원 연구위원·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민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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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인생 싱글노후,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싱글 노인이 되는 원인으로는 부부의 사별, 중년이혼이나 황혼이혼 후 재혼을 하지 않는 경우, 평생 결혼하지 않고 나이 드는 생애 미혼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누구라도 언젠가 싱글노후를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강창희 행복100세 자산관리연구회 대표 100세 시대를 반영하여 혼자 사는 노인 즉, 싱글 노인의 수가 빠르게 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해면, 2014년에는 노 인인구 627만 7000명의 18.4%인 115만 2700명이 싱글 노인이었는데 2024년에는 993만 8000 노인의 22.1%에 해당하는 219만 6000명으로 늘었다. 10년 사이에 무려 1.9배로 늘어난 것이다. 참고로, 우리보다 고령사회를 앞서가고 있는 일본의 경우 2015년에는 3343만 8000 노인의 17.7%인 592만 7000명이 싱글노인이었다. 이것이 2025년에는 3654만 5000노인의 22.3%에 해당하는 815만 5000명으로 늘었다(일본 인구문제 연구소 추계). 싱글 노인 문제가 크게 사회 문제화되어 있는 일본에서도 지난 10년의 싱글 노인 증가 속도가 1.4배였던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싱글 노인의 수는 얼마나 빠르게 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12월에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20%를 넘어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통계청 장래인구 추계에 의하면 이 노인 인구 비율이 2036년에는 지금의 일본 수준인 30%를 넘어서고, 2045년에는 37%로 그 시점의 일본 비율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싱글 노인이 되는 원인으로는 부부의 사별, 중년이혼이나 황혼이혼 후 재혼을 하지 않는 경우, 평생 결혼하지 않고 나이 드는 생애 미혼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누구라도 언젠가 싱글노후를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구시가 홀로 사는 노인들에게 제공한 '24시간 AI 돌봄 스피커'를 보고 말을 하고 있는 주민.(대구 서구 제공) 2025.7.12.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서구 선진사회에서는 노후에 혼자 사는 문제를 우리보다 훨씬 일찍 경험해 왔다. 예를 들어, 스웨덴의 경우에는 젊은 세대, 노인 세대 합하여 전국 평균 1인가구 비율이 57%이고, 수도 스톡홀름의 경우 무려 60%에 달한다. 2023년 현재 우리나라의 1인 가구 비율 35.5%를 훨씬 상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코노미스트지 조사에 따르면 미래가 어둡고 불행한 나라, 쇠락하는 나라가 아니고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살기 좋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혼자 살 수 있는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삶에 대해 어둡고 비관적인 이미지를 갖기보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혼자 사는 삶을 행복한 삶으로 바꿀 수 있도록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 살게 되는 노후를 행복한 노후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우리가 노후의 3대 불안이라고 하면 돈(노후자금), 건강, 외로움을 꼽는다. 이 3대 불안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바로 혼자 사는 노후에 대한 대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금과 보험 준비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최저생활비 정도는 3층연금(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으로 받을 수 있도록 현역 시절부터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가장 시급하다. 3층 연금으로 모자랄 경우에는 주택연금이나 농지연금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남편이 종신보험을 들어 두는 것도 좋다. 남편 사망 때 받은 보험금으로 혼자 된 아내가 노후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다. 이 경우 종신보험은 아내에게 가장 귀한 선물이 될 것이다. 의료비 마련을 위한 의료실비보험 또한 필요하다. 