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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60주년…나라 위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6·25 결정적 전투들] ③ 영천전투

전쟁초기 불리한 전세 극적 역전시킨 ‘구국의 일전’

2010.06.09 제공=국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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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전투는 6·25전쟁 초기 아군에게 불리한 전세를 극적으로 역전시켜 전쟁의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방어선에서 위기를 구한 구국의 일전이었다.

이 전투는 1950년 9월 2∼13일까지 국군 8사단이 북한군 2군단의 공격을 방어한 6·25전쟁의 일대 전환점이 된 전투였다. 국군 8사단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을 섬멸하고 승기를 잡았다.

1950년 9월 영천전투 승리 직후 8사단 21연대 장교들이 파괴된 북한군 T-34 전차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국방일보
1950년 9월 영천전투 승리 직후 8사단 21연대 장교들이 파괴된 북한군 T-34 전차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국방일보
 
영천전투를 포함한 낙동강방어전 기간 중 대구에서는 매일 500~3000명의 신병을 전선으로 투입했다. 사진은 열차를타고 전선으로 향하는 신병들. 사진=국방일보
영천전투를 포함한 낙동강방어전 기간 중 대구에서는 매일 500~3000명의 신병을 전선으로 투입했다. 사진은 열차를타고 전선으로 향하는 신병들. 사진=국방일보
 
1950년 8월 말 북한군 2군단 15사단은 경북 영천군 동북면 입암리에서 2개 연대를 증원받아 최종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의 목표는 영천을 점령한 다음 대구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국군 8사단은 보현산과 입암 남쪽 고지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해 이미 전초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때 8사단 10연대는 3사단에 배속돼 포항일대에서 작전 중이었다.

영천은 신령ㆍ구산동ㆍ입암으로 이어지는 도로 교차점이며 대구와 경주로 가는 도로망이 발달했고, 철도 중앙선ㆍ대구선ㆍ동해남부선의 분기점으로 대구와 34㎞, 경주와 28㎞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이 돌파되면 대구와 경주가 적의 위협을 받게 되며 국군 1ㆍ2군단이 분리되는 동시에 동서 간의 보급로가 차단된다. 따라서 이곳은 낙동강 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 북한군의 9월 공세와 영천의 위기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1950년 9월 2일 전 전선에 걸쳐 공격을 명령했다. 북한군 15사단도 이날 야간 영천을 목표로 일제히 공격했다. 국군 8사단은 적의 야간공격을 받고 분전했으나 3일 새벽 우일선 16연대의 방어진지가 무너지면서 영천북방 기룡산 일대로 철수했다.

국군 8사단은 4일 오후까지 기룡산 능선을 따라 방어선을 편성했다. 사단은 왼쪽부터 21연대, 16연대와 3연대 1대대, 7사단 5연대를 배치했다. 육군본부는 신령에서 작전 중인 7사단 8연대를 영천의 8사단으로 배속 전환시키고, 7사단 공병대대도 추가로 투입해 영천지구의 전력을 강화했다.

적 15사단은 9월 5일 1시 각종 포의 지원 하에 전차 5대를 선두로 3개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국군 8사단은 중앙의 16연대와 3연대 1대대가 적 주공의 공격을 받아 수 시간 만에 종심 깊이 돌파돼 위기를 맞았다. 좌우측 21ㆍ5연대도 적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부득이 영천 북방으로 물러났다.

육군본부는 5일 지휘 일원화를 고려해 국군 8사단을 2군단으로 배속 변경했으며, 유재흥 군단장은 영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즉시 군단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에는 6사단장 김종오 대령, 1사단장 백선엽 준장, 군단 참모장 이한림 대령과 작전참모 이주일 대령 등이 참석해 대책을 논의했다.

회의 결과 군단장은 적이 영천 돌파에 주력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국군 1사단과 6사단에서 각 1개 연대를 8사단에 배속해 영천을 고수하기로 했다.
당시 다부동과 신녕도 위기였기 때문에 이는 대단히 어려운 결단이었다. 그리고 군단장은 당장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차부대의 지원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직접 미 1기병사단과 8군사령부를 방문해 지원을 요청했다.

북한군도 이날 영천 점령의 지연 책임을 물어 15사단장 박성철을 경질하고 부군단장 조광열을 사단장에 임명해 영천 돌파를 재촉했다. 이날 밤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중앙의 16연대가 영천 외곽까지 밀리고 있었다. 이때 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8연대로 역습을 전개해 가까스로 적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했다.
 
