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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경제
성장잠재력 반등 위한 2027년 예산안
경기가 살아나고 세수가 넘치는데 왜 다시 두 자릿수 지출 확대가 필요한가. 답은 경기부양이 아니라 성장잠재력에 있다. 상반기 실질GDP가 3.8% 성장했어도 생산연령인구 감소와 생산성 정체라는 구조적 저성장의 위험은 그대로다. 지금의 회복을 잠재성장률 반등으로 이어가지 못하면 반도체 경기가 식은 뒤 같은 문제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번 호황은 그 방향을 바꿀 흔치 않은 기회다.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응용데이터사이언스 교수 2027년 예산안이 총수입 880조 8000억 원, 총지출 820조 9000억 원으로 짜였다. 지출은 한 해 전보다 12.8% 불어난 사상 최대치다. 겉모습만 보면 꽤 공격적인 확장재정이다. 하지만 이번 예산안의 성격은 지출 증가율 하나로 읽히지 않는다. 급증한 세입, 새로 만든 미래대응기금, 대규모 지출구조조정, 성장잠재력 투자가 한 묶음으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이 지난달 28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7년도 얘산안 상세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6.9.1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출발점은 세입이다. 반도체 호황으로 법인세와 소득세가 크게 불면서 국세수입은 584조 4000억 원, 전년 본예산 대비 194조 2000억 원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 덕에 지출을 93조 원 늘리고도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GDP의 0.1%로 줄고, 국가채무 비율은 48.3% 수준에 머문다. 지출을 늘리면서 건전성까지 개선되는, 흔치 않은 조합이다. 더 주목할 대목은 늘어난 세수를 전부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는 최근 10년 내국세 증가 추세를 웃도는 162조 원을 미래대응기금에 넣기로 했다. 이 중 45조 4000억 원만 청년, 성장동력, 지방, 교육·인재에 투입하고 나머지는 여유자금으로 남긴다. 반도체처럼 부침이 심한 산업에서 얻은 세수를 모두 경상지출로 바꾸면 업황이 꺾일 때 재정이 흔들린다. 기금은 안정화 장치이자 미래투자 재원이라는 두 역할을 겨냥한 것이다. 지출의 무게중심도 뚜렷하다. 3대 메가프로젝트와 AI 관련 투자는 10조 8000억 원에서 21조 3000억 원으로 두 배 가까이 뛴다. 반도체 거점과 원천기술, 피지컬AI, 전력·용수·산업단지가 대상이며 프론티어급 모델 개발을 위한 GPU 1만 장도 지원한다. 핵융합, SMR, 양자, 우주항공 등 미래 성장엔진 예산은 62조 8000억 원으로, 청년 예산은 28조 2000억 원에서 43조 3000억 원으로 늘어 인턴학기, 청년미래적금 소득요건 폐지, 역세권 공공임대가 담긴다. 복지가 아니라 인적자본과 자산형성에 대한 투자로 청년정책을 바라본 셈이다. 지방에는 우대원칙 적용 사업과 포괄보조를 늘려 이전지출이 아닌 교육·산업·일자리를 함께 키우는 방식을 택했다. 동시에 재량지출 38조 6000억 원을 구조조정하고 2100여개 사업을 정리했다. 교육교부금의 내국세 연동도 55년 만에 손봤다. 기존 사업을 놔둔 채 새 사업만 얹던 관행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총액이 커져도 생산성 낮은 지출을 걷어내 성장 분야로 옮긴다면 재정의 질은 달라진다. 남는 질문이 있다. 경기가 살아나고 세수가 넘치는데 왜 다시 두 자릿수 지출 확대가 필요한가. 답은 경기부양이 아니라 성장잠재력에 있다. 상반기 실질GDP가 3.8% 성장했어도 생산연령인구 감소와 생산성 정체라는 구조적 저성장의 위험은 그대로다. 지금의 회복을 잠재성장률 반등으로 이어가지 못하면 반도체 경기가 식은 뒤 같은 문제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번 호황은 그 방향을 바꿀 흔치 않은 기회다. 이번 재정은 소비를 자극해 총수요를 키우는 재정과 달라야 한다. AI와 R&D, 전력망, 인재양성처럼 공급능력 자체를 넓히는 투자여야 한다. 수요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공급을 키우는 재정이기에 긴축적 통화정책과 반드시 충돌하지도 않는다. 통화정책이 단기 물가와 금융안정을 맡고, 재정이 중장기 생산성을 맡는 정책혼합이 가능하다. 고금리에 시달리는 중산층·서민을 겨냥한 표적형 지원이 더해지면 더 좋다. 한국 경제에 절실한 것은 한 해의 높은 성장률이 아니라 잠재성장률의 방향 전환이다. 2027년 확장재정의 성패는 얼마를 썼느냐가 아니라, 몇 년 뒤 우리 경제가 얼마나 더 생산하고 얼마나 생산적이 됐느냐로 가려질 것이다.◆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 응용데이터사이언스 교수 서울대 경제학 학·석사, 美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로 2008년부터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구 분야는 공공경제·재정학(출산·지방재정·기초소득), 노동경제학(최저임금·고령자 노동), 복지정책평가(보육·빈곤), 조세정책(종부세·조특법), 빅데이터·데이터사이언스이다. 빅데이터연구소장을 맡아 정책 평가와 실증분석을 수행해왔다.