불의의 사고나 질병을 당했을 때 병원비 마련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노후에 대비한 준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준비는 외로움에 견디는 능력, 즉, 고독력을 키우는 일이다. 현역 시절에 어느 정도의 노후 자금을 마련하여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고독'에서만은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고독력을 키운다는 생각 때문에 고립된 생활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혼자 살더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자신에게 맞는 취미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공동체에 편입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립을 피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거 형태이다. 자녀와 같이 살기를 희망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웃만한 복지시설이 없다. 우리보다 고령사회를 일찍 경험한 일본의 경우, 노부부만 살거나 부부가 사별하고 혼자된 경우에는 18~20평의 소형평수이면서 쇼핑, 의료, 취미, 오락, 친교까지를 모두 가까운 거리에서 해결할 수 있는 주거형태를 선호한다. 아직도 대형이나 고층 아파트를 선호하는 우리나라 노년 세대들이 참고로 해야 할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노후생활비 준비 방법이다. 종래의 남편 중심의 노후 준비에서 혼자 남아 살게 될 가능성이 큰 아내를 배려하는 노후준비로 바꿔야 한다. 65세 이상 혼자 사는 노인의 72%가 여성이고, 70세 이상인 경우에는 78%가 여성이다. 혼자 살게 되는 기간 또한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길다. 어찌 보면 혼자 사는 노후는 여성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내가 혼자 남아 살게 될 경우를 생각하여 연금, 보험 등에 가입하여 미리미리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다. 최근 들어 가족의 해체가 일어나고 있는 한편에 가족회복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 또한 참고로 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는 한 건물 안에 3대가 독립적으로 살 수 있도록 개축을 하면 세제혜택을 준다. 그리고 노인이 큰 집에 혼자 또는 둘만 살게 될 경우 젊은 세대와 같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그룹리빙, 공유경제 등이 활성화되고 있다. 관심을 갖고 참고할 만한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 강창희 행복100세 자산관리 연구회 대표, 전 미래에셋 부회장 대우증권 상무, 현대투신운용 대표, 미래에셋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행복100세 자산관리 연구회 대표로 일하고 있다. 대우증권 도쿄사무소장 시절, 현지의 고령화 문제를 직접 마주하면서 노후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품격 있는 노후를 보낼수 있는 다양한 설계방법을 공부하고 설파하고 있다. 2025.07.17 강창희 행복100세 자산관리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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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돋보기 크리스마스의 기적, 고래의 꿈이 세계유산이 되다 문화유산은 그 자체로 우리 상상력에 불을 붙이는 장치다. 반구천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의 꿈은 유네스코의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이제 이 거대한 바위의 장엄한 서사는, 인류와 함께 나누는 이야기로 승화되어야 한다. 정길화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 "1970년 12월 24일은 내 인생에서 하나의 획을 그은 날이자 우리나라 선사 역사 연구에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신라 승려인 원효대사의 흔적을 찾아 울산 언양을 찾았고, '절벽에 이상한 그림이 보인다'라는 말에 내 눈은 번쩍 뜨였다. 신라 마애불(磨崖佛)일 수 있다는 마음에 서둘러 간 곳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암각화가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71년 12월 25일에는 인근 대곡리에서 고래, 사슴, 호랑이, 멧돼지 등 다양한 동물과 사냥 장면이 실감 나게 표현된 또 다른 암각화가 발견됐다. 이날 아침 연구진과 마을 사람을 태운 배를 타고 하류 계곡으로 출발한 지 10분 만에 윤기가 나는 암벽이 보였다.." 문명대 저, 울산 반구대 암각화 중에서(2023) 대략 반세기 전, 1년 사이에 크리스마스 전후로 반구천 암각화를 발견한 문명대 교수의 회고담이다. 초기에는 먼저 발견된 '천전리 암각화'와 나중에 발견된 '대곡리 암각화'를 묶어서 '반구대 암각화'로 기술하다가 지금은 '반구천 암각화'로 통칭하고 있다. 