■ 적의 돌파구 봉쇄와 반격 준비

북한군 15사단은 9월 5일 야간부터 영천 공격을 시작해 다음날 미명 수대의 전차를 선두로 읍내로 진입했다. 기습을 당한 16, 8연대는 더 이상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영천 남쪽으로 철수했으며, 영천을 점령한 적은 곧바로 경주 방면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8사단장은 즉시 군단에 증원 부대를 요청하고 오수동에서 철수부대를 재편성했다. 이날 오후 좌전방 21연대를 공격하던 적 15사단 45연대도 남하해 영천의 돌파구 확대를 기도했다.

이날 오전 사단 공병대대는 군단장의 요청으로 도착한 미군 전차 1개 소대(5대)의 지원 하에 영천읍내로 돌입했다. 공격부대는 영천역을 경비하던 소수의 적을 격퇴하고 영천을 탈환했으며, 40여 대의 차량과 10여 문의 대전차포를 노획했다.
공병대대는 전차의 지원 하에 완산동으로 진출했으나, 저녁 무렵 조교동 일대의 적에게 역습을 받을 위험이 있어 다시 물러났다.

9월 6일 오후 국군 2군단의 증원부대인 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가 영천에 도착했다. 이로써 8사단은 비로소 영천 동북방에서 돌파 저지선을 형성하고 예비부대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이때 적은 영천 북동에서 큰 돌파구를 형성하고 국군 전선을 절단하려는 기세로 임포동으로 전진 중이었다. 적 103연대와 73연대는 돌파구의 견부를 확대하기 위해 21연대를 공격 중이었다.

9월 7일 새벽 국군 21연대가 적 103연대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했으며, 19연대도 아침 무렵 적의 보급지원부대를 기습해 큰 전과를 올리고 다음날 오후 2시 45분 영천을 장악한 적을 격멸하고 영천을 다시 탈환했다.

육군본부와 2군단의 기민한 지휘조치에 따라 9월 8일에는 적의 돌파구를 봉쇄하기 위한 연결 방어선이 형성됐다.
방어선은 영천을 중심으로 적의 진출로를 따라 북쪽의 선천 21연대에서 남쪽 아화 5연대까지 낚싯바늘 모양으로 편성됐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부대 배치는 적의 돌파구 저지는 물론 돌파구 첨단의 후방을 차단하고 반격으로 적을 포위하고 섬멸하기에 적절한 것이었다.

■ 총반격작전과 적 부대의 포위 섬멸

국군 2군단은 10일부터 총 반격전을 개시했다. 군단은 영천 북쪽에서 21ㆍ19연대로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영천 남쪽에서는 5연대를 선봉으로 총 5개 연대가 반격했다.

5연대는 포병과 공군기의 지원 하에 임포동 부근의 적을 기습해 차량 50대, 야포 10여 문을 파괴하는 전과를 달성했으며, 10ㆍ8ㆍ11연대도 미군 전차의 지원 하에 일제히 유상동, 유하동 방면으로 진출했다. 16연대는 재편성 후 작산동으로 진출해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적을 추격했다.

8연대는 우측 11연대가 1사단으로 복귀하자 그 지역까지를 담당하고 5연대와 협조해 북진했다. 5연대는 임포동 부근의 적 56연대 본부를 공격해 전차 2대, 박격포 6문을 노획하면서 적을 격멸했다.

이로써 5일 동안 차단됐던 영천~경주간 도로가 완전히 개통됐다. 이무렵 적은 퇴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총반격을 받아 거의 전멸된 상태에서 분산 철수하고 있었다.

영천 남쪽에서 적을 추격하던 10연대는 11일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21ㆍ19연대 사이 신흥동을 경유해 곧바로 평천동으로 진출했으며, 21ㆍ19연대도 월곡동ㆍ운천동으로 각각 진출해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

각 공격부대는 12일 마침내 9월 공세 이전 8사단 주저항선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고, 반면 적 15사단은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영천전투의 결과

영천전투는 낙동강방어선 전투의 승패를 가름하는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였다. 특히 9월 5~6일 대구와 경주가 위협받을 무렵에 영천이 돌파되어 위기가 가중됐다.