2026.09.11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응용데이터사이언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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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를 넘어
한불 뤼미에르 서밋, 영상문화의 미래를 위한 '빛'이 되기를
뤼미에르 서밋은 단순한 한불 영상 투자협약이 아니라, '문화적 예외'와 '문화 다양성' 원칙을 플랫폼·생성형 AI 시대에 적용한 전 지구적 문화 거버넌스 시도다. 한류의 주체인 한국은 이를 계기로 책임 있는 문화정책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9월 7일,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발의하고 이재명 대통령이 공동의장으로 참여한 영상의 미래에 대한 세계 회의가 열렸다. 이번 회의를 일부 미디어가 섣불리 규정하듯 단순한 한불 영상 산업 협력 행사로만 보기는 어렵다. 양국 대통령이 공동의장을 맡고 수십 개국의 정부 관계자와 영상산업 지도자, 글로벌 플랫폼 책임자, 영화감독과 배우 등 창작자, 영화제와 문화기관이 참여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영상의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문제를 공유하고, 새로운 영상 다자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양국이 향후 5년간 총 10억 유로를 투자하기로 한 '한불 영화 파트너십'으로 이번 회의를 축소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큰 맥락에서 살피면, 이번 뤼미에르 서밋은 마치 1990년대 말,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 문화 산물까지 자유무역의 대상으로 취급하려는 미국의 압력에 맞서 '문화적 예외(Cultural Exception)'의 원칙 아래 프랑스가 주도하고 한국이 연대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수세적인 의미를 지녔던 문화적 예외 원칙은 이후 유네스코로 장을 옮겨 보다 적극적 개념인 '문화 다양성' 철학으로 발전했다. 이번 뤼미에르 서밋은 이 원칙을 플랫폼 경제와 생성형 인공지능(AI)의 시대라는 변화한 환경에 적용한 전 지구적 문화 거버넌스의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문화 다양성' 개념은 생물 종의 다양성이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에 중요한 것처럼, 문화적 표현과 생산의 다양성 역시 인류 문화의 지속과 발전에 핵심적이라는 인식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이번 서밋에서 "플랫폼과 AI가 지배하는 환경에서 다양한 사회가 어떻게 스스로 문화적 표현을 생산하고 세계적으로 순환시킬 능력을 지닐 것인가?"로 번역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 많은 시간을 스크린 앞에서 보내고 있다. 그러나 영화와 드라마처럼 완결된 작품들은 소셜미디어의 무한 피드와 숏폼 콘텐츠, 알고리즘 추천, 생성형 AI가 촉발하는 주의력 경쟁 속에서 점점 가시성을 잃고 있다. 이제 영상산업의 경쟁은 극장 대 스트리밍의 대결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영화와 텔레비전, 스트리밍, 게이밍, 소셜미디어, AI를 하나의 영상 환경으로 묶고, 산업정책과 문화 주권, AI 윤리, 저작권, 미디어 리터러시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특히 시청자가 특정 프로그램이나 작품을 만날 가능성, 이른바 '디스커버러빌리티(Discoverability)'는 단순한 마케팅 문제가 아니다. 이는 '문화 주권(Cultural Sovereignty)'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는 자각이다.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이 보이지 않게 되는 지를 플랫폼 알고리즘에만 맡길 수 없지 않은가. 이재명 대통령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7일(현지시간) 국제 영화·영상 정상회의 '뤼미에르 서밋'이 열리는 생폴드방스 매그 재단에서 행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2026.9.7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프랑스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한국을 파트너로 삼았다. 한국은 서구가 지배하는 세계 영상산업 질서 속에서 자국의 독자적인 문화 생산 능력을 구축하고 그것을 세계적으로 유통하는 데 성공한 한류의 주체다. 압축적인 근대성을 보여 온 한국은 프랑스의 관점에서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다양한 국가를 이 프로젝트에 연관시키기에 적합한 동반자다. 동시에 국가 주도 엘리트 문화정책 전통이 강한 프랑스와는 달리, 지역의 문화산업과 민간의 창의성,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아래로부터 세계적인 문화유통을 성공시킨 파트너다. 즉, 한국은 단순한 문화교류 상대가 아니라 과거의 개발도상국도 전 지구적 문화 유통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다. 또한 문화정책을 실제 산업과 창작 현장으로 연결해 추진할 수 있는 체력과 실력을 지녔다. 게다가 플랫폼과 생성형 인공지능이 가져온 압박을 최전선에서 경험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한국은 문제의 심각함을 깊이 인식할 수 있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한국 정부와 서밋 참가자들이 이번 회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 논의를 국내 문화정책으로 어떻게 번역해 낼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한국이 이번 기회를 화려한 넷플릭스 시대 이후 점점 빈약해지고 있는 한류 콘텐츠의 위기를 극복하는 계기로 삼기를 기대한다. 이번 서밋의 의제에는 현재 한국 정부가 추진 중인 영상문화보존(아카이브)이 포함되어 있고, 마지막 의제는 한국에서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영상교육이다. '뤼미에르'는 불어로 빛을 의미하는 동시에 영화의 역사를 만들어낸 뤼미에르 형제, 빛의 예술인 영화, 계몽의 시대를 환기하는 삼중의 의미를 띄는 말이다. 이번 뤼미에르 서밋이 단순한 양국 간 투자협약을 넘어서 한국이 한류의 주체로서 적극적이고 책임 있는 문화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한류 연구자로 정진하면서 팬덤 온라인 참여관찰로부터 데이터 분석까지 다양한 연구방법을 거쳤으나 스스로는 여전히 세상 속 의미의 생산을 묻는 기호학자라고 이해한다. 세계화와 디지털문화시대의 한류, 드라마의 모든 것, BTS길 위에서를 출판했고 넷플릭스의 영향, 한국문화산업, 한류현상의 이론화를 위해 국제적 연구자 네트워크를 가동하며 다년간 연구 중이다.
2026.09.09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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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새 지평
프랑스 국빈방문, 문화·미래산업으로 넓어지는 실용외교
이재명 대통령의 프랑스 국빈방문은 한국 외교가 실용외교 1단계를 완성하고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이로써 한국 외교는 '안보·경제 복합외교'에서 '미래산업·문화·가치를 아우르는 전방위 네트워크 외교'로 발전할 것이다. 홍현익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 이재명 대통령의 프랑스 국빈방문은 한국 외교가 실용외교 1단계를 완성하고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대통령은 9월 7일 프랑스 남부 생폴드방스에서 마크롱 대통령과 '제1회 뤼미에르 정상회의'를 공동 주재한다. 영화와 글로벌 콘텐츠 거버넌스를 논의하는 문화·과학기술·가치 정상회의를 주도하면서 안보와 경제를 중심으로 전개해 온 실용외교의 외연을 문화와 미래산업으로 확장한다. 인공지능(AI)이 영화·드라마·게임 등 콘텐츠 산업에 가져올 변화와 새로운 산업모델을 세계 지도자들과 함께 논의하는 것은 한국의 문화적 소프트파워를 국제규범 형성에 기여하는 외교적 자산으로 발전시키면서 '케이(K)-컬처'의 세계적 위상을 더 격상시킬 것이다. 취임 이후 한국은 한미동맹을 안정시키고 중국·일본과의 관계를 복원하는 한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유럽연합(EU), 인도와 베트남 등 다양한 국가 및 지역과 협력을 넓혀왔다. 이재명 대통령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4월 3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프랑스 확대 정상회담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제 전략적 외교 자율성과 다자주의를 축으로 독자적 외교 공간을 확보해 온 프랑스와의 협력을 통해 AI 시대 문화외교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게 된다. 이로써 한국 외교는 '안보·경제 복합외교'에서 '미래산업·문화·가치를 아우르는 전방위 네트워크 외교'로 발전할 것이다. 한불 수교 140주년을 맞아 양국 관계를 글로벌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격상하고 AI·양자·우주·원자력·과학기술·교육·문화 분야의 협력을 확대하며 문화와 기술의 중견국 다자주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은 한국외교의 큰 발전이다. 세계로 확산된 K-콘텐츠와 한국의 첨단기술, 그리고 문화·예술을 외교자산으로 활용해 온 프랑스의 경험을 결합한다면 새로운 협력 모델도 창출할 것이다. UN 총회 등 한국외교의 향후 과제 이제 한국은 중견국 책임실용외교 2단계로 접어든다. 이번 방문 성과를 9월 후반 유엔, 11월 선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12월 마이애미 주요 20개국(G20) 정상외교와 연계해 외교적 시너지 효과를 높여야 한다. 전작권을 환수하면서 한미동맹을 굳건히 유지하되 중국·일본·EU와의 협력을 심화하고, 인도·아세안·중동·중남미·아프리카 등 글로벌 사우스와의 관계도 확대해야 한다. 특정 진영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이고 외교적 자율성을 키우는 것이 중견국 한국의 책임있는 실용외교다. 외교 지평의 확대와 함께 한반도 평화도 더 강화해야 한다.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와 북러 군사협력으로 안보환경은 불안하다. 확고한 한미연합방위태세를 유지하면서 남북대화의 문을 열고 북미대화 재개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 제재와 억지를 넘는 북한 관리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에도 한반도 안정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함을 설득하여 대화와 협력의 공간을 넓혀야 한다. 한류의 문화 영향력, 세계 5위 국방력, 10위권의 경제력과 기술력을 가진 한국은 더 이상 국제질서 변화에 수동적으로 끌려갈 필요가 없다. 동맹을 바탕으로 외교적 자율성을 키우고, 국익과 국제적 책임을 조화시켜 한반도 평화와 세계의 공동번영에 기여하는 것이 프랑스 방문 이후 한국 외교가 나아갈 방향이다.◆ 홍현익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 27년 간 세종연구소에서 북핵문제, 남북관계, 한미동맹, 한러관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 한국의 국가안보와 국가전략을 연구했다. 한반도 정세 안정과 평화 구축 및 평화통일을 위해 화해와 공동번영 및 국익 극대화를 지향하는 실용외교를 주창해왔다. 국정기획위원회 외교안보 분과장을 맡았다.