이번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공식 명칭도 '반구천 암각화'다. 천전리 암각화는 청동기 시대, 대곡리 암각화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인데 순서를 바꾸어 발견되었고, 나란히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반구천 암각화는 선사 시대부터 무려 6000년을 이어온 인간의 상상력과 예술성, 자연과의 교감이 바위 위에 새겨진 '역사의 벽화'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번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선사 시대부터 6000여 년에 걸쳐 지속된 암각화의 전통을 증명하는 독보적인 증거"라고 평가했다. 이어서 "탁월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사실적인 그림과 독특한 구도는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예술성을 보여준다"라고 말하고 "선사인의 창의성으로 풀어낸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키워드는 사실성, 예술성, 창의성이다. 제대로 평가한 것으로 생각한다. 2010년 잠정목록에 오른 지 15년이 지나서야 세계유산으로서 빛을 보게 됐다. 천전리 유적에는 높이 약 2.7m, 너비 10m 바위 면을 따라 각종 도형과 글, 그림 등 620여 점이 새겨져 있다. 청동기 시대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마름모, 원형 등의 추상적 문양이다. 후대인 신라 시대에 새겨진 명문(銘文)도 보인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의 모습.(국가유산청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2025.7.12.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한편, 반구천 암각화엔 새끼 고래를 이끄는 무리, 작살에 맞아 배로 끌려가는 고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호랑이·사슴 같은 육지동물과 풍요를 빌던 제의(祭儀)의 흔적도 생생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견된 이 놀라운 유적은 고미술학계에서는 '크리스마스의 기적' 혹은 '크리스마스의 선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실제로 이 암각화를 '실물영접'으로 본 적이 있다. 1987년 3월, MBC 다큐멘터리'한국문화의 원류를 찾아서'를 제작하며, 동국대 문명대 교수 연구팀과 함께 그 현장을 찾았다. 계곡을 따라 깊이 들어가 처음 마주한 그 암각화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해가 넘어가는 오후에 햇살이 비치는 암벽에 50여 마리의 고래들이 살아 움직이듯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동물의 묘사가 아니었다. 집단의례의 도상이며, 인류 예술의 기원이며, 오늘날 다큐멘터리의 스토리보드였다. 반구천은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의 기록이자, 고래가 직립해 뭍과 하늘을 연결하던 신화의 공간이었다. 연구진과 함께 암각화를 눈앞에서 목도하고 만져보고 할 기회는 그 뒤로 다시 오지 않았다. 6000여 년 전 무렵, 동해 연안의 거주민이 바다에서 집단으로 고래를 잡았다. 그리고 뭍으로 올라 반석 같은 바위를 찾아 고래를 새겼다. 반구천 암각화는 선사인이 하늘로 띄운 기도이며, 공동체의 삶을 기록한 생활 연대기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라스코 동굴벽화, 스페인이 자부하는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부럽지 않았다. 고래 옆에 새겨진 호랑이와 사슴, 여전히 해석되지 않은 기하문들은 미지의 코드를 품고 있다. 천전리 암각화의 다섯 개 다이아몬드 형상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추상시다. 2022년 울산MBC는 3부작 다큐멘터리로 이 신비를 탐구한 바 있다. 문화유산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와 대화하고 소통하는, 시간의 언어다. 반구천 암각화는 지난 반세기 동안 수몰 위협과 싸워왔다. 고래의 유영이 기록된 바위는 댐의 수위에 잠겨 박락이 떨어져 나가고 어설픈 탁본으로 원본이 상실되기도 했다. 최근 가뭄이 잦아 암각화가 비교적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점증하는 기후변화와 댐 운영의 변수 앞에서 언제든 '반구천'은 '반수천(半水川)'이 될 수 있다. 물속 유산은 세계유산이 아니다. 등재 이후의 보호·관리 계획이 부실하다면 유네스코는 등재를 철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적의 현장'을 '수몰의 현장'으로 되돌리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된다. 진짜 과제는 지금부터다. 그동안 울산시는 '고래의 도시'를 표방하며 고래 축제를 개최하는 등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암각화를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체험형 테마공원과 탐방로, 교육 프로그램, 워케이션 공간까지 아우르는 생동하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하고 있다. 