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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 같은 쪽방에서 꿈을 키우던 곳…구로공단 50년

수출산업단지 지정 50주년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서 당시 모습 생생 재현

2014.01.20 정책기자 박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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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구로공단이 올해로 수출산업단지로 지정된 지 50주년을 맞았다. 60~80년대 산업역군들의 삶은 어땠을까? 우리나라 산업화의 산실인 구로공단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전시·보존하고 당시 여공들의 생활공간을 재현한 곳이 있다.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이 그것. 당시 사진과 영상,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놓아 연일 남녀노소 방문객들이 끊이질 않고 있다.

지난해 5월 개관한 체험관은 미래세대를 위한 역사 체험 및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구로공단’이라는 명칭 때문에 체험관이 위치한 곳을 구로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은 금천구에 속해 있다. 원래는 구로구였지만 1995년 행정구역이 분리되면서 금천구로 변경됐다.

체험관이라고 하면 다른 곳에 비춰 거창한 건물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하 1층과 지상 2층 구조로 된 다가구 주택으로, 당시 여공들이 실제로 살았던 쪽방을 복원해 재구성했다. 40~50년 전 근로자들의 생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체험시설이기 때문이다.

구로공단의 옛 모습과 여공들의 생활공간이었던 쪽방을 재현한 노동자생활체험관 전경, 우측에 여공들의 생필품 구입과 주전부리 터 가리봉상회도 함께 조성했다.
구로공단의 옛 모습과 여공들의 생활공간이었던 쪽방을 재현한 노동자생활체험관 전경. 우측에 여공들의 생필품 구입과 주전부리 터였던 가리봉상회도 옛 모습 그대로 함께 조성했다.

벌집 같은 두 세평짜리 쪽방, 당시의 교과서, 라디오, 잡지, 포스터, 소설책, 신발, 주방용품, 연탄 등의 소품을 그대로 재현 전시했다. 근로자 4~5명이 함께 생활했던 좁은 방은 그곳이 쉼터요, 꿈을 키운 공부방이요, 기타치며 놀던 문화방이었다. 기쁠 때 떠들며 웃고 슬플 때 얼싸안고 눈물흘렸던 희노애락의 때묻은 보금자리였다. 이런 옛 모습 그대로 방문객들이 체험하고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실내를 구성했다.

70~80년대 옷을 입어볼 수 있는 패션방에는 작업복과 당시 유행 패션, 핸드백, 악세사리를 비치했고, 노동자의 문화활동을 재현한 문화방에는 통기타와 노래테이프, 노래책, 소설책, 시집을 갖췄다. 공부방에는 당시 교복과 책가방, 교과서를 전시해 노동자의 공부와 꿈을 재현했고, 재봉틀과 바느질 도구를 갖춘 봉제방도 꾸며 봉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부모에게 편지 쓰고 연탄가스 사고를 당했던 애환과 슬픔이 담긴 추억방, 밥상과 잠자리, 가구를 비치한 생활방 등도 오밀조밀 붙어있다.

특히, 벌집에는 보통 20개가 넘는 쪽방이 있었는데, 공동세면장과 화장실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아침마다 줄을 서 화장실과 세면장을 이용해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 매일 아침마다 북새통을 이룬 탓에 3~4분간의 짧은 시간 동안 세수와 양치질을 끝내야 직장에 지각을 하지 않고 갈 수 있었다.

공동화장실, 공동세면장은 근로자들이 벌집에 살면서 겪었던 불편함과 고단함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곳이다. 벽화 앞에서 기념사진 촬영 체험을 할 수 있다.
공동화장실, 공동세면장은 근로자들이 그들의 보금자리 벌집에 살면서 겪었던 불편함과 고단함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관람자들이 벽화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여성근로자 공순이의 쪽방 재현관이다. 구로공단 형성 시기에 공단 주변지역에 무질서하게 만들어져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벌집 또는 닭장집이란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여공들의 꿈과 애환과 슬픔이 서린 곳이다.
여성근로자의 쪽방 재현관이다. 구로공단 형성 시기에 공단 주변 지역에 무질서하게 만들어지면서 ‘벌집’ 또는 ‘닭장집’이란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여공들의 꿈과 애환과 슬픔이 서린 곳이다.