2026.09.04
홍현익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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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무역 인사이트
FTA 강국 한국의 빈자리, CPTPP로 채울 수 있다
무역협정에도 타이밍이 있다. 늦게 들어가면 입장권만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짜인 좌석표와 규칙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CPTPP 가입은 FTA 하나를 더하는 일이 아니다.…흔들리는 자유무역 질서 속에서 한국이 환태평양의 시장과 공급망, 다음 통상규범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무역협정에도 타이밍이 있다. 늦게 들어가면 입장권만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짜인 좌석표와 규칙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을 바라보는 한국의 처지가 그렇다. CPTPP는 더 이상 2018년의 11개국 협정이 아니다. 영국이 2024년 첫 신규 회원으로 합류해 현재는 12개국, 세계 GDP의 14.4%를 포괄하고 있다. 코스타리카의 가입 협상도 실질적으로 마무리됐고, 우루과이와는 협상이 진행 중이다. EU도 CPTPP와 교역 다변화를 위한 통상대화를 시작했다. 미국의 보호무역이 거세지고 자유무역의 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CPTPP는 회원국들을 공통 규칙으로 묶는 통상 플랫폼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에도 이런 규칙이 필요하다. 11일 경기 평택항에 수출용 컨테이너와 차량들이 선적을 기다리고 있다. 2026.8.11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한국은 2022년 CPTPP 가입 추진을 의결했지만 아직 가입 신청을 하지 못했다. 농수산물 개방 우려와 정치적 부담이 결단을 늦췄다. 정부는 지난 8월 27일 사회적 논의와 의견 수렴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여론 수렴에 그치지 않고 가입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실질적인 검토로 이어가는 일이다. 판단을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무작정 미룰 수도 없다. CPTPP의 규범이 고도화되고 앞선 국가들의 협상 결과가 기준으로 쌓이면, 뒤늦게 가입하는 나라가 별도의 예외나 긴 유예기간을 인정받을 공간은 좁아질 수 있다. 결국 기다림에도 비용이 든다. 아세안 10개국과 한국·중국·일본·호주·뉴질랜드 등 총 15개국이 참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있는데 왜 CPTPP가 필요하냐는 질문도 나온다. RCEP의 강점은 중국·아세안을 아우르는 시장의 폭이고, CPTPP의 강점은 높은 수준의 시장개방과 통상규범, 캐나다·멕시코에서 중남미까지 이어지는 공급망의 깊이다. 둘 중 하나를 고를 일이 아니다. 두 협정을 함께 활용해야 기업이 시장과 조달처를 넓힐 수 있다. 공급망이 안보와 직결되는 시대에는 협정 네트워크 자체가 기업의 안전판이 된다. 특정 시장에서 규제나 갈등이 커질 때 대체 조달처와 생산거점을 찾고, 다른 회원국 시장으로 판로를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CPTPP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는 아니다. 한국은 기존 회원국 대부분과 이미 FTA를 맺고 있어 추가적인 관세 인하 효과만 보면 실익이 크지 않을 수 있다. 멕시코와는 아직 FTA가 없고, 일본과는 RCEP가 발효돼 있지만 개방 수준과 활용 범위에 한계가 있다. CPTPP는 이 빈틈을 메울 수 있다. 특히 역내 누적원산지는 한국에 중요한 이점이다. 가입 후에는 한국산 소재·부품과 베트남·멕시코·캐나다 등 회원국의 생산공정을 합산해 원산지를 인정받을 수 있어 최종 제품이 CPTPP 원산지 기준을 충족하기가 쉬워진다. 협정마다 제각각인 원산지 기준과 증명 절차로 기업 부담이 커지는 스파게티 볼 효과도 줄일 수 있다. 여러 회원국에 걸친 생산공정을 하나의 역내 공급망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소재·부품과 중간재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에 특히 유리한 부분이다. 더 본질적인 가치는 규범에 있다. CPTPP는 상품 관세를 넘어 서비스·투자·전자상거래·노동·환경을 포괄한다. 데이터 이동과 전자문서, 투자 보호 등 기업의 해외 활동을 좌우할 규칙이 담겨 있다. 우리 기업은 보다 일관되고 예측 가능한 규칙 아래 서비스 수출과 디지털 거래, 해외투자를 확대할 수 있다. 한국도 협정의 개정과 확장 과정에서 국내 기업의 입장을 반영할 통로를 갖게 된다. 가입의 가장 큰 쟁점인 농림수산업의 부담은 협상과 국내 정책으로 함께 풀어야 한다. 품목별 피해와 농어민의 사정을 세심하게 살펴 민감품목에는 충분한 이행 기간, 저율관세할당(TRQ), 세이프가드 등을 조합해야 한다. 농어민의 소득과 생활이 흔들리지 않도록 실질적인 보완 대책도 빠질 수 없다. 농어업을 계속할 농어가에는 생산비 절감과 품질 향상, 가공·유통·수출을 지원해야 한다. 경영을 이어가기 어려운 농어민에게는 본인의 뜻과 형편을 살펴 안정적인 소득과 전환의 길을 열어두는 일도 중요하다. 대책은 가입을 위한 사후 보상이 아니라 협상 전부터 농어민과 함께 마련해야 한다. 가입 신청은 모든 시장개방을 확정하는 서명이 아니라, 기존 회원국들과 민감품목의 개방 수준과 이행 기간, 협정 이행 여건을 협의하는 출발점이다. CPTPP 가입은 FTA 하나를 더하는 일이 아니다. 흔들리는 자유무역 질서 속에서 한국이 환태평양의 시장과 공급망, 다음 통상규범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연세대 경제학과와 KDI대학원(MBA)을 거쳐 건국대에서 무역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 한국무역협회 입사 후 30년 이상 수출입 동향분석과 글로벌 통상전략 수립을 주도해온 무역 전문가다. 현재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으로서 수출경쟁력 강화, 산업별 공급망 안보, 신통상질서 대응 등 급변하는 대외 환경 속에서 우리 기업이 나아갈 이정표를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26.09.04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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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싶다, 골목의 맛