이번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을 계기로 AI 기반의 스마트 유산관리 시스템, 암각화 세계센터 건립 등 미래형 전략도 병행된다고 한다. 그러나 혹여 관광 인프라라는 명분 아래 생태 환경이 훼손되거나, 과잉개발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유산의 본질을 배반하는 일이다. 앞서 말한 프랑스 라스코 및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에서의 보존사례를 참고하는 것도 좋겠다. 뛰어난 입체감과 색채감으로 '선사 시대의 시스티나 성당'이라 불리는 라스코의 경우, 1948년 일반 공개 이후 관람객 증가로 이산화탄소, 습도, 곰팡이 등이 발생하자 1963년 진본 동굴을 폐쇄하였다. 인근에 재현 동굴을 설치하였고 2016년에는 디지털 기술로 구현한 복제본을 개관했다고 한다. 실제 동굴은 철저히 밀폐 및 감시 상태에 있다고 한다. 인류 선사 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알타미라 동굴도 20세기 중반 이후 관광객 급증하면서 벽화의 균열, 박리, 곰팡이 등의 훼손 발생해 2002년에 전면 폐쇄했다. 이후 동굴 입구 인근에 정밀한 복제 동굴인 '새 동굴(Neocueva)'을 설치해 교육과 관광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원본 동굴의 경우 2014년 이후 극소수 인원만 추첨제로 관람이 가능하다고 한다. 라스코와 알타미라의 경우는 문화유산의 공개와 보존 간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들은 동굴벽화로서 애로로 인하여 둘 다 결국 복제품을 통한 '간접 관람'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해야만 했다. 물론 문화유산은 원본이 주는 '아우라'가 최상이다. 그렇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후대에 잘 물려주어야 하는 책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때마침 현대 기술은 3D 스캔, 디지털 프린트, AI 제어 등을 능히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유산은 그 자체로 우리 상상력에 불을 붙이는 장치다. 반구천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의 꿈은 유네스코의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이제 이 거대한 바위의 장엄한 서사는, 인류와 함께 나누는 이야기로 승화되어야 한다. ◆ 정길화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원장 MBC 교양PD로 '인간시대', 'PD수첩' 등의 프로그램 연출을 맡았다. '중남미 한류 팬덤 연구'로 언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MBC중남미지사장 겸 특파원을 거쳐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으로 K-콘텐츠와 한류정책을 연구하면서 '공감 한류' 전파에 기여하고 있다. yonsol@hanmail.net 2025.07.16 정길화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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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고령화 대극복 세대를 잇는 도시, 연령통합사회를 상상하다 세대는 나눌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방식이다. 이제는 세대를 잇는 도시, 나이를 넘어 함께 살아가는 연령통합사회를 상상할 때이다 고영호 건축공간연구원 연구위원·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민간위원 우리 사회는 지금 출생은 줄고, 고령자는 빠르게 늘어나는 커다란 변화 속에 있다. 아이 울음소리는 줄고, 동네 어르신들의 숫자는 해마다 많아지고 있다. 문제는 이 변화가 단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 간의 관계까지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정책도 마찬가지이다. 아이 돌봄, 청년 주거, 노인 복지처럼 각 세대를 따로 지원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다 보니, 같은 동네에 살아도 세대 간에 서로 만날 기회가 적고, 함께 어울릴 공간도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다르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어울릴 수 있는 공간,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연령통합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다음 걸음이다. 연령통합사회는 복잡한 말 같지만, 사실은 단순하다. 어린이, 청년, 중장년, 어르신이 한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도시와 동네를 설계하자는 것이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는 공원 옆 벤치에서 어르신이 책을 읽고, 청년들이 지역의 마을카페에서 주민들과 함께 일하는 풍경. 이런 장면이 낯설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바로 연령통합이다. 