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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불국사 ②

200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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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불국사삼층석탑(석가탑)

다보탑과 대조되는 것은 대웅전 앞 뜰 서쪽에 있는 석가탑이다. 석가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불국사삼층석탑이라고 부르지만 일반적으로 ‘석가탑’ 이라고 줄인 명칭을 더 많이 사용한다.

석가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를 조성한 일반형 석탑으로 기단부나 탑신부에 아무런 조각이 없어 간결하고 장중하며 각 부분의 비례가 아름다워 전체의 균형이 알맞은 뛰어난 작품으로 사람에 따라 다보탑보다 더 후한 점수를 주기도 한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한국 탑에서는 지붕의 처마 밑 부분의 공포구조를 추상한 형태로 만든다. 석가탑에서는 여러 층급으로 단을 이루는 방식에 따라 5단이다. 처마 좌우 끝에는 구멍을 파고 금동으로 만든 장엄구를 장치했다. 3층 지붕 위에는 노반(露盤)을 얹고 위에 상륜(相輪)을 올렸는데 철심(鐵心)에 돌을 다듬어 만든 여러 부재들을 중첩시켜 완성했다.


석가탑서 사리·사리용기·각종 장엄구 발견



석가탑은 엉뚱한 일로 한국의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탑으로도 유명하다. 석가탑은 창건 이후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왔으나 1966년 9월 도굴범에 의해 석탑훼손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정부는 도굴꾼이 훼손한 탑을 복원하기 위해 탑신부를 해체했는데 해체수리과정에서 2층 지붕돌 중앙에 있는 방형사리공 안에서 사리를 비롯한 사리용기(‘불국사 삼층석탑 내 발견유물’이란 명칭으로 국보 제126호로 지정)와 각종 장엄구 등을 발견했다.

이 당시 발견된 유물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다음과 같다.

① 금동제, 은제 사리외합 1점
② 은제 사리내합 1점
③ 금동 방형사리합 1점
④ 동경, 청동비천상
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축
⑥ 묵서지편
⑦ 곡옥, 홍마뇌 환옥, 수정 환옥 등 옥 종류
⑧ 은가락지, 수정 큰 구슬
⑨ 목탑 12점 등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이 경문은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는데 690년에서 705년 사이 당나라 측천무후 당시에 공문서에 사용되었던 글자 중 네 글자가 10여 차례나 등장하고 있어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로 밝혀졌다. 따라서 이 다라니경은 석가탑 건립 이전에 만들어서 불국사 창건 당시에 봉안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부분은 <'세계기록유산,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과 금속활자(1)', 국정브리핑, 2005.4.23>을 참조하기 바란다.

불국사 창건 당시의 복원상상도.


석가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는데, 현진건의 소설로도 유명한 아사녀와 아사달의 애처로운 사랑 이야기는 불국사를 찾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불국사가 널리 알려지는데 큰 공헌을 했다. 홍사준은 석가탑을 건축한 아사달이 황룡사 9층탑을 지은 아비지와 동족으로 백제 사람일 것으로 추정했다.

석가탑은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탑이다. 이 탑을 세운 아사달은 이 점에 착안해 석가탑의 자리를 보통의 탑과는 다르게 만들었다. 탑의 기단이 땅과 만나는 곳에 놓는 석재를 지대석이라고 하는데, 이 지대석의 아래에 큰 바윗돌을 옮겨다 놓아 탑이 바위를 타고 앉은 모습으로 만들었는데 석가모니가 눈 덮인 히말라야 산에서 6년 동안 수행하면서 앉았던 자리가 주로 바위였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으로 추정한다.

석가탑은 바위 위에 조성됐다. 탑 아랫 부분을 자세히 보면 바위와 탑의 기단이 만나는 부분이 독특한 것을 알게 된다.