여수에서 밥집 찾기
여수에서 몇 끼니를 한다면 불편한 일도 꽤 있다. 첫째는 처음 들어간 집이 좋았으니, 이보다 더 맛있는 집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다. (중략) 둘째는 우리의 위는 딱 하나이고 많이 먹어봐야 하루 세 끼다. 먹을 게 널린 여수 같은 동네에서 말이다. 박찬일 셰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오래된 성당이 하나 있다. 오래 지켜본 여수는 많이 변해서, 시내는 어느 동네를 가도 나 같은 관광객 무리가 가득 몰려다닌다. 그건 그대로 재미있는 일이고 여수의 모습이긴 하다. 그래도 일부러 여수 사람들이 사는 오래된 동네, 물론 그들도 이제는 아파트에 살고 그게 현대의 삶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해도, 그런 곳이 어디메쯤 있겠거니 하고 찾아보곤 한다. 그렇게 그 언덕의 산동네랄까, 여수가 지금 같은 관광지가 아닐 때 사람이 살던 동네를 보았다. 바닷가의 큰 도시가 그렇듯 매립을 하지 않은 본디 모습은 필시 기다란 산의 덩어리가 급하게 흘러내리다가 좁은 해안을 만들고 바다를 만나는 지형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동네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곳, 산이 흘러내리는 언덕바지에 있었다. 천주교도는 아니지만 성당이란 대체로 개방적이어서 누구든 들러서 경내에서 잠시 안식을 찾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 성당은 목줄 없는 동네 개들도 드나들 만큼 소박한 그런 모습이어서 이방인이 불쑥 들어가는 게 어렵지 않았다. 경내는 무슨 공사를 하는지 나이 지긋한 남녀가 돌을 옮기고 화단을 가꾸느라 분주하였다. 신부님이 신도들과 함께 팔을 걷어붙이고 일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신부님이 누군지 여쭈진 않았지만, 경내를 둘러봐도 되냐고 내가 어느 신도를 붙잡고 물었을 때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한 사내에게 "신부님, 어찌 구경을 좀 하신다는데…"하고 허락을 구하는 바람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사람이, 열려 있는 성당 구경하는데 무슨 허락을 받소, 하는 표정이어서 나는 아주 행복했다. 그렇게 동네를 돌며 이제는 사라져가는, 전국의 오래된 중소 도시에나 남아 있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올 법한 70, 80년대 분위기를 흠뻑 느꼈다. 한편으론 어쩔 수 없이 조바심이 났는데 그건 순전히 여수에선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었다. 자아, 무얼 먹나. 음식 글을 쓰고 요리사로 일하는 나도 타지에 가면 맛있는 집을 찾는 수고를 하는 건 똑같다. 일행이 있으면 더 그러해서 으레 내 몫이 되곤 한다. 오래전, 여행지에서 식당을 찾는 방법은 첫째는 감이었다. 척 보고 저 집이 밥을 좀 하겠는가 하고 관심법을 동원해야 했다. 그건 지금도 유효한 방식이었다. 이건 어쩌면 꽤 과학적일 수 있다. 실패를 거듭하며 감이 쌓이면 나름의 데이터가 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열고 이런저런 검색을 하면 효율적인데 대체로 요즘은 '걸러내는' 용도로 쓸 때도 많다. 그저 호의이든 상업적인 거짓말이든 써놓은 걸 부정해야 맛있는 집을 찾을 수 있다는 건 참 불행한 일이다. 무슨 뜻인지 아실 테다. 여수세계섬박람회 개막을 앞둔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여수의 하화도 풍경. '섬힐링밥상'으로 지정된 식당이 있는 곳이다. 2026. 7.16. (ⓒ연합,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어쨌든 그렇게 들어간 한 식당은 순전히 감으로 찾은 것이었다. 적당히 허름하고 적당히 너저분하고 적당히 무뚝뚝한 그런 집. 앞서 '감'이 작동하는 건 미신적이긴 하다. 이를테면, 정수기 옆에 쌀자루가 쌓여 있는 집, 손님 적은 한가한 시간에 아주머니가 탁자에 앉아 쪽파나 고구마 줄기를 까고 있는 집, 둥그런 양은 쟁반이 켜켜로 쌓여 있어서 동네 밥배달을 한다는 걸 알 수 있는 집, 조상의 흑백사진이 여러 장 붙어 있는 집, 벽에 붙여 놓은 메뉴 가격을 덧칠로 고쳐놓은 집…. 그 집은 쌀가마가 정수기 쪽은 아니었고, 좌식 탁자가 놓여 있는, 우리가 오랫동안 방이라고 불러오는 공간에 놓여 있었다. 나는 내내 그 쌀가마에 등을 기대면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쌀가마가 등을 받쳐주는데 맛이 없으면 이상할 일. 전라도 밥집을 골라 들어가서 대체로 실패가 적은 이유는 흐뭇한 반찬 덕이라는 건 여러분도 동의할 것이다. 슬쩍 피로가 얹혀 있는 아주머니들의 표정까지도 맛있는 반찬이 되곤 한다. 이렇게 찬을 많이, 맛있게 준비하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크시오, 이런 마음으로 짜게 먹지 말라는 의사의 조언 같은 건 애써 무시하고 반찬을 싹싹 비우게 된다. 전라도에서, 그것도 여수에서 몇 끼니를 한다면 불편한 일도 꽤 있다. 첫째는 처음 들어간 집이 좋았으니, 이보다 더 맛있는 집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다. 첫 시험을 95점 맞았으니, 그다음에는 100점을 받아야 하는 셈이다. 둘째는 우리의 위는 딱 하나이고 많이 먹어봐야 하루 세 끼다. 먹을 게 널린 여수 같은 동네에서 말이다. 나름대로 묘수가 있다. 첫 번째 식당 주인에게 묻는다. 경험적으로 아주 '타율'이 높다. 주인이 더러는 그 자리에 곧바로 전화해서 예약 내지는 협조도 얻어낸다. "타지서 조카들이 왔는데 저녁에 갈 것잉게, 이이….그려." 두 번째는 소화시키는 약을 사 먹는다든가 하는 것도 좋은데, 기왕이면 걷는다. 걸음은 최상급의 소화제다. 그러다 보면 동네의 속살도 보고 관광지 아닌 사람 사는 마을을 볼 수 있다. 관광객 말고 동네 사람들이 가는 식당에 우연히 앉는다. 꼭 바다 것이 아니어도 좋은 것이다. 여수에서 동네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장면이나 냉면을 먹는 사람도 있다. 해산물과 생선도 하루 이틀이지. 여담인데, 바닷가 도시는 의외로 육고기와 중국음식 같은 걸 잘하는 집이 많다. ◆ 박찬일 셰프 셰프로 오래 일하며 음식 재료와 사람의 이야기에 매달리고 있다. 전국의 노포식당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일을 오래 맡아 왔다.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등의 저작물을 펴냈다.