해외에서도 이런 시도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OECD는 최근 '모든 세대를 위한 도시(Cities for All Ages)'라는 새로운 정책 방향을 제시하면서, 도시 공간에서 세대 간 만남과 연결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안전한 보행환경', '세대를 잇는 공동체 공간', '공공서비스 접근성 강화' 같은 변화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양한 연령대가 공유하는 공간(카페, 유치원, 시니어케어)이 함께 배치된 주거단지 배치 설계(출처 - 온라인 건축 전문 플랫폼 ArchiDaily) 연령통합사회는 단순히 세대가 함께 사는 사회를 뜻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세대 간의 경계가 지나치게 나뉘지 않고,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공존할 수 있는 사회 환경을 말한다.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동네 공간, 나이와 관계없이 접근할 수 있는 교통과 서비스, 세대 간 어울림을 유도하는 커뮤니티 설계가 그 핵심이다. 미국 테네시 주 녹스(Knox) 카운티에 조성된 세대혼합형 놀이터.(출처 - https://legacyparks.org) 중요한 건, 연령통합이 복지정책의 일부로만 머물러선 안 된다는 점이다. 생활환경 전체의 설계와 운영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예컨대 청년 주택과 고령자 주거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같은 단지 안에서 삶의 리듬을 나누는 구조로 설계되어야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상호작용'이다. 그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 구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서비스와 프로그램, 그리고 심리적 거리감을 줄여주는 디자인이 함께 작동해야 진정한 연령통합이 가능하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제시된 주요 공약을 보면, 저출생 대응은 보육, 양육비, 주거 지원 중심으로, 고령사회 대응은 돌봄과 의료체계 강화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정책은 분명 필요한 일들이지만, 여전히 세대별 지원을 나눠서 바라보는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세대를 따로 보는 방식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의 전환이다. 연령에 따라 정책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주기를 아우르고 연결하는 정책의 틀이 마련돼야 한다. 새 정부가 이러한 전환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공간과 정책, 서비스의 설계 전반에서 '연령통합'의 원리를 반영해주길 기대한다. 단지 복지를 확장하는 것을 넘어서, 세대 간의 관계를 회복하고 연결하는 도시와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그리고 모두가 아이였고,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도시와 정책이 잊지 않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쪽에서는 출산율이 줄어드는 통계가 발표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고령 인구가 어린이를 앞질렀다는 뉴스가 이어진다. 이 변화는 위기이자 기회다. 나이와 세대를 가르는 경계를 허물고,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공간과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전환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세대는 나눌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방식이다. 이제는 세대를 잇는 도시, 나이를 넘어 함께 살아가는 연령통합사회를 상상할 때이다. ◆ 고영호 건축공간연구원 연구위원,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민간위원 건축공간연구원 고령친화정책연구센터장, 기획재정부 인구위기대응 TF 고령사회 대응반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민간위원, 국토교통부 인구대응협의체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령자 주거와 복지의 연계, 고령친화 공동체마을 등에 대한 고령친화 건축도시공간 정책연구 전문가이다. 2025.07.10 고영호 건축공간연구원 연구위원·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민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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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기행 고래의 꿈이 흐르는 바다 '장생포문화창고'와 고래고기 장생포의 고래요릿집은 단순히 '고래를 먹는 장소'가 아니다. 