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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의 담론에서 기회의 담론으로 “Malaysia Boleh!”
[정길화의 한류 돋보기] 말레이시아 영화산업, K-콘텐츠에 길을 묻다
다른 나라에게 이룰 수 없는 기적은 아닐
것이다. 열강이 할거하던 시대에 압제를 겪은
나라에서도 자력으로 이룬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해 문화적인 매력국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한국이 할 수 있는 세계사적인
역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지난 5월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말레이시아 국립영화개발위원회(FINAS)가 주관한 ‘K-콘텐츠 포럼’이 열렸다. 말레이시아 국립영화개발위원회는 한국 콘텐츠산업 전문가들을 초청해 자국의 동종업계 인력들과 상호간에 경험과 지식을 토의하고 공유하려는 뜻으로 이 행사를 기획했다. 말레이시아 콘텐츠산업을 진흥하는 정부기관이 이와 같은 국제 포럼을 자체 예산으로 주최했다는 것에서 한류의 위상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 코피스) 원장으로 재직하던 당시에 초청을 받았는데, 일정상 이임 직후에 이 행사에 참가하게 되었다. 말레이시아 주최 측은 짧은 시간에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룬 한국의 콘텐츠산업을 벤치마킹하고, 이를 토대로 자국의 유관 산업을 육성하려는 분명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행사에는 국내의 한류·콘텐츠 전문가 모임인 K-콘텐츠 아카데미 포럼(KOCAF)이 공동주최자로 참가했다.
이 행사에서 ‘한국 영상산업의 세계적 성공 요인’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포럼에서의 발제는 모름지기 시간, 장소, 목적 등 때와 장소에 맞게 잘 어우러져야 한다. 최근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발표한 ‘2023 해외한류실태조사’에서 ‘한류현황지수’ 3.5 이상이면 한류대중화 단계로 평가하는데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대만, UAE 5개국이 ‘한류 대중화단계’로 나타났다. 이들 국가는 한류와 K콘텐츠 산업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처음부터 한류에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2000년대 초기에 말레이시아에서는 자국 문화와 전통 보호의 관점에서 한류에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가령 현지에서 열린 일부 K-팝 콘서트에 대해 말레이시아 언론에서 이슬람의 종교적 규범과 문화적 가치와 충돌한다는 보도를 하면서 일방적인 한류의 유입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외래문화에 대한 경계와 한류의 상업주의에 대한 복합적인 우려로 보인다.
이와 같은 ‘자국문화 보호론’의 시각은 2020년을 전후로 분위기가 바뀌게 된다. ‘말레이시아의 K-드라마 수용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배기형 KBS PD(문화콘텐츠학 박사)에 따르면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OTT의 등장으로 한국 드라마를 쉽사리 접할 수 있었고 또 K-콘텐츠산업이 거두는 성공 사례를 보면서 ‘침략의 담론’에서 ‘기회의 담론’으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요컨대 산업적 경제적 측면에서 K-콘텐츠를 모델로 삼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정황을 알게 된 필자는 이날 말레이시아의 영화배우 피람리(P.Ramlee, 1929~1973)에 대해 발표를 시작했다. 그는 말레이시아 영화사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가수, 작곡가, 배우 겸 감독이다. 그는 28세 때인 1957년에 <나의 아들 사잘리>로 제4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59년에는 연출작 <노총각 전사>로 아시아 희극상을 수상했다. 그의 20대 시절은 말레이시아 영화계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일찍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후보작에도 올랐다.
한국 영화계는 1957년을 특별히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다. 피람리가 최고 남자배우상을 수상한 이 영화제에서 <시집가는 날>(김응천 감독)이 특별희극상을 받았다. 우리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효시라고 한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1950년대 한국 영화계는 “제작편수가 증가하고, 대규모 촬영소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영화제작 시스템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최초의 여성감독이 등장했으며 한국의 할리우드라고 불린 충무로가 형성된 것도 이 시기다.
발제에서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적어도 1950년대에는 한국과 말레이시아의 영화산업 혹은 대중문화는 비슷하거나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말레이시아 영화계가 한국보다 앞섰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1945년에서 1975년까지는 말레이시아의 영화 산업 고도성장기로 황금기라고 한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과 말레이시아의 영상산업은 다른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특히 지난 30년간은 한류와 K-콘텐츠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다.
이번 포럼에서 말레이시아 영상산업 관계자들에게 자신감과 성취동기를 부여하고자 했다. 한류의 성공은 놀라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게 이룰 수 없는 기적은 아닐 것이다. 열강이 할거하던 시대에 압제를 겪은 나라에서도 자력으로 이룬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해 문화적인 매력국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한국이 할 수 있는 세계사적인 역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이날 발표의 마무리는 다음과 같았다. 말레이시아 영화에도 충분한 기회와 시간이 있다.
“Malaysia Boleh!(말레이시아는 할 수 있다)”
◆ 정길화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원장
MBC 교양PD로 ‘인간시대’, ‘PD수첩’ 등의 프로그램 연출을 맡았다. ‘중남미 한류 팬덤 연구’로 언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MBC중남미지사장 겸 특파원을 거쳐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으로 재임 중이며 K-콘텐츠와 한류정책 연구를 통해 ‘공감 한류’ 전파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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