한편, 당시 산업역군으로, 공단주변에서 이들의 삶을 지켜봤던 어르신 몇 분을 만나 힘들고 어려웠던 공단 생활의 얘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70년대 경기 양평에서 구로동으로 시집온 윤명숙(67) 어르신. 당시 유행했던 펜팔로 신랑을 만났다. 다행히 부자집으로 시집와 6명의 여종업원에게 세를 놓고 있었다. 70년대 초 직장인 월급이 4천 원 정도였는데, 월세 6~7천 원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1명당 1천 원꼴인 셈이다.

“당시 수돗물도 잘 나오지 않고 펌프를 사용했는데, 여섯 명이 펌프에 둘러 앉아 쌀을 씻었다. 연탄불이 꺼지기라도 하면 밥을 모두 굶어야 할 판이었다.”며 “공단이 들어서기 전 옥수수밭이었던 지역이 산업단지로 탈바꿈해 고장 사람들의 보람과 긍지가 꽤 컸다.”고 말했다.

윤 씨는 당시 에피소드로 “80년대 말쯤으로 기억하는데, 가리봉역(현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나오는데 웬 젊은 청년이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고 안됐다 싶어 가까이 다가가 일으켜 세워주려고 하는데, 어디서 ‘아줌마 비켜요!’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지. 놀라서 돌아보니 영화 촬영 중이었지 뭐야.” 그것이 나중에 알고보니 ‘구로아리랑’이었단다.

산업역군 여공 순이와 함께 한 이순자(좌측), 윤명숙(중앙), 김순옥(우측) 어르신, 세 분 모두 타지에서 시집와 구로인이 됐다. 또 체험관에서 함께 도슨트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산업역군 여공 순이와 함께 한 이순자(좌측), 윤명숙(중앙), 김순옥(우측) 어르신. 세 분 모두 타지에서 시집와 구로인이 됐다. 구로공단에서 수십 년간 생활하면서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체험관에서 도슨트로 자원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순옥 어르신은 봉제공장에서 잠시 일하며 공단 여공들을 대상으로 화장품 판매를 하기도 했다. 당시 공단관련 소식이 담긴 신문기사를 소개하고 있다.
김순옥 어르신은 봉제공장에서 잠시 일하며 공단 여성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화장품 판매를 하기도 했다. 당시 공단 관련 소식이 담긴 신문기사를 가리키며 소개하고 있다.

한편, 늦게 결혼해 80년대에 구로로 시집온 김순옥(67) 어르신. 집근처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퇴근시간 등을 이용해 여공들에게 화장품을 팔았다. “80년대는 공장이 잘될 때였다. 1층은 사무실, 지하는 거의 공장이었다. 다니는 공장이 집에서 가까워 일하고 퇴근시간에 일찍 집으로 와 공단 여공들이 몰려나올 때 화장품을 팔았다.”며 “화장품이 쌌기 때문에 인기였다.”고 말했다. 월급을 받으면 화장품을 사서 고향 부모에게 보내는 종업원이 많았단다.

체험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김 씨는 “방문한 어린 학생들이 ‘옛날 생활을 말만 들었지 잘 몰랐는데, 체험관에 와서 보고 느끼고 만지면서 부모세대의 어려웠던 생활과 여공들의 애환을 알게돼 보람을 느꼈다.’고 말할 때 긍지를 느낀다.”고 말했다.