여기엔 어떤 '애도와 향수의 정서'가 있다. 사라진 산업, 사라진 생업, 사라진 포경선의 향수를 고기 한 점에 담아 음미하는 행위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과거를 애도하고 회상하는 의례다. 장생포의 고래는 사라졌지만, 고래고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고래의 시간을 씹고, 도시의 기억을 삼키고, 공동체의 내일을 준비한다. 이윤희 방송작가, 로컬문화 전문가 포항 '구룡포'하면 과메기! 울산 '장생포'하면 고래! 수국 축제로 관광객이 절정을 이루던 지난 주말, 로컬100에 이름 올린 장생포문화창고를 찾았다. 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는 고래문화특구라서 가로등, 안내판 눈길 닿는 모든 장식과 조형물에 고래가 유유히 부유하고 있었다. 바다는 알고 있었다. 아니 우리 조상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울산광역시 울주 반구대암각화에 새겨져 있는 고래잡이 그림이나 각지에서 발견되는 고래 뼈, 유물 등으로 미루어 보면 선사시대부터 고래가 모이던 깊은 바다가 이곳 장생포였단 것을. 서해의 조수간만 차가 크게 8~9m에 이른다면 동해 중에서도 수심 깊으면서 조수차가 1m에 불과한 장생포는 염전 조성과 미역 같은 해조류 성장에도 유리했다. 더욱이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교차점에 있으면서 태화강, 삼호강, 회야강 등 크고 작은 강 하류에서 부유물과 플랑크톤이 유입되는 터라 장생포 앞바다에는 새우를 비롯한 작은 물고기들이 들끓었다. 결국 새끼를 낳으려던 고래에게 장생포는 더없이 좋은 보금자리였을 터, 신출귀몰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귀신고래'는 장생포의 단골손님이었다. 고래가 드나드는 깊은 울산 바다는 커다란 선박을 대는데도 쉬웠다. 문화창고에서 바라본 울산 바다.(필자 제공) 어업 성행한 여수에서 돈 자랑 하지 마라더니 장생포에서도 개가 만 원 지폐를 물고 다녔다 할 정도였다. 수출수입품을 실어 나르는 대형 선박이 빼곡했고, 6~7층 규모의 냉동창고도 즐비했다. 1973년 양고기를 가공하던 남양냉동이 들어섰다가 1993년에는 명태, 복어, 킹크랩을 가공하는 세창냉동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0년도 못 돼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아버린 탓에 냉동창고는 주인을 잃었다. 폐허가 된 냉동창고의 문을 새로 연 것은 지자체와 시민이었다. 2016년 건물과 토지를 매입한 울산 남구청은 주민들의 여러 의견을 수렴해 2021년 장생포문화창고를 개관했다. 누구나 무료로 문화를 누릴 수 있는 문화창고는 총 6층 건물에 다양한 체험장과 전시실을 마련했다. 소극장은 물론 녹음실과 연습실을 둬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거점이 되는 것은 물론, 특별전시관과 두 개의 커다란 갤러리, 상설 미디어아트 전시관까지 갖추고 있어. 나 같은 사람은 하루 종일 놀아도 지겹지 않겠다 싶다. 세대별로 즐길 수 있는 이벤트도 다양해 그 어떤 나이대여도 충분히 매력 있는 복합예술공간이다. 2층 체험관은 어린아이들과 가족 단위 방문객을 위한 '에어장생(장생은 여기의 고래 캐릭터다)' 항공 체험(?)은 나이를 잊고 사진 촬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에어장생'을 타고 여행지 도착해서 입국 절차도 밟고, 환영의 즉석 사진 촬영 등 하고 나면 종이 고래 접기, 고래 붙여 바다 만들기 등 놀거리도 많다. 비행기 모형의 에어바운스까지 탈 수 있는 프로그램은 오는 8월 24일까지 계속된다. 체험전시 에어장생의 모습.(필자 제공) 정선, 김홍도, 신윤복,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화폭을 거대한 미디어 아트로 재현한 '조선의 결, 빛의 화폭에 담기다' 전시회는 이 하나만으로도 족하다 싶을 만큼 대만족이다. 정선의 웅장한 산수화, 김홍도의 생동감 넘치는 풍속화, 신윤복의 섬세한 인물화가 붓의 결과 빛을 따라 거대한 미디어 아트로 되살아나는 걸 보니 제법 감동이 일었다.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클림프 같은 서양화 위주의 미디어아트를 보다가 우리의 고요하고 단아한 수묵화와 풍경화를 사계절과 산수화 풍속화의 멋에 맞춰 재구성한 미디어아트를 보니 시민들에게 새로운 감성을 일깨우려 노력한 '고래문화재단(문화창고 위탁 운영)'의 고심이 읽혔다. 수십 년 된 냉동 창고 문을 떼지 않고 그대로 뒀는데, 이 문 너머는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한 갤러리다. 영하 수십도 아래로 내려가던 냉동 창고는 문화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시민의 공공 공간으로 되살아났으니, 이것이야말로 업사이클링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내 마음에 쏙 들어온 것은 2층에서 상설 전시되는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이다. 울산 공업의 역사와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 공간에서 늙으신 내 어머니 아버지는 한참이나 시간을 보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울산석유화학단지는 정유, 석유화학, 자동차, 조선 등 중화학공업이 집약된 대한민국의 산업 심장부로 한강의 기적을 선도했다. 