북한군 2군단은 5개 연대를 투입해 영천을 점령하고 경주로 진출하려 했으나, 국군은 이곳에 신편된 7사단 3개 연대는 물론 1, 6사단의 각 1개 연대도 투입해 3개 사단으로 방어조치를 취하는 등 육군과 군단의 시의 적절한 지휘조치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국군은 영천 부근에서 적 사살 3799명, 포로 309명, 전차 5대 파괴, 장갑차 2대, 차량 85대, 소화기 2327정 등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달성했으며, 후에 적의 지휘부가 평가한 바에 의하면 영천의 상실로 전체 작전의 패색이 짙게 됐다고 분석했다.<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영천전투의 승리 요인

국군 8사단의 영천 섬멸전은 전략 전술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먼저 지휘관의 적시적절하고도 과감한 지휘 결심을 들 수 있다.

국군 1군단이 담당하고 있던 지역 중 안강 정면이 돌파되고 또다시 영천 지역이 돌파당하자, 정일권 총참모장은 안강 정면을 1군단장이, 영천 정면은 2군단장이 담당하도록 군단 전투지경과 작전지휘 관계를 신속히 조정했다.
유재흥 2군단장도 작전회의를 열어 전투력 운용에 대해 과감히 결심함으로써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둘째는 전투력의 집중 운용이다.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인 적 부대와 적의 전의를 파쇄하기 위해서는 우세한 전투력을 결정적인 시간과 장소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는 절약을 전제로 이뤄지는 것이다.
영천 지역을 결정적인 장소로 판단하고, 1ㆍ6사단에서 전투력을 절약하고 동해안에 전용됐던 부대를 원대 복귀시켜 집중적으로 운용함으로써 적 부대의 격멸이 가능했다.

셋째는 적시 적절한 증원부대 투입이다. 국군 8사단 우일선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9월 3일 7사단 5연대를 투입했다. 4일에는 2군단에 배속했던 7사단 8연대를 다시 영천 지역으로, 9월 5일에는 7사단 공병대대 병력 200명을 추가로 영천에 투입하고 1ㆍ6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를 차출해 투입했다.

적의 선두가 경주 방향으로 지향해 아화 방면으로 진출하자 안강 정면의 26연대 3대대를 차출 투입하고, 건천 방면으로 남하하던 5연대와 동해안에 전용됐던 10연대를 첨단에 증원해 적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적의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넷째, 견부를 확보하고 돌파구 첨단을 저지한 것도 승리의 발판이 됐다. 8사단의 중앙지역이 돌파되고, 우측방이 노출되자 21연대는 선천동과 대환동 방어선에서 진지를 고수하면서 북한군 103ㆍ73연대의 주력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증원을 차단하고 돌파구 확장을 방지할 수 있었다.

경주 방면으로 진출하는 적의 첨단을 26연대 3, 5, 10연대를 투입해 저지했고, 적의 채약산 방면 진출은 8연대를 투입해 저지했던 것이다. 적에게 돌파당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견부의 확보로, 영천 전투 때도 그 덕택에 전투를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적의 측방 강타와 병참선 차단문을 들 수 있다.
국군 2군단은 19연대에 의한 적 후속부대의 기습 공격과 적 후방부대의 완전 섬멸로 영천 남쪽으로 진출한 북한군 15사단 주력의 증원을 차단 고립시켰고, 그런 가운데 아군의 총반격으로 적을 섬멸시킬 수 있었다.

■ 영천전투의 의의

영천전투의 의의는 영천이 적에게 일시에 점령되는 등 위기에 처하게 됐을 때 중요하게 결정된 문제들을 분석해 비중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먼저 전투 중 일시적으로 영천이 상실되자 육군본부와 미 8군사령부가 부산으로 이동한 것은 영천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둘째, 아군은 데이비드선으로의 철수가 검토됐다. 미 8군은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할 당시, 울산 북쪽에서 경상남북도 경계선을 거쳐 함안을 연결하는 정면이 90㎞에 달하는 선상에 예비진지를 구축해 우발사태에 대비했다. 이 방어진지 축성 공사는 미 8군 공병참모 데이비드슨(Davidson) 준장 지휘 하에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완공한 것이었다.

셋째, 미 합참은 인천상륙작전 재검토 의사를 거듭 타진했다. 기계, 안강에 이어 영천까지 실함되자 미 합참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맥아더 장군에게 인천상륙작전을 취소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보완하는 것으로 재검토할 것을 권유하는 의사를 타진했다.