노동자생활체험관을 찾은 어머니들과 중학생 방문객들이 예전 여공들이 했던 봉제체험을 하고 있다. 인형, 향주머니, 방석, 조끼, 조각보를 만들고 뜨개질로 수세미만들기, 기아난민 모자뜨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노동자생활체험관을 찾은 어머니들과 중학생 방문객들이 예전 여공들이 했던 봉제 체험을 하고 있다. 인형, 향주머니, 방석, 조끼, 조각보를 만들고 뜨개질로 수세미 만들기, 기아난민 모자뜨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청말띠를 유난히 강조한 이순자(60) 어르신. 그래서인지 가만히 있지 못하고 20여년 간 치매봉사를 비롯한 각종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봉사를 위해 태어났다는 이 씨는 80년대 중반 결혼해 구로인이 된 부산댁이다. “고향인 부산은 신발, 대구는 방직이 이름났듯 구로에는 봉제가 유명했다. 공부를 못한 여공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낮에는 일하고, 야간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공민학교를 다녔다. 고된 생활을 하며 꿈을 키웠다. 당시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몸은 약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한 강한 여성들이었다.

이곳 체험관에서 봉사도 하고 있는 이 씨는 “역사, 인성교육 등 4일간의 집체교육과 수시교육을 받고, 실제 공장 견학도 했다.”며 “5명의 자원봉사자가 조로 나눠 매일 4시간씩 교대 봉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 체험관 한편에는 사과 궤짝으로 만든 상을 펴놓고 친구들과 야학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고 숙제를 하는 모습을 재현한 ‘희망의 방’이 있다. 당시 여공들 가운데에는 20세 미만의 어린 직원이 절반이나 됐는데, 학력 구성비는 국졸이 절반을 넘었다. 중졸 8%, 고졸 3%였으며 문맹도 20%나 됐다.

‘희망의 방’. 피곤함이 몰려와 잠이 쏟아져도 잠을 ?아야 했고 뱃속에서는 꼬르륵대며 밥달라고 소리치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과 앞날에 대한 희망을 품고 주경야독한 여종원이 많았다.
‘희망의 방’에서 체험하는 아이들. 피곤함이 몰려와 잠이 쏟아져도 잠을 참아야 했고 뱃속에서는 꼬르륵대며 밥달라고 소리치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과 앞날에 대한 희망을 품고 주경야독 하는 여성근로자가 많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구로동 한국수출산업공단을 방문해 업체대표와 여자종업원들을 격려하는 모습의 사진이다.
1970년대 말 박근혜 대통령이 구로동 한국수출산업공단에 방문해 업체대표들 및 여성근로자들을 만나 악수하며 격려하는 모습.

한편, 구로동의 한국산업수출공단은 박정희 대통령이 지대한 관심을 보인 곳이기도 했다. 국민들 역시 공단에 대한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국가 산업을 부흥시키는 전초기지요, 공단 직원들이 가족 모두의 생계를 이어가는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 박근혜 대통령이 구국총재단 총재 자격으로 구로동 한국수출공단을 방문해 산업역군들을 격려하는 모습의 사진과 신문기사들도 눈에 띈다. 당시 공단공설운동장에서 있었던 새마음갖기 및 새마음직장봉사대 결의대회에 참석한 공단 내 기업체 대표가 360여 명, 여자종업원만도 1만여 명이었다니 구로동에 거주한 여공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이 자리에서 “이 공단 산업장에서 여러분들의 정성과 땀으로 이룩한 경제성장은 우리의 1백억 달러 수출탑을 성취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풍요로운 국가건설을 기약한 디딤돌이 되었다.”고 격려했다. 대한민국이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 해는 1977년. 대한민국은 지난해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만 1,694억 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렸다.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 관리를 맡고 있는 박미경 씨. “자녀가 보고 체험하고는 가서 엄마아빠를 모셔 다시오고, 반대로 부모님이 보고 간 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다시 가족이 찾는다.”며 체험관을 자랑했다.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 관리를 맡고 있는 박미경 씨. “자녀가 체험하고는 가서 부모님을 모셔오고, 반대로 부모님이 보시고 간 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다시 가족이 찾는다.”며 체험관을 소개하고 있다.