2026.09.02
박찬일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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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일의 미래
아웃풋과 아웃컴, 쥐꼬리를 모아선 안 된다
아웃풋은 연구자가 만들어낸 산출물이고, 아웃컴은 그 산출물이 사회와 산업에 만들어낸 변화다. 쥐꼬리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진짜 쥐가 줄어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산출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이고, 성과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무엇이 달라졌는가"다.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1902년 하노이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총독부는 쥐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당시 총독(뒷날 프랑스 대통령이 되는 폴 두메르)이 자랑스러워하던 하수도 건설 사업이 뜻하지 않게 도시 역사상 최대의 쥐 서식지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현상금을 걸었다. 쥐 한 마리당 1센트. 쥐꼬리를 잘라서 내면 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 관리들은 곧 꼬리 없는 쥐들이 하노이를 돌아다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쥐잡이들이 쥐를 잡아 꼬리만 자른 뒤 하수도로 돌려보내 더 많은 쥐를 낳게 했다. 교외에서는 심지어 현상금을 받으려고 쥐를 사육하는 농민들까지 나타났다. 1958년 5월 중국의 마오쩌둥 주석은 연간 철강 생산 목표를 1070만 톤으로 올릴 것을 요구했다. 그 전해의 목표는 535만 톤이었다. 목표를 맞추기 위해 모든 가정과 도시 노동자와 농민이 철강 생산에 동원됐다. 뒷마당 용광로도 짓게 했다. 여기서 나온 철 1톤의 비용은 현대식 용광로의 두 배였고, 그나마 저급해서 쓸 수도 없었다. 더 치명적인 결과는 따로 있었다. 많은 농업 노동자가 철 생산을 하느라 농사를 포기해야 했고, 결국 대기근의 원인이 됐다. 한국 사례도 있다.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의 최근 5년간 연구개발(R&D) 과제 성공률은 모두 98퍼센트(%)를 넘었고, 2020년에는 99.7%를 기록했다. 완료 과제 982개 중 979개가 성공했다. 그런데 사업화 성공률은 연평균 42.9%다. 영국 70%, 미국 69%에 턱없이 못 미친다. 세 사례의 공통점이 있다. 아웃풋(Output, 산출)과 아웃컴(Outcome, 성과)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R&D 과제의 아웃풋은 흔히 다음과 같다. 국제 과학기술인용색인(SCI)급 논문 3편/ 특허 2건/ 시제품 제작. 과제가 끝나면 "논문 3편 나왔습니까?" "예." "특허 2건 냈습니까?" "예." "그러면 성공입니다." 이렇게 된다. 그 특허가 쓰였는지는 묻지 않는다. 논문이 인용되는지도 보지 않는다. 기업이 제품으로 만들었는지도 평가하지 않는다. 쥐꼬리만 가져오면 되는 것이다. 정부가 말하는 '성과'는 대부분 아웃풋이다. 반면 국민이 보고 싶은 건 아웃컴이다. 실제 제품으로 이어졌는지, 일자리가 늘었는지, 투자한 돈보다 더 큰 경제적 가치가 창출됐는지를 묻는다. 아웃풋은 연구자가 만들어낸 산출물이고, 아웃컴은 그 산출물이 사회와 산업에 만들어낸 변화다. 쥐꼬리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진짜 쥐가 줄어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산출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이고, 성과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무엇이 달라졌는가"다. '스마트공장을 3만 개 지원했다'는 것은 산출이고, '그 공장들의 생산성이 실제로 올랐는가?'는 성과다. 2018년 12월 대한민국 정부는 중소벤처기업부와 산업통상부 등 관계부처 합동으로 '중소기업 스마트 제조혁신 전략'을 발표하고, 당초 2022년까지 2만 개 보급 목표였던 스마트공장 계획을 3만 개 구축으로 확대(국내 제조 중소기업의 약 50% 수준)한다. 그리고 목표 시한이었던 2022년 말 기준 총 3만 144개를 구축하며 양적 목표를 공식적으로는 달성했다. 그런데 '2024 스마트제조혁신 실태조사'에 따르면 정작 전담IT·스마트화 인력을 갖춘 중소기업은 19.5%에 불과했다. 시스템 오류가 발생하거나 생산 공정이 바뀌었을 때 자체 유지보수가 불가능하니 도입했던 제조실행시스템(MES)나 전사적자원관리(ERP)를 점차 쓰지 않고 다시 수기 방식으로 돌아가는 사례가 빈번했다. 보급된 3만여 개 스마트공장 중 약 75.5%가 '기초 단계(단순 바코드 인식, 설비 가동 상태 모니터링 수준)'에 머물렀다. 국내 제조 중소기업의 약 50%가 이미 스마트공장이 됐다는데도 우리 주변에서 보기가 어려운 게 이 때문이다. 지난 3월 4일 코엑스에서 열린 2026 스마트공장·자동화산업전에서 현대글로비스 로봇개 '스폿'이 아틀라스를 지나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1. 평가의 중심을 산출물에서 성과로 분명하게 바꿔야 한다. 쥐꼬리를 모을 게 아니라 실제로 쥐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2. 과제 종료 시점이 아니라 종료 후 3~5년까지 실제 성과와 영향을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난관이 있다. 관료제는 구조적으로 산출로 도망친다. 예산 배정, 감사, 인사 평가가 모두 연내에 검증할 수 있는 숫자를 요구하는 한, 담당 공무원에게는 산출 지표를 쓰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다. 이것은 공무원의 무능이나 부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 설계의 문제다. 또 하나는 순환근무다. 대한민국 정부는 2년마다 집단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과장급 이상 공무원의 평균 근무연한이 이 정도로 짧기 때문이다. 