울퉁불퉁하게 크고 작은 바위들을 깔고 그 위에 석가탑을 올렸는데 여기에서도 그랭이 공법이 사용되었다. 받침돌을 울퉁불퉁한 바위에 따라 도려내고 수평을 맞춘 것이다. 자연미가 돋보이는 부분으로 다른 나라의 탑에선 찾아볼 수 없다. 그랭이 공법에 대해 설명한다.


바위 형태따라 다듬어 맞추는 그렝이 공법



그랭이 공법은 불국사 석벽에서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는데 원래 자연석과 자연석을 접합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바위는 울퉁불퉁하게 생겼고 이가 벌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므로 고르게 쌓으려면 자연석을 가공해야 한다. 그런데 그렝이 공법은 특정 바위를 생긴대로 놓아둔 채 바위의 형태에 따라 다듬어 가면서 맞추는 것이다.

이 공법은 우리나라 건축의 독특한 특성 중에 하나이다. 서양의 건물은 주춧돌과 기둥을 서로 견고하게 결색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주춧돌 위에 기둥을 간단하게 올려놓기만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건물은 지진과 같은 충격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화재에 의해 건물이 소실되는 경우는 많지만 지진 등에 의해 피해를 보았다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한국에 큰 지진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가능하지만 한국의 건물들 대부분이 충격에 강한 것은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주춧돌을 아무리 유리와 같이 갈아 놓는다하더라도 기둥을 올려놓으면 유격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기둥과 주춧돌 사이의 간격을 없애고 밀착시키기 위해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다. 주춧돌을 생긴 모습 그대로 두고 나무기둥 밑둥을 도려내어 밀착시킨 것이다. 그레질칼로 기둥을 다듬어 돌에 맞추면 돌의 요철에 따라 기둥이 톱니처럼 서로 맞물린 듯이 된다. 기둥과 주춧돌은 막중한 건물의 하중으로 인해 밀착되기 때문에 지진에 흔들렸다하더라도 기둥의 요철에 따라 다시 제자리로 들어서는 것이다.

신영훈은 1967년에 멕시코의 멕시코시에 전통적인 한국 건축 기법으로 건설한 한국정(韓國亭)이 멕시코에서 일어난 수많은 지진에도 불구하고 아무 탈 없이 아직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은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00년 초의 연화교·칠보교.


석가탑의 둘레에는 팔방금강좌라고 하는 별도의 탑구가 있다. 정사각형의 탑구 네 모서리와 네 변의 중심에 원형의 연화좌대를 놓고 그 사이를 장대석으로 연결한 것이다. 각각의 연화대에는 여덟 분의 보살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석가탑의 탑신의 높이는 2층보다 1층이 훨씬 높다. 2층부터는 1층 높이의 반 이하로 줄어든다. 3층은 2층보다도 약간 낮게 만들었다. 폭과 지붕돌은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줄어들었다. 덮개에 해당하는 상․하 갑석의 윗면은 경사를 약간 주어 빗물이 잘 빠지도록 했다. 경사가 사방에 나 있으므로 모서리에 45도 각도로 융기된 선이 생겨나는데, 이 선을 무리 없이 다듬기란 쉽지 않은 데도 석가탑을 보면 둔하게 보이기 쉬운 부분을 아주 뛰어난 솜씨로 날렵하게 처리했음을 알 수 있다.

상륜은 3층 지붕돌 위에 올린 네모반듯한 모양의 노반에서 시작된다. 노반 위에 복발 그리고 이어서 앙화, 보륜, 보개, 수연받침, 수연, 용차, 보주의 순으로 상륜이 구성된다. 이 석재들은 크기가 작은 데다 높게 쌓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중심부에 구멍을 내고 3층 지붕돌에 꽂아 세운 '철찰주(철로 만든 기둥)'에 죽 내려 끼우는 방식으로 설치하였다. 상륜부 전체에 세밀한 조각들이 많지만 특히 앙화의 네 모서리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이, 네 변에는 음식을 바치는 공양비천상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석가탑은 원래 앙화까지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본떠서 그 위의 상륜을 다시 만들어 놓았다.


