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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 신년회 보도 유감

2017.01.16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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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읽을 때 사람들면(피플면)을 챙겨보는 버릇이 있다. 그날의 신문 지면 뒤쪽에 있는 고정면인데 인사이동이나 부고 같은 걸 보려고 펼친다.

얼마 전 한 유력 신문의 사람들면에서 비슷한 모양의 사진 세 장이 나란히 실린 걸 봤다. 제목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동문들의 2017 신년모임’이었다. 공교롭게 한 날에 SKY 대학의 신년회가 열렸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 전날에 열린 Y대 총동문회 주최의 ‘새해인사의 밤’만 실어주자니 미안했던 건지 5~7일이나 지난 다른 두 대학의 신년회 사진까지 같은 크기로 실은 것이다. 나도 오래 신문을 만들어온 사람이지만 이런 ‘특별대접’은 처음 보았다.

장소는 세 대학 다 서울시내 특급호텔 그랜드볼룸. 사진 모양은 한결같다. ‘00대학교 총동문회 신년회’라고 쓴 플래카드 아래 연로하신 남성(어쩌다 한두 명의 여성) 15~20명이 나란히 근엄하게 서서 찍은 딱딱한 인증샷이다.

면면은 뻔하다. 가운데에 총장과 총동문회장이 서고 양 옆으로 화려한 경력의 전현직 정무직 공무원, 국회의원, 법관, 기업 회장, 은행장 등이다. 현직 국회의장도 보였다. 갓 졸업한 기수 대표부터 적어도 수백 명이 참석했을 텐데 그 ‘선발’ 기준이 무얼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대학의 의례적인 신년회 모임이, 그것도 유독 SKY만 골라서 보도할 가치가 있는 걸까. 이 분이 00대학을 졸업했구나, 라는 정보는 줄 수가 있을 것이다.

연초 신문지상의 사람들면에는 이런 사진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냥 신년회만 하기는 좀 뭐한지 ‘올해의 000인 상’ 시상과 곁들여 하는 신년하례회 사진들이다. 아무런 감동도 재미도 없는 이런 사진을 실어주는 건 신문사의 오랜 관행이다. 일종의 ‘성의’이거나 사주와 관련된 게 많다.

그런데 그 대상은 이른바 명문대 위주이다. 대학의 홍보책임자들은 사진을 꼭 실어달라고 신문사에 부탁을 한다. 단과대 같은 경우는 사진까지는 못 실어줘도 단신 기사로 써주는 경우도 많다. 연말에는 주로 명문대학의 상경대 같은 데서 ‘올해의 000상’ 선정을 보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전통 있는 명문 고등학교의 경우도 많다.

단일 직종으로는 고등학교 대학교 언론동문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언론인 상’이 가장 많을 것이다. 그게 기자로서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연공서열식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언론인들 스스로부터 학벌과 학연에 일조하고 있다. 그걸 자기가 만드는 신문 지면에 떡하니 보도한다.

요즘에는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에 이어 최고위과정의 무슨무슨 모임까지 다양하다. 거의 모든 대학들이 최고위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니 사람들면 담당 기자는 연말연시만 되면 사내외를 통해 게재해달라는 민원에 시달린다. 연초에는 거의 20일 정도 이런 동문회 동정이 실린다.

요즘 각 대학들이 최고위과정 수강생을 모집하는 시즌이다. AMP(Advanced Management Program)라고 불리는 최고경영자과정, 최고위과정 모집광고를 자주 본다. 여기는 도무지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동네다.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잘 나가는 사람들, 또는 잘 나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 면면은 기업의 CEO나 고위관료, 정치인, 법조인, 군장성, 언론사 간부, 의사, 예술가, 그리고 요즘에는 꼭 연예인들까지 끼워 넣는다. 골프 핸디를 자격으로 제시한 곳도 있었고 공무원은 2급 이상, 장성은 소장 이상이라고 자격 기준까지 못 박은 대학도 있었다.

수강생의 목적은 뻔하다. 학연으로 얽혀보기와 학벌세탁이다. 한 학기에 500만~1000만 원을 투자하면 더 큰 기대효과가 있다. ‘AMP 쇼핑족’이라는 말도 있다. 자수성가한 고졸 출신 중소기업 사장의 학력이 대학원 수료로 세탁되고 그 대학 동문회원 자격을 갖는다.

한국 사회에서 학연이란 살아가는 데, 사업하는 데, 출세하는 데 참으로 중요하다.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되어야 할 상아탑이 명문대라는 명성에 안주한 채 계층고착화의 역할을 하게 된 지 오래다. 대통령의 출신 대학에 따라 공직사회의 판도가 바뀌는 것을 우리는 여러 번 목도했다. 결혼정보업체들이 출신 대학별로 미혼남녀의 등급을 정하는 기준이 있다는 건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다.  

여러 언론이 신년기획으로 공교롭게도 ‘리셋코리아’라는 같은 제목을 들고 나왔다. 한국 사회의 판을 바꾸자는 것이다. 작금의 정치 경제 사회 위기를 그대로 두면 대한민국호가 여기서 침몰하고 말 거라는 우려다. 그 우려의 진앙으로 지적된 계층이 바로 지금까지 한국을 이끌어온 정관계 법조계 소수 엘리트와 경제적 파워 그룹이다. 

엘리트층과 함께 개혁의 대상으로 포함된 게 대학이었다. 우리나라 대학이 이런 상태로 가다가는 한국의 미래가 어두울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수능을 없애 대학이 자율적으로 학생을 선발하게 하고, 여건이 어렵지만 가능성이 보이는 다양한 자질을 갖춘 젊은이들에게 획기적으로 문을 열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공지능(AI)과 첨단 융복합 기술을 기반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의 주역은 결코 제도권 교육의 틀 안에서 학연을 중심으로 공고하게 맺어진 소수 엘리트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 어느 전문가의 글도 읽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잘 알고 있는 언론이 SKY의 신년회 사진을, 그것도 한참이나 지난 행사를 포함해 세 장이나 나란히 실은 것에 대해 나는 기분이 언짢았다. 아마 많은 이들이 나 같은 기분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학벌사회에 일조하는 언론의 그런 관행이 이제는 사라졌으면 좋겠다. 기자들부터 SKY 출신이 많겠지만, 대학교 이름에 의식적으로 초연한 자세를 가져주면 좋겠다. 고위공무원단의 출신 대학별 현황이나, 고교별 서울대 합격 현황 같은 것을 단독기사라고 포장해 크게 보도하는 것도 정보적 가치는 있겠지만 한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걸 읽고 희망과 용기를 접거나 자신의 수저색깔을 자조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저 고등학교, 이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내 장래가 별로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것만큼 힘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언론도 분명한 엘리트 계층이다. 알게 모르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 언론도 학벌사회를 방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기봉

◆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며, 국민대 언론정보학부에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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