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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시가 된 노래, 노래가 된 시] ⑩ ‘시인과 촌장’ 하덕규의 <가시나무>

2022.01.18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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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수많은 한국 대중가요 노랫말 중에서 단 한 구절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사랑은 눈물의 씨앗’(나훈아)과 함께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를 말하고 싶다.

앞엣것이 사랑의 속성을 통속적 표현으로 가장 잘 설파했다면, 뒤엣것은 존재의 비애와 인간의 중층적 자아를 문학적 수사로 고백한 보석 같은 한 줄이다.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한 편의 서정시 이상인 이런 노랫말이 있다는 건 한국 대중가요계가 얻은 축복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아직도 2000년 조성모의 노래로 알고 있는 ‘가시나무’는 듀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그 12년 전인 1988년에 쓰고 만들고 부른 노래다. 양희은에게 만들어준 고독과 초월의 절창 ‘한계령’ 3년 후다(앞 편 참조).

‘가시나무’는 ‘시인과 촌장’의 3집 <숲>의 타이틀곡이지만 멤버 함춘호 없이 하덕규 혼자 작업했다. 앨범 표지도 직접 그렸다(하덕규는 대학서 그림을 전공했다). 담백한 피아노 연주에 목소리를 얹은, 음악적으로 매우 절제된 이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중 하나로 꼽힌다. 노랫말은 시인들이 뽑은 열 번째 손가락 안에 든다.

1988년 발표한 ‘시인과 촌장’의 3집 앨범 ‘숲’의 앞(왼쪽)과 뒤. ‘가시나무’가 타이틀 곡이다. 앨범 재킷은 하덕규가 직접 그렸다.
1988년 발표한 ‘시인과 촌장’의 3집 앨범 ‘숲’의 앞(왼쪽)과 뒤. ‘가시나무’가 타이틀 곡이다. 앨범 재킷은 하덕규가 직접 그렸다.

이 노래는 사실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 기독교대중음악)이다. 인간의 존재 의미와 내면 속 혼돈에 대한 하덕규의 종교적 성찰이자 참회다.

내 안의 헛된 바람, 내 안의 어쩔 수 없는 어둠,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을 가시나무 숲으로 비유했다. 그것들은 바람만 불어도 서로 부대끼며 울어댄다. 그래서 쉴 곳을 찾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게 한다. 그런 내 안에 누구든 쉴 곳은 없다.

노래 속 ‘당신’은 누구일까. 노래는 그를 특정하지 않는다. 듣는 이마다 생각하는 당신이 바로 당신일 것이다. 사랑하지만 내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성이면 어떠랴.

하덕규의 당신은 ‘절대자’다. 하덕규는 앨범 재킷의 글에서 그렇게 고백했다. ‘내 속의 수많은 나’는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참회의 간증이다.
 
이 노래는 전작 ‘한계령’에 빚졌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부딪침, 술과 대마초, 어디 기댈 곳 없는 방황 끝에 떨어져 죽을 마음으로 고향 근처 한계령에 오른 20대 청춘 하덕규는 산에서 죽음 대신 영감을 얻는다. 산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산은 잊어라, 울지 마라, 내려가라고 그의 지친 등을 떠밀었다.

하산한 그의 고백이 바로 ‘가시나무’다. 그러니 방황이 없었더라면 이 노래는 없었다.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그는 구원을 받았으나, 우리는 동시대 탁월한 시적 감성을 지닌 싱어송라이터요, 출중하고 독보적인 포크 뮤지션인 하덕규를 잃었다. 그는 이후 종교에 몸을 완전 의탁하고 음악 창작의 문을 닫았다. 그의 방황이 더 길었더라면, 그의 깨달음이 늦게 왔다면, 뮤지션으로서의 하덕규는 더 이름을 떨쳤을지 모르고, 우리는 대중가요사에 빛날 더 많은 그의 노래를 얻었을지 모른다.

그의 간증에 따르면 이 노래는 한계령을 내려온 후 어느 날 누나에게 이끌려 간 송구영신 예배에서 탄생했다.

그는 그 예배에서 가시나무 숲 속을 헤매는 수많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욕심과 욕망이 가득하고, 날카로운 가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상처를 주고, 어둠과 슬픔과 우울이 가득한 ‘너무도 많은 내’가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 가시나무 덩굴 가운데 피 흘리는 예수의 형상이 보였다. 그는 무언가에 이끌려 곧장 곡을 쓰기 시작했고 10분 만에 완성했다.  외롭고 곤고한 영혼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하나님이 주신 노래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분이 내 안에 오셔서 가시나무와 같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내 가시에 찔리면서 가시를 뽑아주시고 끝까지 품어주셨다.”