귀솟음·안쏠림 기법으로 시각 교정



석가탑은 매우 정교한 시각 교정을 가하도록 건축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단 기둥의 수치를 보면 안쪽 기둥에 비하여 바깥쪽 모서리 기둥의 높이가 약간씩 높다. 또한 기단과 탑신의 너비는 아래쪽이 넓고 위로 갈수록 좁다. 이것을 귀솟음과 안쏠림기법이라고 부른다.

귀솟음은 중심 기둥과 모서리 기둥의 높이를 같게 할 경우 양쪽 끝이 중심보다 낮게 보이는 착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기법이다. 이는 가령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부가 처져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부의 기둥을 높게 하는 것을 반대로 이용한 기법이다.

안쏠림은 기단과 탑신의 기둥을 수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약간 안쪽으로 기울게 만드는 것으로 역시 수직으로 올렸을 때 착시 현상에 의해 건물의 윗부분이 넓어 보이는 것을 교정하기 위한 기법이라고 강우방은 설명했다.

석가탑은 통일신라 초기 석탑 양식의 대세를 따르고 있지만 이를 보다 간략화하면서 석재가 갖고 있는 특성을 최대한 살려 하나의 완성된 양식을 확립했다. 탑신부의 비례도 통일 초기의 경향에 따라 초층에 비해 2층부터 체감률이 급격히 높아지지만 옥신석은 높이에 비해 폭이 줄어들어 종래의 장중한 외관에서 경쾌한 외관으로 바뀐다. 이후 이러한 석가탑의 양식을 따라서 건축된 신라의 수많은 석탑들을 일반적으로 ‘일반형 석탑’이라고 부른다.

석가탑은 또 다시 해체 복원할 계획이다. 그러나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석가탑은 기단부에 문제가 있어서 해체해야 한다는 대원칙은 수립됐지만 어떤 조사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지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석가탑 그랭이 공법, 그랭이 공법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건축공법으로 기준 돌의 형태에 맞춰 돌을 다듬어 쌓은 것이다.


<아미타정토>

칠보교와 연화교를 지나 다다르게 되는 아미타정토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구역은 석가정토보다 면적도 좁고 건물도 낮으며 장식도 간단하다.

8세기에 한창 융성한 아미타 신앙은 모든 중생이 나무아미타불을 단 한 번만 염불하면 속세의 고통에서 즉각 벗어나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는데, 고통이 없는 행복의 땅인 극락세계가 바로 아미타정토이다.

아미타 신앙대로라면 불국사에서 아미타정토 구역을 제일 장엄하고 높게 조성하는 것이 이치이지만 규모나 구조면에서 아미타정토는 석가정토의 부속물로 설계되었다. 권지연은 이와 같이 설계된 이유로 아미타 신앙이 신라시대 대중 사이에 크게 유행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화엄사상의 카테고리 안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화엄사상에 의하면 아미타정토는 가장 낮은 단계로 근기가 낮은 중생을 위한 것이고 연화장세계는 가장 높은 단계로서 근기가 높은 중생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연화장세계는 바로 해탈의 경지인데 이곳은 만물이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하나가 되는 이상적인 세계이다.


석가정토, 아미타정토보다 돋보이게 표현



불교 세계에는 아미타여래가 있는 극락정토, 약사여래가 있는 유리광정토 등 수많은 정토가 있지만 불교의 주 관심사는 석가여래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난 사바세계에 있다. 그러므로 많은 여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여래는 사바세계의 석가여래이므로 연화장세계로 변모한 석가정토가 아미타정토보다 단계가 높은 것이다.

그러므로 불국사의 건축은 석가정토를 아미타정토보다 월등히 부각시킴으로써 이러한 화엄사상의 면모를 조형적으로 표현했다. 즉 우리의 이상은 저 멀리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를 연화장세계로 변모시키는데 있다는 것이다. 노력과 실천으로 깨침에 다다르면 이 사바세계가 가장 훌륭한 정토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불국사의 건축은 말해주고 있다고 최준식은 적었다.