정부의 암묵지가 2년마다 휘발한다. 3. 집단적 학습시스템을 제도화할 수 있다. 영국에는 왓웍스 네트워크(What Works Network, 무엇이 효과가 있는지를 검증하는 정책센터 연결망)라는 기관이 있다. 센터들의 역할 중 하나가 합의된 성과(outcomes) 집합에 견주어 정책과 관행의 효과를 평가하는 것이라고 명시돼 있다. '이 정책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가'는 질문에 답하는 일을 아예 상설 기관으로 만든 것이다. 9개의 독립 왓웍스 센터와 3개 준회원 기관으로 구성되며 2500억 파운드가 넘는 공공지출을 다룬다. 한국에도 사실 비슷한 제도가 있다. 현재 '정부업무평가 기본법'을 보면 중앙행정기관은 성과관리전략계획과 성과관리시행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성과관리시행계획에는 성과목표와 성과지표를 포함하게 돼 있고, 시행 계획의 이행 상황도 점검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까? 성과 평가의 위치가 달랐기 때문이다. 현재의 전형적인 흐름은 '정책기획 → 예산 → 집행 → 성과지표 작성 → 평가'다. 평가가 맨 뒤에 붙는다. 영국 정부는 평가를, 정책이 끝난 뒤 하는 일이 아니라 정책의 설계 단계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평가 결과가 다음 정책의 정책적 근거(rationale), 정책목표(objectives), 정책대안 평가(option appraisal)에 다시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4. 그러므로 '정부 정책기획서'의 표준 양식을 바꿔야 한다. 다음 항목을 의무적으로 추가해야 한다. ① 문제정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가?" 단순히 "청년 취업을 확대한다"가 아니라 "청년 X 집단의 취업률이 낮은 원인은 무엇인가?"까지 내려가야 한다. ② 증거 검토 "이 문제에 대해 현재까지 무엇이 밝혀져 있는가?" 국내외 연구, 기존 정부 사업 평가, 해외 왓웍스 자료 등을 검색하도록 한다. 여기서 인공지능(AI)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 AI가 국내외 연구·정부평가·행정데이터를 검색해서 증거지도를 자동 생성하도록 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협업툴을 제대로 만들어 해결할 수 있다. ③ 정책 가설 "이 정책이 왜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이 정책을 하면, 왜 원하는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는가?'를 단계별로 설명하는 정책의 인과관계 지도를 간단한 형태로 작성한다. 이렇게 하면 정책담당자가 '사업을 한다'와 '문제를 해결한다'를 혼동하기 어려워진다. ④ 증거 수준 각 정책 가설에 대해 근거가 되는 증거를 적고 그 수준을 함께 표기한다. 강한 실증, 상당한, 제한적인, 증거 부족, 사실상 가설 등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해야 정책의 근거를 처음부터 확인할 수 있다. ⑤ 평가설계 "어떻게 효과를 검증할 것인가?"를 적는다. ⑥ 중단·확대 조건 이 부분이 한국에는 특히! 필요하다. 정책을 시작할 때부터 어떤 결과가 나오면 확대하고, 어떤 결과가 나오면 수정하며, 어떤 결과가 나오면 중단할 것인가를 정해 둬야 한다. 이렇게 해야 정책평가가 감사가 아니라 학습이 된다. 내용이 길 필요는 없다. 모든 정책기획서 앞부분에 1~2장으로 정리하면 된다. 이렇게만 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정책담당자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쓰기 전에 '왜 이것을 하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아웃풋 대신에 아웃컴을 얘기하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특별히 강조해야 할 것이 있다. 실패를 문책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평가의 목적을 크게 정책 학습(Learning)과 책무성(Accountability)으로 나눈다. 학습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좋은 의사결정 그 자체다. '근본적으로 학습이란 좋은 의사결정에 관한 것이며, 평가는 정책을 계속할지, 어떻게 개선할지, 위험을 어떻게 줄일지에 대한 결정에 필요한 증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실패한 정책'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하다. 성공 사례만 모으면 반쪽이다. '어떤 정책이 실패했나? 왜 실패했나? 어떤 조건에서 실패했나?'를 축적해야 한다. 그래야 정책담당자가 새로운 정책을 만들 때 AI가 자동으로 "과거에 유사한 정책이 17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5건은 효과가 있었고, 8건은 효과가 없었으며, 4건은 평가가 불가능했습니다"와 같은 자료를 만들어주도록 할 수 있다. 우리가 모든 정책 자료들을 제대로 차곡차곡 쌓아둘 수 있다면, 기계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저장하고 있다면, 부처 간의 사일로를 없앨 수 있다면, 클라우드에서 협업하고 있다면, 그때 우리는 정부의 정책기획 프로세스 자체를 AI-native하게 바꿀 수 있다. 정책담당자가 정책을 기획하면 AI가 자동으로 "이 문제에 관한 기존 연구", "유사 정책", "정책효과", "반대 증거", "평가되지 않은 가정", "필요한 데이터", "추천 평가 방법들"을 찾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쥐꼬리를 세지 않아도 되고, 뒷마당 용광로를 짓지 않아도 된다.◆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KTH, 엠파스 등 IT 업계에서 오래 일했으며 현재 녹서포럼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IT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21년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눈 떠보니 선진국, 박태웅의 AI 강의 등이 있다.