하덕규의 영혼은 사나운 가시나무 숲이요, 하나님은 피 흘리는 가시나무새로 온 것이다. 예수의 ‘대속(代贖)’이다. 하덕규는 그 후 신앙인, 찬양사역자의 삶을 살게 된다.

가시나무새는 전설의 새다. 평생 가시나무를 찾아 헤매다 스스로 찔려 단 한 번 소리 높여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죽는다는 새로 아일랜드 켈트족의 전설에 나온다.

호주 출신의 신경과학자이자 세계적 여류작가인 콜린 매컬로(1937~2015)가 1977년 발표한 소설 제목(‘The Thorn Birds’)으로 유명해졌다. 가톨릭 사제와 한 여성과의 금지된 사랑과 고뇌를 소재로 삼은 이 소설은 세계적 인기를 끌어 3,000만 부나 팔렸다.

미국에서는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져 골든글로브상 4개 부문을 휩쓸었고 국내에서도 2011년 KBS 드라마(한혜진, 주상욱 주연) 제목으로 쓰였다. 신화에 나오는 가상의 새이지만 묘하게 은유를 품은 매력적인 소재라서 문화예술 작품에 자주 차용된다.

전설 속의 가시나무새 이미지.
전설 속의 가시나무새 이미지.

죽을 때 단 한 번 아름답게 우는 새, 찔려 죽을 줄 알면서도 가시를 찾아 헤매는 새. 가시나무새가 정녕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하덕규의 ‘가시나무’에 가장 큰 빚을 진 이는 조성모다. 뉴 밀레니엄이 시작된 2000년 데뷔 2년 차 가수 조성모는 80년대 명곡들을 리메이크한 앨범 ‘클래식(Classic)’을 내면서 타이틀곡으로 이 노래를 실었다. 이 음반은 200만 장이 팔리는 기록적 대박을 치며 ‘발라드의 황태자’ 시대를 열었다.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도 유명했다. 노랫말의 메시지와는 사뭇 다른, 당대의 스타 이영애와 김석훈이 출연하고 일본 조폭이 등장하는, 일본의 눈밭에서 찍은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다. 한 편의 영화처럼 제작돼 뮤직비디오의 문법을 깼다. 그래서 ‘가시나무’하면 아직도 조성모의 얼굴을 지울 수가 없다. 그 후 이은미, 자우림 등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했으나 원곡을 따라잡긴 어려웠다.

한계령이 보이는 홍천에서 태어난 하덕규(64)는 천성적 기질이 예술가였다. 학창시절부터 시인과 화가를 꿈꾸었던 그는 한 카페의 아마추어 노래 경연에서 우승한 걸 계기로 노래하는 음유시인이 되었다. 1981년 결성한 포크듀오 ‘시인과 촌장’(1기 오종수, 2기 함춘호) 이름은 30년 연상의 소설가 김동리와 결혼한 소설가 서영은의 단편소설 ‘시인(詩人)과 촌장’에서 따왔다. 하지만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닌 ‘도시 사람’이란 의미로 ‘市人과 촌장’이라고 했다. 그는 오랜 공백 끝에 2019년 첫 CCM 앨범 ‘Thanks’를 발매했다.

‘가시나무’로 삶을 선회한 하덕규는 44세에 암에도 걸렸으나 미국에서 종교학을 공부하고 52세인 2010년 워싱턴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지금은 기독교계 대학인 백석예술대 교회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하며 간증과 노래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2021년 4월에 KBS ‘불후의 명곡-시인과 촌장 하덕규 편’에 ‘전설’로 출연했는데 23년 만의 방송 출연이었다.

하덕규는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며 가수의 길을 접었다. 지난해 4월, 23년 만에 방송에 출연했다. KBS TV ‘불후의 명곡’에 나와 후배 가수들의 노래를 듣는 하덕규. (사진=TV캡처)
하덕규는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며 가수의 길을 접었다. 지난해 4월, 23년 만에 방송에 출연했다. KBS TV ‘불후의 명곡’에 나와 후배 가수들의 노래를 듣는 하덕규. (사진=TV캡처)

이 프로그램에서 박기영이 ‘가시나무’를 불렀다. 순백의 드레스 차림에 청아한 고음으로 영혼을 헤집는 박기영의 노래를 하덕규는 말없이 지긋이 들었다. 방황과 증오와 갈등의 가시로 가득 찼던 청춘은 이제 그 가시가 다 뽑혔다. 중후하고 편안하고 인자한 중년이었다. 이제 그 안에는 ‘너무 많은 내’가 없겠다.

한기봉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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