① 칠보교와 연화교

대웅전으로 가는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에는 아미타여래의 서방 극락세계로 가기 위한 칠보교·연화교가 있다.

칠보교(칠보는 일곱 가지 보석을 뜻한다고 설명되나 부처의 본질인 깨달음의 일곱 가지 덕성을 말한다는 설명도 있음)·연화교는 청운교·백운교와 모습이 비슷하지만 경사가 훨씬 완만하게 처리되어 있다. 다리 밑에는 약간 완만한 곡선을 이룬 홍예가 만들어져 있다. 이 다리는 창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는데 헌강왕비가 비구니가 되어 왕이 극락에 왕생하기를 기원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청운교·백운교에 비해 부드럽고 온화한 다리로 신라시대 석조 기법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② 극락전

안양문을 지나면 석등과 극락전(아미타여래가 주존으로 봉안된 사찰 건물을 무량수전이라고 하며 부석사 무량수전이 유명함)이 나타난다. 안양이란 극락정토의 다른 이름으로 이 문을 지나면 사방의 극락정토에 이른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극락전, 극락전은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곳으로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가 봉안되어 있다(사진 김영윤).


아미타여래는 무량광 또는 무량수로 번역된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곳으로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가 봉안되어 있다. '고금창기'에는 6칸 건물로 전후 26칸의 행랑이 적혀 있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영조 26년(1750)에 중창했으나 기단과 초석, 계단 등은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모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강릉 객사문과 도갑사 해탈문을 참고로 하여 1960년에 중건된 것이다.

극락전을 위축전(爲祝殿)이라고도 부르는데 위축전이란 조선 왕족의 안위를 기원하기 위해 명산대찰에 지은 원당(願堂)을 뜻하는데 1920년까지 온돌을 들여 원당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20년에 온돌을 철거하고 다시 극락전으로 환원되었다.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통하는 길에는 3열을 지어 쌓은 계단이 있는데 각각이 16계단이므로 모두 48계단이 된다. 이것은 아미타불의 48원(願)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계단은 구례 화엄사에서도 발견된다.

③ 비로전

석가여래의 사바세계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비로자나불이 주석하고 있는 법계가 있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으므로 연화장 세계의 불국인 비로전을 건축했다.

비로전은 대웅전으로부터 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1970년대의 발굴로 터전이 확인되어 그 자리에 다시 중건했다.


기단, 앞쪽에 삼단 층계 좌우에 삼각형 소맷돌



기단은 지대석, 면석, 갑석으로 조립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화강암 기단, 앞쪽 중앙에 삼단의 층계, 좌우에 삼각형 소맷돌을 설치했다. 소맷돌은 받침돌과 위에 놓이는 두 돌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런 소맷돌은 황룡사나 감은사에서도 볼 수 있지만 불국사의 다른 전각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비로전의 주인은 비로자나불인데 화엄사상에 따르면 비로자나불은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는 뜻으로 모든 부처님의 본체 곧 진리의 몸인 법신불이다. 단순히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 부처님 중의 한 분이 아니라 그 모든 부처의 근본이요 중심으로 간주되는 부처님이다(비로자나불이 주존일 경우 그를 봉안하는 전각을 대적광전이라 함)

불단에 모셔진 비로자나불좌상(국보 26호)은 극락전의 아미타불과 마찬가지로 금동불인데 주조 기법이나 양식이 거의 동일하여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몸은 바로 앉아서 앞을 바라보고 오른손의 두 번째 손가락을 세워서 왼손으로 잡고 있는데 이러한 수인을 지권인(智拳印)이라 한다. 오른손은 부처의 세계를 왼손은 중생들의 세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심오한 뜻을 나타낸다. 이러한 수인은 비교적 후대에 비로자나불이 밀교의 주존(主尊)으로 대일여래가 불렸을 때 흔히 나타났다고 최준식은 적었다.