넷째, 영천이 돌파될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한국을 한때 포기하겠다고 검토했다.
당시 미 합참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를 포함해 62만 명을 미국령 사모아도에 재배치해 신한국을 창설하겠다는 계획(New Korea Plan)을 승인했다. 이 계획은 한국민들의 반발을 고려해 사전에 거론하지 않았다.
9월 7일 영천 방어가 가망이 없어졌을 때,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이 철수계획을 알려 줬다.

정일권 참모총장은 영천을 탈환한다면 이 계획을 백지화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워커 장군은 “물론이다. 영천만 되찾는다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포항·안강·기계·다부동·왜관·창녕·마산 등 모두가 이곳 영천만 무사하면 다 무사해진다”고 암시할 만큼 영천의 중요성이 부각됐음을 알 수 있다.

유재흥 장군이 말하는 영천전투-美 전차소대 긴급지원 아군 사기진작 큰 효과(증언)

국군 2군단장으로 영천 전투에서 아군 승리에 기여한 유재흥 전 국방부장관.
국군 2군단장으로 영천 전투에서 아군 승리에 기여한 유재흥 전 국방부장관.
 1950년 9월 5일 전선을 시찰하고 경북 영천군 하양읍에 있는 군단 사령부에 돌아올 때 작전참모에게 급보를 받았다. 아군 8사단의 방어진지가 돌파당했으며 전황이 매우 불리하다는 것이다. 만일 영천의 전선이 무너질 경우 적은 대구 또는 경주 방면으로 진격할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적이 대구로 향하면 2군단뿐만 아니라 미 제1기병사단의 후방까지 차단당할 위험이 있었다. 또한 적이 경주로 향하면 12사단과 합세해 부산으로 직접 진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전선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고 판단했다.

대비책을 논의하고자 1사단장, 6사단장, 참모들을 모아 놓고 급히 군단작전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영천은 오늘 밤이 고비인데 전세는 불리하며 육군본부도 부산으로 이동했다.
만일 영천선이 무너지면 우리는 부산교두보선으로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나는 현 방어선을 한 자 한 치라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방어선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므로 1사단과 6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를 뽑아 중점적으로 병력을 집중 사용할 방침이니 나의 최종 결의에 동의해 주기 바란다.”
군단장의 결심에 대해 두 사단장은 “담당 정면에도 병력이 모자라서 적을 막아내기가 힘든 이때에 1개 연대를 차출한다는 것은 전 전선의 위기를 자초하는 도박”이라며 병력 차출에 회의적인 입장을 밝혔다.

나는 “적의 주공이 영천 정면이라는 것은 이미 명백한 사실”이라며 “만일 적이 영천을 점령한 후 대구 혹은 경주 어느 쪽으로 향하든 간에 우리의 급선무는 영천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양개 사단에서 1개 연대씩 병력을 차출하는 것은 도박이 아니다”며 “적은 이번 공세에서 이미 약화됐기 때문에 우리가 병력을 전용해 중점적으로 집중 사용한다면 기필코 적을 격파할 수 있다”고 나의 결심을 피력해 회의 참가자들의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2개 연대 차출 결정을 내린 후 다음 문제는 전차였다. 전차 1개 소대(5대)만이라도 있다면 적에게 큰 위협이 되고, 아군의 사기를 올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미 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을 만나 전차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군 사정도 급했기 때문인지 ‘힘든 일’이라고 대답했다. 게이 소장은 “귀 군단은 후퇴할 것인가요”라고 질문해 왔다.

나는 “더 이상의 후퇴는 원하지 않는다”며 “전차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이 직접 선두에서 싸우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게이 소장은 “신중히 생각해 보자”며 약간은 함축성 있게 대답을 했다.

미 8군사령부로 찾아가 워커 중장에게 “2군단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전차가 꼭 필요하다”고 다시 상황을 설명하자 “게이 소장과 협조해 보라”고만 할 뿐 확답은 없었다.

전선 상황이 급박해 일단 국군 8사단으로 돌아와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데 미군 측에서 “내일 아침부터 미군 전차 1개 소대가 지원할 것”이라고 통보해 왔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확보한 2개 연대와 전차 소대는 아군의 영천전투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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