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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출신 영국의 미술 사학자인 곰브리치(Sir Ernst Gombrich)경은 “미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가 존재할 뿐이다”고 말했다.
다소 도발적이면서도 철학적인 곰브리치의 말을 인용해보면 “음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음악가가 존재할 뿐이다”로 바꿔 말할 수도 있겠다. 결국 “예술이란 그 시대의 규범과 맞서며 발전해오고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미술이 될 수 있고, 음악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새로운 사고 확장으로의 탐험은 항상 기존 틀의 저항과 관념으로부터의 탈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겠다.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nberg)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기존의 전통적인 선입관의 편견을 깨고 자신들의 확고한 예술세계를 확립했다.
그것은 저항을 이겨내야 하는 단단함과 예술적 상상력을 체계화시켜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 포함돼 있다.
동료로서 서로의 예술세계를 통해 발전하고 영감을 받은 쇤베르크와 칸딘스키는 청각의 시각화·시각의 청각화를 통해 새로운 사고의 확장을 보여주었는데, 그들이 추구한 예술세계에서 음악과 회화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 20세기 초
아이작 뉴튼의 물리학 법칙들은 18세기 이후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냈다. 그의 업적인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제2법칙인 ‘가속도의 법칙(F=ma)’은 현재도 물리학의 중요한 공식이다.
그가 주장한 시공간의 절대적 개념은 물리학을 떠나 서양의 기계적 세계관으로 발전해 근대 사상과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20세기 초 서양의 세계관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대표적인 이론인 상대성이론은 뉴턴이 주창한 고전역학의 절대적인 시공간 개념을 깨뜨리는 데에서 출발한다. 기존에 굳건하다고 믿었던 생각과 관념들이 뒤집히는 순간이 온 것이다.
오스트리아 출신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 역시 그 동안 클래식음악이 전통적으로 고수해오던 화성과 음악적 법칙 등을 깨뜨리기 시작한 첫 번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대 신고전주의를 표방한 스트라빈스키와는 달리 쇤베르크의 음악은 지금도 편하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마치 100여년전 상대성이론이 나왔지만 여전히 이론에 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이 드문 것과 비슷하다.
그의 작곡기법은 한 옥타브 안의 12개의 음(흰 건반7개, 검은 건반 5개)에 동등한 자격을 주어 일정한 순서로 배열해가면서 악곡을 구성해 나아가는 방식이다. 지금의 작곡가들에게는 상식적인 기법이 되었지만 당시로는 굉장히 파격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쇤베르크의 실험적인 음악은 당시 평론가와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는데, 그 중 한 아마추어 음악가에게는 흥미를 끌었다. 1911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쇤베르크의 연주회에서 그의 음악을 듣고 자신의 예술적 방향을 찾은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화가 ‘칸딘스키’였다.
◆ 소리와 색채
칸딘스키는 첼로와 피아노를 수준급으로 다룰 줄 알았던 아마추어 음악가였다. 쇤베르크의 음악회에서 들은 낯선 화음들은 칸딘스키의 회화구상에 영감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불협화음이었다.
불협화음은 고전음악에 익숙하던 이에게 불편함을 주었던 것이 분명 하지만 이는 사실 익숙함과 익숙하지 않음의 차이에서 온 것이라고 쇤베르크는 생각했다.
전통적인 화성학에서 불협화음은 곡의 긴장이나 마무리를 해결하기 위한 요소로 사용하지만 쇤베르크는 모든 음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해 음악을 구성했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추상에 쇤베르크의 이런 구성적인 요소를 대입했는데, 바로 소리에서 받은 영감을 기하학적인 모형과 색채로 변형한 것이다.
사실 음악을 회화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19세기 후반 클링거(Max Klinger) 등 몇몇 예술가들을 의해 시도되었지만 고전주의의 틀을 깨진 못했다.
하지만 칸딘스키는 자신만의 공감각적 능력을 활용해 음악 속에서 느껴지는 색채감을 통해 음악도 회화가 될 수 있고 회화도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회화에는 몇 가지 자신만의 법칙이 있었는데 예를 들자면 동그라미는 파랑, 세모는 노랑, 네모는 빨강 등 도형을 색채화시킨 다음 색의 채도에 따라 밝은 파랑은 플루트, 어두운 파랑은 첼로, 노랑은 트럼펫이나 고음의 금관악기로 묘사한다.
또 같은 악기여도 녹색은 안정적이고 온화한 바이올린이고, 밝은 빨강은 가볍고 경쾌하며 맑은소리의 바이올린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검정색은 완전히 끝난 휴식, 회색은 숨표 또는 무음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칸딘스키는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해 작품을 발전시켜 나갔는데 이는 청각과 시각을 자신만의 회화적 문법으로 표현한 첫 번째 화가로 볼 수 있다.
그의 점, 선, 면, 색채에서는 다양한 악기와 음악이 연주되고 있는데 그의 대표작인 구성(Composition) 시리즈는 칸딘스키의 눈으로 보는 음악을 잘 표현해 준다고 볼 수 있다.