한편, 체험관을 나오면서 인근 놀이터에 운동하러 나온 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70년대 초 충청도에서 상경해 구로동에 터잡은 김근수(72) 어르신. 군 제대 후 직장을 찾던 중 구로동 봉제공장에 입사한 뒤 지금까지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봉제공장에서 열심히 기술을 익혔다. 남보다 열심히 일해 여성종업원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 중 잘 따르는 여공이 있었는 데, 그 사람이 지금의 처”라며 “당시 살아가기가 어려웠지만 아이를 다섯이나 낳았다. 둘이 같이 벌었기 때문에 다 공부시키고 밥굶지 않고 살았다. 지금은 다 출가해 손주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구로구나 금천구는 당시 여공들의 피땀어린 결정체다. 나도 체험관에 가봤는데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좋더라.”라고 말했다. 당시 여공이었던 할머니가 공장에서 일을 마친 뒤 야학에 다녔는데, 밤에 어둡고 무서우니 늘 같이 가고 자취하는 집까지 데려다 줬다고 했다.

“70년대 초 한달 월급이 4천 원 쯤 됐는데, 나는 기술도 있었으니 조금 더 받았지. 둘이 열심히 모았어. 곧 설이 다가오는 데 이맘 때쯤이면 모두 들떠있었지. 고향에 가니까. 1년에 설, 추석 딱 두 번 고향 부모님 보러 갔어. 전라도나 경상도까지 가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또 차비가 축나니까 아깝잖아.”라고 웃으셨다. 고향에 간 종업원 중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 상경하지 않은 여직원들이 많아 애를 태우기도 했단다.

체험관 방문 관람객들이 남기고 간 메모 쪽지들이 벽면 가득히 부착돼 있다. “잊으면 안될, 알아야할 역사를 알게돼 너무 기쁘고 감사하다. 구로공단에서 열심히 일하신 어르신들을 본받아 나도 열심히 잘 살 것이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겠다.”-한 방문자-
체험관 방문 관람객들이 남기고 간 메모들이 벽면 가득히 부착돼 있다. “잊으면 안될, 알아야 할 역사를 알게돼 기쁘고 감사하다. 구로공단에서 열심히 일하신 어르신들을 본받아 나도 열심히 잘 살 것이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겠다.”라는 한 방문자의 글귀가 눈에 띈다.

체험관 관리를 맡고 있는 박미경(43) 씨는 “어린이들은 예전에도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잘 살았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체험관에서 와서 예전 모습을 직접 보고 느끼며 깨닫는 아이들이 많다.”며 대기업에 견학을 가려다 이곳 체험관을 찾은 퇴직 교장선생님 48분이 얼마 전 체험관을 둘러보시고는 ‘그곳보다 여길 오길 훨씬 잘했다.’고 하더란다.

체험을 마치고 남긴 관람자들의 이야기도 가슴 찡하게 다가오는 내용이 많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것 같은 느낌에 새롭다. 밝은 미래가 함께 했으면 좋겠다.’, ‘공부해야 하는 언니들이 공장에서 일했다는 것이 안타깝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시대를 보니 신기했다.’, ‘우리나라 발전에 큰 기여를 하신 우리 어머님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세상에 관심을 갖고 저도 제대로된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등등.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비롯한 이 같은 산업역군들이 흘린 땀과 눈물, 피나는 노력이 오늘의 디지털 구로, 나아가 선진강국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디딤돌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구로구 구로동과 금천구 가산동에 걸쳐있는 디지털산업단지는 2013년 3월 현재 13,000여 개의 기업이 입주해있는 중소벤처기업 집적지로 탈바꿈했다. 현재 ‘G밸리’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려지고 있다. ‘구로, 금천’의 영어 이니셜 ‘G’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의 ’밸리’를 합성한 것이다.

[노동자생활체험관 이용방법]
* 운영시간 : 매주 화요일~일요일(10시~17시). 월요일 휴관
* 관람료 : 무료
* 누리집 : http://laborhouse.geumcheon.go.kr
* 문의 및 예약 : 02-830-8426~7(10인이상 단체 이용 시 사전 예약)
* 위치 : 서울 금천구 벚꽃로 44길17(가산동 39-7)
(지하철 가산디지털단지역 1,7호선 2번출구, 도보 7분) 주차시설 없음

정책기자 박동현(직장인) qlove1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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