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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으로 의식 지배, 해독주는 것이 일제문화잔재"
정치적 목적 갖고 일관된 의도 아래 장기간 구축
[기고]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조세열(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
일제잔재란 일본제국주의가 식민통치 기간에 우리 땅에 남겨놓은 모든 형태의 부정적 유산을 말한다. 일제잔재는 신사나 황국신민서사탑 등 건축조형물 형태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무형의 형태로 존재하며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면서 사회에 해독을 끼치고 있는 요소들이다. 여기에서 흔히 혼돈하는 바와 같이 왜색이라고 해서 반드시 일제잔재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일반적 인식과 달리 일제잔재와 왜색은 분간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색은 일본풍 일본양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시기를 불문하고 일본의 영향이 짙게 밴 문화경향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저급한 왜색문화도 경계의 대상이긴 하지만 명백히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될 사안인 것이다.
서이면 사무소. 일제 시대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일제강점기에 뿌리내린 일제잔재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일관된 의도 아래 장기간에 걸쳐 구축된 식민지배구조의 유제란 점에서 왜색문화와 차별성을 갖는다. 일제는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조선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각 부문은 물론 민중의 삶 깊숙이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논리를 주입시키고 이를 구조화하고자 기도했다. 일제는 우민화정책을 추진 노예의식과 패배주의를 만연시킴으로써 민족자존의 의지를 원천 봉쇄했으며 폭압적인 관료제와 권위주의적인 법령체계를 채택하고 헌병ㆍ경찰 통치를 통해 조선 민중을 순응시키고자 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식민지 권력과 결탁한 매판자본을 제한적으로 육성하고 수탈구조를 체계화시켰다. 사회면에서는 사회관계를 학연ㆍ지연ㆍ혈연 단위로 분산해 분리ㆍ지배했다. 문화면에서는 감상적 허무주의 정서를 조장해 사회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고 현실도피에 빠지게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조선민중을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것은 물론, 만주지배 등에 첨병으로 악용하여 2등 신민으로서 아류제국주의의 망상에 빠지게 하였으며, 침략 피해국들의 민족적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종국에는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여 아예 민족의 언어와 문화 나아가 민족 자체의 말살을 기도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해방 이후에도 일제잔재 청산에 실패함으로써 일제강점기에 구축된 인적 물적 토대를 허물지 못하고 반민족적 반민주적 지배구조를 온전히 유지하고 말았다. 친일 인맥은 각계에서 주류로 행세하면서 과거 청산을 저지 방해하고 일제 잔재를 존속시키는 주요인으로 기능하여 왔다.
일제잔재 중 가장 구조적이면서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큰 분야가 법과 제도 의식 등 관념체계 속에 남아 있는 식민 유제들이다.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사상과 양심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획일적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도구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 시행된 각종의 국가주의적 시책은 사실상 식민지 지배정책을 답습한 결과였다. ‘황국신민의 서사’와 ‘교육칙어’를 모방한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민교육헌장’, 주민통제를 목적으로 한 반상회나 치안유지에 관한 여러 법들이 바로 그것이다. 10월 유신은 식민지 지배구조의 재현이었으며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총화였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사회 곳곳에 남아 있던 일제잔재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60년 동안 과거 청산이 미루어지고 식민유제들이 방치되거나 오히려 활용됨으로써 일제잔재라는 독소는 여전히 위력을 보이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식민유제 이외에도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문화적 잔재는 우리의 생활 주변에 널려 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교육계의 각종 의례나 제도 교과내용 등은 황국신민을 양성하던 획일적인 식민지교육체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소록도에 남아있는 신사(왼쪽)와 경주에 있는 일본 사찰(오른쪽). |
문화예술계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도 결코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다. 국가 주도 관 주도의 각종 문화행사나 서열주의 도제관계 등은 창의적인 발상을 가로막아 궁극적으로 문화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또 일제강점기에 스며든 다양한 형태의 문화예술 양식이 아무런 문제제기도 없는 가운데 마치 우리 고유의 것인 양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고 변형된 우리의 유·무형 문화유산에서 일제잔재를 씻어내고 원형을 복원하는 일도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일상 속의 언어와 전문분야의 용어·서식에도 일제잔재가 남아 있으며 놀이문화·풍속·지명 등에서도 쉽게 식민지시대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군대나 체육계에 일상화되어 있는 기합과 구타도 그 뿌리가 군국주의 일본의 황군에서 비롯됐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생활 전반에 걸쳐있는 문화잔재는 어떻게 청산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일제의 영향 특히 파시즘적 독소를 지닌 법이나 제도ㆍ의례ㆍ용어ㆍ관행 등은 그 부정적 측면을 고려해서 빠른 시일 내에 철폐하거나 개선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기세가 죽지 않은 획일주의 전체주의 이런 따위들은 민주사회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의 역사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역사바로세우기가 철거와 같은 흔적 지우기로 갈 때, 우리는 또 다른 역사말살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된다.
최근까지 전국에 산재한 식민통치 유적은 아무런 통제 없이 파괴 멸실되고 있다. 건축문화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축물은 마땅히 보존되어야 하며, 신사나 보국탑ㆍ내선일체탑ㆍ황국신민서사탑 등 조형물들은 치욕의 시대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세한 내력을 담은 표석을 설치하고 기억과 책임의 근거로 삼아야한다. 부득이한 경우일지라도 박물관이나 자료관으로 옮겨 교육자료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규모 있는 일제강점기 군 관련 건축물이나 관공서·은행·농장관리소 등은 침략사나 수탈사자료관으로 활용하면 보존과 반성 양 측면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35년간에 걸친 세계사상 유례를 보기 힘든 가혹한 식민통치의 결과, 우리 민족은 막대한 경제적 수탈과 강제동원으로 인한 물적 인적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러한 가시적 피해도 컸지만 보다 깊은 상처가 남은 곳은 민족의 정신세계였다. 일제강점기 민족문화는 일제의 치밀한 계획아래 말살되고 오염되었다. 물질적 피해는 쉽게 복구할 수 있지만 한번 훼손된 정신문화를 온전히 치유하고 복원하는 데는 지속적인 노력과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해방 60돌을 맞은 지금까지 우리가 일제잔재 특히 문화 속의 일제잔재 청산을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가 나서서 왜곡되고 오염된 민족문화를 온전히 복원하고 한 단계 발전시키는 역사문화운동을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현재 광복60년 문화사업 ‘일제문화잔재 지도 만들기’ 고증심의위원이며,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으로서 경희대학교 사학과에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일제 식민통치기구 및 협력단체' 국내편과 해외편 집필에 참여하는 등 한국 근ㆍ현대 기초자료 조사와 과거사 청산문제 연구에 진력하고 있다.
근현대 민족문제와 통일시대의 역사문화운동이 주요한 관심 분야.
저서로는 ‘친일파의 축재과정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재산환수에 대한 법률적 타당성 연구’(국회법제사법위원회),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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