◆ 생각의 탄생 : 유추와 연상
창조적 사고에 대해 설명할 때 유추와 연상은 핵심 사고과정이며 가장 중요한 지적 기술 중 하나라고 많은 과학자들이 주장한다.
뉴튼과 다윈의 이론에도, 양자론에도 유추와 연상은 핵심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사고과정인데 이런 유추를 통한 연상작용은 예술가에게도 창조를 위한 필연적인 지적 과정이다.
피카소의 입체파 회화는 이집트의 벽화에서 유추되었고,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은 피보나치 수열에서 유추되었으며 칸딘스키도 음악적 유추를 통해 색채와 기하학적 모형을 연상했다.
쇤베르크의 대표적인 현악 6중주곡인 <정화된 밤(Verklarte Nacht)>이나 <달에 홀린 삐에로(Pierrot Lunaire)>는 그의 문학적 상상력이 음악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데, 두 작품 모두 연작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작품은 시에서 나타나는 음률과 감정선을 자신만의 음악적 기법을 통해 유추 연상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후기낭만파적 성향도 드러나있는 <정화된 밤>과는 달리 <달에 홀린 삐에로>는 소프라노가 내레이터가 되어 낭송조의 창법으로 다른 7개의 악기들과 융화되어 획기적이며 기이하고 모호한 성격의 곡을 창조했다.
그의 작품을 두고 비평가였던 알프레드 커 (Alfred Kerr)는 “음악의 끝이 아니라 듣는 방식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칸딘스키 회화의 영감은 ‘즉흥(improvisation)’, ‘인상(impression)’, ‘구성(composition)’으로부터 나왔는데 그 중 <인상 시리즈3>은 쇤베르크의 음악회에 다녀온 후 완성됐다.
작품은 청각으로 받은 인상을 시각화했는데 검은색 굵은 곡선은 그랜드 피아노를 연상시킨다. 또한 얇은 검은색들은 청중들을, 여러 색채들은 그가 음악에서 받은 음색의 느낌을 화폭으로 옮긴 것이다.
유추와 연상을 통한 두 예술가의 작품은 그것(유추와 연상)이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생각의 도구로서 창조적 사고를 위한 필수조건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원 속의 원(Circles in a circle)
1923년작 <원 속의 원(Circles in a circle)>은 칸딘스키의 대표작으로 큰 원 속에 작은 여러개의 원들이 조화로우면서 각각의 색채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마치 쇤베르크의 불협화음을 포함한 음들이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음악의 궁극적 목적은 조화이고 조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칸딘스키는 쇤베르크가 집필한 화음이론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소개할 정도로 그의 음악을 존중했고, 쇤베르크도 칸딘스키와 예술적 아이디어를 공유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비록 둘 사이의 관계는 반유대주의 발언을 했던 칸딘스키가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하며 시오니즘에 경도돼있던 쇤베르크의 해명요구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서 소원해졌지만 말이다.
쇤베르크는 자신의 음악이 대중적으로 이해 받지 못하고 힘들 때 화가로 전업을 생각했으며 칸딘스키 역시 어린 시절 음악가가 꿈이었다. 화가가 되고자 한 음악가와 음악가가 되고자 한 화가, 두 아방가르드(avant-garde) 예술가가 이루고자 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통합적이고 융합적인 사고인 통섭이 아닐까? 미국의 생리학자 로버트 루트번스타인(Robert Root Bernstein)은 “다양한 것에 대한 관심은 예술가나 모든 혁신가들에게 유추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두 예술가는 통섭적 사고를 통해 예술, 아니 더 나가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조화(harmony)’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 추천음반
쇤베르크의 음악을 처음 접한 건 거장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와 함께 연주한 <펠리아스와 멜리장드(Pelleas und Melisande)>에서였다.
당시에는 처음 접해보는 난해한 음악이었지만 멋들어진 선율과 황홀한 분위기는 그의 후기음악보다 휠씬 편하게 감상하실 수 있을 듯 한데, 불레즈의 이지적인 연주를 추천한다. 아바도(Abbado)의 열정적인 연주 또한 좋다.
<정화된 밤(Verklarte Nacht)>은 야니네 얀센(Janine Jansen)이 동료들과 함께 데카(DECCA)에서 발매한 음반으로, 오케스트라버전은 빈 필하모닉의 연주로 추천 드린다.
끝으로 <달에 홀린 삐에로(Pierrot lunaire)>는 사이먼 래틀(Sir Simon Rattle)의 1977년도 음반녹음을 추천하겠다.
◆ 김상균 바이올리니스트
서울대 음대 재학 중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비엔나 국립음대와 클리블랜드 음악원 최고연주자과정 최우수 졸업. 이 후 Memphis 심포니, Chicago civic오케스트라, Ohio필하모닉 악장 등을 역임하고 London 심포니, Royal Flemisch 심포니 오디션선발 및 국내외 악장, 솔리스트, 챔버연주자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eigenarti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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