2026.08.21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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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코리아의 글로벌 전략
한미동맹의 또 하나의 핵심축 '방위산업'
안보 영역에서 한국이 필요로 하는 만큼 미국도 한국이 더 필요하게 만들어야 한다…2030년대를 바라보는 한미 동맹과 미국의 글로벌 안보 전략은 '민주주의의 무기고'로서의 한국 방위산업이 필요하다. 백우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8·15 광복과 한국전쟁 이래, 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기점으로 한미동맹은 한국 안보의 근간이다. 이 동맹은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안보 구조의 핵심축으로 성장, 공고화됐고 이는 2026년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더 나아가 2020년대 들어 이 한국 안보의 근간은 전통적 군사 안보를 넘어 경제안보, 과학기술안보로 까지 확대돼 현재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으로 격상돼 있다. 이에 한국의 국가외교(statecraft)의 성패는 미국과의 관계에 크게 달려있다. 물론 이러한 한미 간의 양자 관계는 양가적인 측면도 존재하며 끊임없는 미세조정을 겪어 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미동맹을 당연시한다. 사실 인간은 꽤 오래된 것들에 대해서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제까지 그래 왔으므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는 믿음이다. 세상사에서 많은 경우 그렇다. 그러나 그런 당연한 것들도 생애주기적으로 큰 변화를 피할 수 없다. 그것은 개혁, 혁명, 붕괴, 회귀, 복고 등의 형태로 언젠가는 온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1990년대 냉전 종식 이후 세계 유일의 패권국으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구축하며 서구 동맹국과 파트너국에 일면 자비로운 베풂으로 장기적인 국가 이익을 추구하던 미국을 우리는 당연시해 왔다. 그 미국의 글로벌 전략은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중국, 그리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권위주의 국가들의 버거운 도전, 그리고 그로 인한 기존 국제질서 구조의 변화는 미국 국내 정치 구조의 변화와 결합해 이 패권국에 단기적 위협을 넘어 장기적 생존의 문제로 진화하고 있다. 트럼프 2기 정부의 소위 '거래 중심의(transactional)' 외교는 이러한 기존 미국 중심 국제질서 붕괴의 가장 핵심적인 증거다. 장기적 이익이 아닌 단기적인 이익을 그것도 때때로 '약탈적'인 형태로 추구하는 미국은 매우 낯설다. 한국에도 다른 인도·태평양과 유럽·대서양 동맹국들에도. 한미연합훈련 '을지 자유의 방패'(UFS)가 진행 중인 지난 18일 경기도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에 아파치 헬기가 대기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동맹의 가장 큰 연례 군사훈련인 '을지 자유의 방패'는 미국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미군 참여 대폭 축소 지시와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의 친분 강조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은 양국에게 처음이다. 곤혹스럽지만 그것이 2026년 미국의 대 한반도 외교·안보 정책의 현실이다. 혹여나 이 현실을 부정한다면 글로벌 TOP10 국가임에도 여전히 안보 제 분야에서 취약한 비핵국가 한국에는 치명적인 실수가 될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 분명한 것은 '어떤' 미국이던 한국은 미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북한과의 영구적인 평화적 관계 구축이든 통일이든 한반도의 근본적인 안보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여전히 한미동맹은 한국 안보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보 영역에서 한국이 필요로 하는 만큼 미국도 한국이 더 필요하게 만들어야 한다. 경제안보, 과학기술안보 측면에서 여러 전략적 대응과 더불어 군사안보 측면에서는 국방비 대폭 증액 및 군사력 증강과 동시에 방위산업 협력에 큰 힘을 쏟아야 한다. 미국은 군사안보 분야에서 한국이 어떻게 더 필요한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현재 한국의 방위산업, 즉 무기제조산업은 급격한 글로벌 팽창 시기를 거쳐 글로벌 TOP5 정도의 역량을 지니게 됐다. 그런데 미국은 무기가 많이 필요하다. 그것도 매우 많이. 그러나 그 무기들을 신속하게 대량으로 생산할 제조 능력을 상실했다. 한국은 그 결여된 능력을 채워줄 극소수 국가 중 하나다. 한국은 '마스가(MASGA)'로 상징되는 해양 무기 체계들을 넘어 육상 무기 체계들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이 근본적으로 구매하지 않는 완제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러 형태의 중간재를 공급하는 미국 무기제조산업의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으로, 대량 생산의 제조기지로, 서태평양 내의 유지보수(MRO) 조직으로서 말이다. 이를 통해 한국은 미국 군사안보의 필수불가결한 또는 현 정부의 구호대로 대체불가능한 주니어 동맹 파트너의 능력을 하나 더 장착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한미 간의 방위산업 협력 또는 결합 강화는 한국 방위산업이 한 단계 성장해 글로벌 시장과 안보 위계에서 더욱 유용한 변수로 성장함도 의미한다. 한국의 하드파워적 국가 역량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기회이기도 하고, 인공지능(AI) 반도체 산업에 국운을 걸면서 위태롭게 심화되는 피크코리아(Peak Korea) 현상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다. 2030년대를 바라보는 한미 동맹과 미국의 글로벌 안보 전략은 '민주주의의 무기고'로서의 한국 방위산업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한국은 미국에 더 쓸모있는 유용한 동맹국이 된다. 이를 통해 한국은 미국의 핵을 포함한 안보 보장을 더 요구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통합적 국방력 증강으로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을 더 확보하는 혁명적 변화가 병행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은 이미 전쟁 산업을 주력으로 하는 국가인 '죽음의 상인'의 양가적 이미지도 갖게 됐다. 그러나 이 어두운 이미지는 '민주주의의 무기고'의 밝은 이미지와 결합해 한국이 서구와 타 지역의 우호국들에게 더 유용한 존재가 됐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놀랍게 변해가는 미국에도 예외는 아니다.◆ 백우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UCLA 정치학 박사로 혁신 과학 시대의 정치적 新舊 난제에 천착하는 융복합정치학자다. 국내·국제정치의 상호작용, 글로벌 안보컨버전스, AI 정치와 정책을 연구한다. 주요 저서로는 피크코리아(Peak Korea)가 출간됐으며, 그 국제편에 해당하는 세계에서 한국은 얼마나 쓸모있을까?를 집필 중이다. 또한 Global Expansion of Korea's Defense Industry는 2026년 출간 예정이다.
2026.08.19
백우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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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균형
국지적으로 다가오는 재난에 지역이 맞서기
