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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균형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와 60년 전 경부고속도로

2026.07.10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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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격차는 시장에 맡기면 심화될 뿐이므로,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같은 첨단산업의 전략적 지역 배치가 필요하다. 경부고속도로처럼 기존 타당성 논리를 넘는 결단과 임무지향 산업정책, 그리고 갈라치기가 아닌 조율의 협력적 거버넌스로 균형발전을 이뤄야 한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1966년 12월, 세계은행(IBRD)의 한국교통조사 보고서를 종종 살펴본다. 당시 교통정책의 중심은 철도였다. 보고서는 한국의 교통 투자를 대폭 늘리고 도로의 비중을 키우라고 권고하면서도, 서울과 부산을 잇는 4차선 고속도로에는 '경제적으로 시기상조'라는 딱지를 붙였다. 포장도로가 전체 도로의 6%에 못 미치고 트럭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절이었으니, 간선 고속도로보다 지역 간 도로망과 차량 확충이 먼저라는 논리였다. 박정희 정권은 듣지 않았다. 경부고속도로는 막대한 인부, 엔지니어로도 부족해 군인까지 동원한 돌관공사로 뚫렸고, 결과적으로 경부축은 후발공업국의 추격 과업을 완성하는 고도성장의 척추가 되었다.

성공에는 이면이 있다. 경부축, 그리고 포항에서 거제에 이르는 남동임해공업지역과 호남의 여수·광양 같은 임해 거점에 투자와 교통 인프라가 집중되는 동안 호남 내륙과 강원은 50년간 구조적 저발전 상태에 놓였다. 산업단지와 대학, 청년 일자리가 경부축을 따라 수도권과 영남에서 재생산되는 동안 나머지 지역은 인구 유출과 산업 공백이 맞물리는 악순환을 겪어 왔다. 지난번 글에서 밝힌 것처럼 21세기 공간분업의 전개 속에서 첨단산업의 수도권 집중은 대구경북과 동남권마저 순서대로 배제했다. 2023년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선정처럼 시장의 선호에 모든 것을 맡기다 보면, 지역 격차는 좁혀지는 방향보다는 벌어지는 방향으로 가기 마련이었다. 지방소멸이 균형발전의 과제를 넘어 국가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는 인식은 이제 정파를 가리지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6월 29일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 이래 거듭 밝히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호남 투자가 많아 보여도 "역사적으로 누적된 투자량을 비교한다면 조족지혈"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논쟁은 1966년 경부고속도로,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 때의 논쟁과 닮은 데가 있다. 그때도 기존 타당성 검토의 문법으로는 무모하다는 반론이 무성했다. 검토의 틀을 바꾸지 말라며 '왜 호남인가'를 묻는 목소리가 닮았고, 이번에는 대구·경북 등 소외되는 지역이 호명되는 구도도 닮았다. 소수 대기업에 특혜를 준다는 말이 글로벌 1등 기업에게 정부가 압력을 넣는 게 아니냐는 논란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2026년의 한국에 필요한 것, 그리고 작동되고 있는 것은 민주적으로 시행하되 가능한 한 빠른 의사결정을 해내는 협력적 거버넌스다. 이견은 충분히 검토하되, 결정이 내려지면 집행은 신속해야 한다. 7월 1일 출범한 전남광주통합특별시는 1호 조례로 반도체 전략투자 지원 조례를 통과시켰고, 정부 통합지원금 20조 원을 필요하면 전액 반도체 기반 조성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행정통합의 결실을 미래 산업에 걸겠다는, 지역의 일치단결과 중앙정부와의 협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청와대는 6일 '3대 메가 프로젝트' 중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사업과 관련해 광주 군 공항 부지에 산단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이날 광주 군 공항 일원에서 제1전투 비행단 훈련기가 하늘을 나는 모습. 2026.7.6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청와대는 6일 '3대 메가 프로젝트' 중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사업과 관련해 광주 군 공항 부지에 산단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이날 광주 군 공항 일원에서 제1전투 비행단 훈련기가 하늘을 나는 모습. 2026.7.6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역사에는 조율의 선례도 있다. 호남 푸대접론이 들끓던 1966년, 정부는 제2정유공장 입지로 여수를 택했다. 지역 간 균형이 고려된 결정이었고, 이 공장은 훗날 여천석유화학단지의 모태가 되었다. 정치적 압력이 경제 논리를 훼손한 것이 아니라, 입지의 균형을 잡는 조율로 작동한 사례다. 첨단산업의 입지 역시 마찬가지다. 반도체, 인공지능, 재생에너지 같은 신산업 자산을 적절한 수준에서 분배하고 조율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사불란할 필요는 없지만, 일이 되는 쪽으로 중지를 모으는 게 현명한 일이다.

구조화된 불균등을 바로잡는 데 기계적인 1/N 지역별 배분은 답이 아니다. 불균등 시정을 위한 집중 투자도 검토할 수 있다. 시장에 맡겨둔 결과가 '창조적 파괴'가 아닌 '경로의존'의 심화라면 정부의 현명한 조치가 필요하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마리아나 마추카토의 임무지향 산업정책이 힘을 얻는 시대다. 미국도 유럽도 반도체와 에너지를 놓고 산업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지역균형발전만큼 선명한 임무는 드물고, 전력망과 용수, 인재 양성처럼 정부가 깔아야 할 판도 명확하다. 반도체, 피지컬 AI, 재생에너지 클러스터링과 새로운 에너지 믹스라는 경기는 이제 1회초다. 승부를 가르는 것은 꾸준한 집중력의 유지다. 60년 전에는 없던 민주주의와 지방자치, 축적된 전문성이 우리에게는 있다. 갈라치기가 아니라 조율로 승부하는 정치력, 그리고 전문가와 시민사회의 중지를 모을 때다.


양승훈

◆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정치학, 문화인류학을 거쳐 공학 박사(과학기술정책 전공)를 받았다. 제조업, 엔지니어, 산업 생태계에 대해서 현장 연구를 수행 중이다. 저서로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2019),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202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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