나보다 25~30살 더 나이 먹은 부모 세대들은 울산석유화학단지의 성장을 온몸으로 체험한 동시대 사람들이기에 더 애잔했는지 모른다.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 내 문화창고2층 상설관.(필자 제공) 쉼 없이 굴뚝이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탓에 일본의 '이타이이타이(아야 아야)병'같은 극심한 중금속 중독질환이 울산에도 있었다. 1980년대에 조성된 울산 온산국가산업단지에 제련소, 석유화학공장, 중화학 기업들이 집중됐다. 구리·아연 제련소에서 나온 중금속(납, 카드뮴, 수은 등) 배출로 주민들이 카드뮴과 납에 노출되면서 중금속 중독 증상, 일명 '온산병'을 앓았다. 상주하는 해설사께서 더없이 재밌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니 울산의 근현대 개발사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과거에는 옳았지만, 지금에는 틀린 일들이 더러 있다. 우리는 늘 지난 역사에서 배운다. 선사시대 이후 명맥이 끊긴 장생포 고래 붐이 다시 일어난 것은 백 년도 안 된 일이다. 한반도 연근해는 고래의 황금어장이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포경업에 무심한 동안 연해 어장은 외국 포경선에 개방되고 남획됐다. 우리나라 근대 고래잡이는 일본 해방 후 일본 포경선이 철수하고 나서 그 당시에 고래잡이에 종사하던 사람들에 의해 시작됐다. 1946년 최초 조선포경주식회사가 설립되고 어선 2척으로 고래잡이를 시작했다. 유용한 기름으로 혹은 요긴한 단백질원으로 울산 일대 경제를 지탱하던 고래잡이는 IWC(International Whaling Commission 국제포경위원회)의 결정으로 1986년부터 상업 포경은 전면 금지된다. 100년도 안된 장생포 고래잡이의 영광도 옛이야기가 됐다. 장생포는 長 길 장, 生 날 생, 이름 그대로 긴 생명 '고래'의 땅인가? '고래고기는 장생포에서 먹어야 제맛'이라는 말도 있듯 여전히 이 동네에선 고래고기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고래는 식탁 위에만 남아있는 것이다. 장생포 고래요릿집들 대부분 밍크고래 등 혼획된 고래만을 합법적으로 유통하하고 있지만, 고기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은 맞다. 그러나 장생포가 아니면 언제 밍크고래를 맛보겠나? '희소성과 금지의 역설'은 고래고기를 더욱 욕망의 대상으로 만든다. 메뉴 중 대(大)에 속하는 12만 원 '모둠수육'을 선택한다. 첫 인상은 '고래'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육고기와 닮았다. 삶은 수육과 생회가 어우러진 한 접시는 어찌 이리 알록달록할꼬. 살코기, 껍질, 혀, 창자 염통, 모두 식용 가능한 고래고기는 특히 살코기에 혈색소가 많아 쇠고기보다 더 붉은 색을 띤다. 달달한 설탕과 참기름을 무쳐낸 고래육회는 거의 소와 다름없을 정도다. '一頭百味 일두백미'라고 소 한 마리에서는 100가지 맛이 난다더니 고래 한 마리에서는 최소 12가지 맛이 난다고 전한다. 내가 보기엔 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더 세분화하면 스무 가지 맛 정도는 나지 않을까 싶다. 고래 모둠 수육과 회.(필자 제공) 고래껍질 중에서 턱 아래 쭈글쭈글한 부채꼴 모양의 가슴 부위 '우네'는 대형 고래에서도 소량만 나는 고급 부위다. 가슴을 의미하는 일본어 '무네'에서 유래한 '우네'라는데, 우리의 포경어업 자체가 일본에서 기인한 것이다 보니 부위 이름에도 일본 잔재가 남아있다. '오배기(다섯겹)'는 고래의 배 쪽 기름층과 살코기가 겹겹이 붙어 있는 건데, 정확히 말하자면, 피하지방(기름)과 근육층(살코기)이 층을 이루고 있는 부위로, 고래 특유의 맛과 식감이 가장 극대화되는 고급 부위다. 고래의 피부 아래쪽에 붙은 지방층과 그 아래의 근육층이 함께 절단된 부분이 섞여 있으니 기름의 고소함과 살코기의 쫄깃함이 조화를 이룬다. 부모님은 십수 년 전, 부산에서 비린 고래고기를 먹은 안 좋은 기억이 있기에 처음엔 마뜩잖아하셨으나 이번엔 기우였다. 부위마다, 또 조리법마다 소금, 초고추장, 고추냉이간장 등 다양한 소스에 찍어 먹는 고래고기는 저마다 존재감이 뚜렷했다. 때론 보쌈 같이 부들부들 부드럽고, 다른 부위는 꼬들꼬들한 생 조갯살 같은 식감이 아주 재밌다. 신선하면서 기름기도 적당히 있는 살코기를 철판에 구워 먹으면 소고기 저리 밀쳐낼 정도로 맛나다고 주인이 너스레를 떤다. 장생포의 고래요릿집은 단순히 '고래를 먹는 장소'가 아니다. 여기엔 어떤 '애도와 향수의 정서'가 있다. 사라진 산업, 사라진 생업, 사라진 포경선의 향수를 고기 한 점에 담아 음미하는 행위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과거를 애도하고 회상하는 의례다. 고래로 꿈꾼 어부들, 고래 고기로 단백질을 보충한 6.25 피란민들과 한강의 기적을 일군 산업역군들을 기리는 문화적 지층. 장생포의 고래는 사라졌지만, 고래고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고래의 시간을 씹고, 도시의 기억을 삼키고, 공동체의 내일을 준비한다. ◆ 이윤희 방송작가, 로컬문화 전문가 TV조선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KBS '한식연대기', 넷플릭스 '삼겹살 랩소디', 스카이트래블 '한식기행 - 종부의 손맛' 등 우리 식문화를 소재 삼아 다양한 프로그램을기획하고 집필했다. 방송작가 22년 차지만 언제나 현역~! 지역마다의 고유한 맛과 멋을 알리는 맛깔난 글을 쓰고 싶다. 2025.07.07 이윤희 방송작가, 로컬문화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