<연화장세계>

불교 신앙에서 관음 신앙을 무시할 수 없다. 아미타 신앙과 더불어 가장 민중과 가까웠던 신앙이 관음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비로전보다 높은 곳에 관음전이 있는 것은 보타락가산을 나타낸 것이다. 옛날에는 산 모습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계단식으로 되어 산모양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어있다. 산으로 오르는 계단을 낙가교라 부르고 있다. 낙가교(洛伽橋)란 보타락가산으로 오르는 계단이라는 뜻이다. 관음전으로 들어서는 문을 해안문(海岸門)이라 하여 남해바다를 건너왔다는 뜻이다.

관음전 역시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로 1973년 중창할 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복원된 다포식 건물이다. '고금창기'에 의하면 관음전 주변에 여러 건물이 일곽을 이루고 있었으며 922년에 경명왕비가 낙지공에게 명하여 전단향목으로 만든 관세음보살상이 전했다고 하나 그 후 없어졌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973년 복원공사 때 새로 조성한 것이다.

이상의 설명으로 불국사를 왜 불국사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국토들이 총망라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민중적인 신앙인 관음 신앙까지 배려해서 설계했기 때문이다.

비로전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불국사의 건축 양식을 보면 그 당시까지 일반적으로 출현했던 탑 중심형의 사찰에서, 탑의 비중이 약화되고 금당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즉 황룡사처럼 평지에 세운 탑 중심형 사찰은 탑을 기준으로 삼아 사찰의 전체 영역을 조직화하지만 불국사에서는 상대적으로 탑과 금당이 병립되어 있다. 이런 탑-금당 병립형 사찰들은 결과적으로 볼 때 탑으로부터 금당으로 신앙의 중심성이 전이되는 일종의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권지연은 해석했다. 탑-금당 병립형의 출현이야말로 바깥에서 들어온 사찰 배치 형식을 신라의 형식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최준식 박사의 설명이다.


불교의 심오한 교리 조형적 언어로 표현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함께 등록된 석굴암과 불국사는 절묘한 설계를 바탕으로 불교의 심오한 교리를 조형적 언어로 표현한 최상의 종교예술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굴암에 대해서는 ('석굴암 제대로 보기 (1), (2)', 국정브리핑, 2004.10.11 및 10. 16)을 참조하기 바란다.

신라의 최치원은 불국사는 ‘화엄불국’에 깊은 뜻이 있다면서 '화엄불국사아미타불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동해 동산에 아름다운 절이 있으니
화엄 불국이라 이름하였다.
임금이 종이 되어 친히 세우니
절 이름 네 마디에 깊은 뜻이 있다.
화엄을 주시하며 연화장을 우러르고
불국에 달리는 마음 안양으로 이어지면
마산의 독한 기운을 가라 앉히니
마침내 고해의 거친 파도를 잠잠케 한다.'

근래 우리 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재 가격 그 중에서도 국보급의 가격은 얼마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원칙적으로 국보급은 판매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므로 가격을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추할 수 있는 근거는 있다. 작품에 대한 보험가가 산정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문화재 중 최고의 보험가는 ‘금동반가사유상(국보 83호)으로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문화교류전 출품 때 적용되었던 4백 억 원이다. 그 다음은 1998년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한국실 개관 기념 특별전에 출품되었던 ‘금동반가사유상(국보 78호)’으로 3백 억 원 짜리 보험에 가입했다. 제작시대나 모양이 비슷한 이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모두 한국 최고의 불상으로 꼽힌다.

한편 건축물의 경우 문화적 가치와 복구비를 기준으로 삼아 보험가를 산정하는데 불국사와 석굴암은 1백 91억 원이며, 수원‧화성은 1백 13억 원이다. 불국사가 지불하는 보험료는 1999년을 기준으로 3년간 1억 2천만 원, 수원시가 지불하는 보험료는 14개월간 2천 6백만 원으로 알려졌다.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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