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익숙하던 대곡역은 허허벌판의 풍경이었다.
역 밖으로 몇 걸음만 나가면 아직 개발 중인 풍경으로 이어지던 그런 곳이 어느새 3호선, 경의중앙선, 서해선, GTX-A, 그리고 교외선까지 무려 5개의 철도가 만나는 교통 요충지가 됐다.
나는 이 대곡역을 중심으로 GTX-A 운정중앙에서 서울역 구간 개통 1주년과 교외선(대곡에서 의정부까지) 운행 재개 1주년을 하나로 묶어보기로 했다.
불과 보름 남짓 차이로 1주년을 맞은 둘은 같은 철도인데도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한쪽은 분 단위로 삶을 당겨주는 초고속이고, 다른 한쪽은 일부러 속도를 낮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복고풍 감성을 살렸다.
서울역 GTX-A 출입구
먼저 GTX부터, GTX의 장점은 단순하다.
바로 시간의 압축이다.
특히 이동 변수가 생겨 일정이 흔들릴 때 그 장점이 더 또렷해진다.
작년 12월 초, 서울에 약속이 있었다.
전날 폭설이 왔고, 경의선은 외부 노선이라 그런 날엔 운행이 지연되는 경우가 잦다. 혹시 몰라 1시간 일찍 나왔는데도 1시간에 1대 정도 운행하는 서울역행 열차가 연착되면서 지각할 위기에 놓였다.
그때 선택지가 하나 있었다.
대곡역에서 GTX로 갈아타 서울역까지 가는 길이었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지하 깊숙이 내려가는 길부터 '속도의 체감'이 시작된다.
며칠 전, 다시 GTX를 탄 날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전날 폭설이 또 한 번 지나간 데다, 버스 파업 소식까지 겹치면서 계획이 모두 틀어질 뻔했다.
이번엔 진짜 늦겠다 싶던 순간, 결과는 지난달과 똑같았다.
GTX 덕분에 계획한 시간 안에 움직일 수 있었다.
'빠름'이란 말이 그날만큼 현실적으로 와 닿은 적이 없었다.
최고속도 180km/h, 통근 시간을 분 단위로 압축한다.
이 '접근성'의 변화는 약속이나 출근처럼 절박한 상황에서만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어느 날은 의외의 모습으로도 눈에 띄었다.
GTX-A가 킨텍스역과 대곡역을 잇다 보니, 서울에서 킨텍스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역에서 종종 마주치게 된다.
한 번은 대곡역 화장실에서 코스프레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고 순간 "어…?" 하고 멈칫했는데, 알고 보니 킨텍스 행사에 가는 참가자들이었다.
킨텍스 일대는 '국제회의산업 육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정된 국제회의복합지구로, 전문회의시설을 중심으로 숙박·쇼핑·공연 등 관련 시설이 모여 국제회의 참가자들이 한곳에서 비즈니스와 체류를 이어갈 수 있도록 설계된 지역이다.
서울에서 킨텍스가 가는 길이 더 가까워지니, 길에서 코스프레 참가자를 마주치는 진풍경도 일상에 섞여 들어온다.
초고속 철도가 지역의 행사·산업·문화 접근성을 실제로 바꿔놓는 장면이다.
초고속 GTX-A와 옛 감성을 살린 교외선이 한 역에서 만나다.
하지만 하루는 오로지 '속도'로만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보기로 했다.
같은 대곡역에서 교외선으로 갈아타는 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코레일톡에서 '교외하루'를 4000원에 구매해 이용했다.
교외선 전 구간을 하루 동안 자유석·입석으로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패스인데, 왕복 운임(5200원)보다도 저렴해 부담이 적다.
4000원으로 교외선 전 구간을 하루 동안 자유석·입석으로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게다가 교외선은 운행 재개 초기보다 운행 횟수가 늘어 2025년 4월부터 하루 20회(왕복)로 확대됐다.
물론 지금도 배차 간격이 긴 편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낮에 갈 수 있느냐"이다.
밤에는 아무것도 못 하던 기다림이, 낮에는 둘러볼 시간으로 바뀐다.
같은 1시간이라도 밤에는 공백이고 낮에는 선택지가 된다.
작은 전시지만 교외선의 시간을 한눈에 보여준다.
직접 입어보며 '옛 감성 철도'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일영역에 내리자마자 반가운 변화가 있었다.
양주시 관광안내소가 문을 열었고, 안에는 코레일이 조성한 미니 철도박물관이 있었다.
요즘은 보기 힘든 종이 기차표, 표지판과 장비, 과거 교외선에서 실제 쓰이던 유물들이 전시돼 있었고, 옛 근무복을 직접 입어볼 수 있는 체험도 마련됐다.
교외선이 그냥 느린 기차가 아니라, 오래 쌓인 시간의 층이라는 걸 눈앞에서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낮에 만나는 주변 풍경
밖으로 나가니 밤에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 밤에 왔을 때는 조용한 플랫폼과 어둠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는데, 이번엔 주변을 둘러볼 기회가 생겼다.
마침, 일영역 근처에서 공릉천을 만났다.
얼마 전 하천정비사업 취재로 공릉천 파주지구를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공사 현장'이 '여행의 풍경'이 된 셈이다.
양주에서 발원해 고양·파주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드는 물길을 따라 걷는다.
공릉천은 양주에서 발원해 고양과 파주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한강에서부터 파주·고양을 지나 양주까지 이어지는 물길을 떠올리며, 파란 하늘 아래서 밥을 먹고 천천히 걷는 시간이 여유가 됐다.
초고속 철도가 시간을 '절약'해 준다면, 교외선은 시간을 '사용'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리모델링된 역사와 주변 풍경이 교외선의 '옛 감성' 분위기를 만든다.
대곡역에서 하루 동안 내가 탄 건 열차 두 대가 아니라 시간 두 종류였다.
한쪽은 여러 변수 속에서도 약속 시간을 지키게 해주는 확실성이고, 다른 한쪽은 기다림을 머무는 시간으로 바꿔주는 여지였다.
그래서 '1주년'은 같은 환승 거점에서 빠른 선택과 느린 선택이 동시에 가능해졌다는 변화로 체감됐다.
결국 수도권 교통정책의 성과는 이동 시간 단축에만 있지 않았다.
일상의 리듬과 선택지까지 넓어졌다는 사실을 대곡역에서 확인했다.
☞ (정책뉴스) 21년 만에 부활한 '교외선' 추억 싣고 무궁화호가 달린다
☞ (국민이 말하는 정책) GTX-A로 경험해 본 '속도와 광역 연결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