기후변화로 재난이 국지화·다양화하는 만큼 중앙정부 중심 대응을 넘어 권역별 방재체계를 구축하고, 시군구·읍면동의 현장 대응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지역 간 방재 격차를 줄이는 투자는 안전한 정주 여건을 만드는 지역균형발전 정책이기도 하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7월 28일 일본 구마모토에서 규모 6.8(일본 기상청 기준 7.1)의 강진이 일어났다. 최대 진도 7의 흔들림에 쇼핑몰 천장이 내려앉고 8만 가구가 단수됐지만, 사망자는 38명에서 멈췄다. 13일 뒤인 8월 10일에는 콜롬비아 서부 커피 산지를 규모 7.4의 지진이 덮쳐 240명 넘게 숨지고 1600여 동의 건물이 부서졌다. 실종자가 수천 명이라고 한다. 일본과 콜롬비아의 사례는 진원 깊이가 달라 단순 비교가 어렵지만, 같은 커피 벨트의 도시 아르메니아를 덮친 1999년 지진(규모 6.2)에서 1900여 명이 희생됐던 사례를 살피면 참조할 내용이 드러난다. 당시 아르메니아에서 무너진 건물 대부분은 내진 기준 도입 이전의 노후 건축물이었고, 1984년 내진 설계 도입 이후 지어진 건물은 대체로 버텼다. 재난의 피해 수준은 누적된 준비 수준을 따랐다. 일본인의 침착한 대응을 국민성으로 설명하는 이들이 많다. 구마모토 지진 당일 나는 후쿠오카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지진 1분 전 굉음의 재난 경고 문자가 오자 사람들은 앱을 켜서 진앙과 진도를 확인한 뒤 해야 할 일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진도는 3이었고, 사람들은 잠시 기다렸다가 강의를 속개하자고 했다. 만약 진앙이 가깝고 진도가 5가 넘으면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만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국민성 이야기는 절반만 맞다. 일본은 1978년 미야기현 해역 지진을 겪고 1981년 내진 설계 기준을 대폭 상향했고, 1995년 고베 대지진 이후 기존 건축물의 내진 보강을 촉진하는 법을 만들고 2000년에 기준을 다시 손봤다. 2016년 구마모토 지진의 복구 과정에서는 현과 시정촌 단위의 피난소 운영과 훈련 체계를 재정비했다. 이번 지진에서 주민들이 침착했던 것은 기질이 아니라 반복된 훈련의 산물이고, 건물이 버틴 것은 재난이 올 때마다 기준을 올리며 축적해 온 제도의 성과다. 그리고 그 훈련과 대응의 실핏줄은 언제나 기초자치단체였다. 한국은 2003년 태풍 매미 이후 초대형 태풍이 상륙한 경험이 없고, 2016년 경주와 2017년 포항 이후 이렇다 할 지진도 겪지 않았다. 공공시설물 내진 보강은 진척됐지만 민간 건축물의 내진율은 여전히 20%에 못 미치고, 내진 설계의 지역별 격차가 크다. 경주와 포항 지진을 겪은 경북의 내진율이 오히려 전국 최하위권이다. 얼마 전 만난 한 기후과학자는 이제 장마를 한국에서 찾기 힘들 거라고 전했다. 앞으로 여름비는 국지성 폭우로 쏟아지며, 태풍은 늦여름까지 달궈진 바다 위에서 힘을 키워 9월에 몰려온다는 것이다. 특히 농촌 가구의 대응이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6~7월의 장마, 이어지는 폭염, 그 이후의 태풍을 전제했던 농촌의 기상 대응 방식도 불확실성과 높은 기후 변동성에 맞춰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경험이 없는 재난이, 경험이 없는 지역에, 예고 없이 도착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3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일대에서 해운대구 재난 대응 안전한국훈련이 진행되고 있다. 이날훈련은 지진으로 인한 극장화재 및 인파사고를 가정해 실시됐다. 2025.11.3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한국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정점으로 한 중앙 중심의 방재 국가고, 이 체계는 대규모 재난에서 자원을 동원하는 데 강점을 보여왔다. 이번 콜롬비아도 취임 한 달을 갓 넘긴 대통령이 직접 통합지휘부를 꾸려 대응했지만, 도시마다 피해 수준을 가른 것은 그 지역의 건물과 병원, 그리고 현장의 대응 역량이었다. 컨트롤타워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얘기다. 재난이 전국에 균등하게 오지 않는다. 재난은 언제나 국지적으로 도착하고, 골든타임의 첫 대응은 시군구와 읍면동의 몫이다. 인구 감소가 빠른 지역일수록 방재 인력과 재정, 응급의료 자원이 부족하다. 재난 담당 공무원 한두 명이 풍수해와 지진, 산불과 폭염 대책을 도맡는 군 단위 지역이 적지 않고, 순환보직 탓에 경험은 축적되지 않는다. 서울에서 설계된 매뉴얼이 모든 지역에서 같은 속도로 작동하리라 기대하기 어렵고, 중앙의 컨트롤타워가 이 역량 격차 전체를 메우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중앙은 재난이 전개된 뒤 자원을 집중해 보낼 수는 있어도, 재난 초기 대응을 각 지역 대신 해줄 수는 없다. 기후 재난의 얼굴은 권역마다 다르다. 남해안은 태풍과 해일, 동해안은 지진과 산불의 위협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재의 기획 단위도 5극 3특 기준의 권역별로 유연하게 편성되어야 한다. 초광역권 협력이 지역산업 정책과 교통망 조성에 머물 이유가 없다. 권역별로 위험 지도를 그리고 장비와 전문인력, 거점병원과 대피 체계를 공동으로 기획하고 비축하는 것이다. 실제 훈련과 첫 대응은 일본의 시정촌이 그러하듯, 시군구와 읍면동이라는 더 작은 행정 단위가 몸에 익혀야 한다. 계획은 권역이 세우고, 힘줄과 핏줄은 동네 수준까지 이어서 엮어야 한다. 이것은 방재 정책이면서 동시에 지역균형발전 정책이다. 안전은 정주 여건의 출발점이고, 재난 대응 역량의 격차가 곧 지역 격차다. 재난에 취약한 지역에 사람과 기업이 머물기 어렵고, 사람이 떠난 지역은 다시 재난에 더 취약해진다. 방치되어 있는 빈집들이 만드는 다양한 위험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악순환을 끊는 투자가 방재다. 격변하는 기후 앞에서 스스로 진단하고 스스로 버텨낼 수 있는 기초를 만드는 것까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태풍 오기 전 지역의 준비가 수도권-비수도권 다양한 형태의 격차와 불평등을 줄이는 또 하나의 방법인 셈이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정치학, 문화인류학을 거쳐 공학 박사(과학기술정책 전공)를 받았다. 제조업, 엔지니어, 산업 생태계에 대해서 현장 연구를 수행 중이다. 저서로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2019),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2024) 등이 있다.
2026.08.14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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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AI 시대
샌프란시스코에서 확보한 두뇌와 기억, '몸'은 어떻게 만들까
샌프란시스코의 성과를 대한민국의 생산성과 산업 경쟁력으로 완성하는 길, 이제 그 마지막 퍼즐인 '몸'을 국가 AI 전략의 중심에 놓을 때다.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지난 7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대한민국 인공지능(AI) 전략의 미래를 보여주는 두 장면이 펼쳐졌다. 한쪽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에서 '샌프란시스코 AI 선언'을 발표하며 대한민국을 글로벌 AI 3대 강국으로 이끌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국내 기업과 엔비디아·브로드컴·오픈AI·앤트로픽 등 글로벌 AI 기업 간 대규모 반도체·AI 인프라 협력이 구체화되며, AI의 '두뇌'인 반도체와 '기억'을 담당하는 데이터센터라는 두 축에서 새로운 도약의 기반이 마련됐다. 한국 제조 역량과 AI 기술이 국제 협력의 축으로 자리 잡은 의미 있는 성과다. 다른 한쪽, 상하이에서 열린 '2026 세계인공지능대회(WAIC)'는 피지컬 AI 경쟁의 방향을 보여줬다. 300대가 넘는 체화지능(embodied AI) 로봇이 등장했고, 신에너지차 생산라인에서는 로봇이 부품을 집고 나사를 체결하며 검사까지 수행했다. 서로 다른 제조사의 로봇들이 하나의 지능 모델을 공유해 실제 약국 업무를 협업하는 장면도 공개됐다. 휴머노이드 경쟁의 중심이 단순한 운동 성능을 넘어 산업 현장에서 일하며 실제 가치를 만드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더 미드웨이에서 열린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에서 '샌프란 AI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 두 장면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확장된 '두뇌'와 '기억'이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이제 이를 움직이는 '몸(body)'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피지컬 AI는 디지털 공간의 지능을 현실 세계의 생산성과 서비스로 바꾸는 실행체다. 로봇이 물류창고에서 물건을 나르고, 공장에서 부품을 조립하며, 언젠가 가정에서 돌봄을 제공하는 모든 장면이 이 층에서 구현된다. 대한민국은 이 경쟁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 자동차·반도체·조선·배터리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현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성형 AI 경쟁에서 '데이터센터'와 '언어 데이터'가 핵심 자산이었다면, 피지컬 AI 경쟁에서는 로봇이 현장에서 보고, 움직이고, 실패하며 축적하는 '행동 데이터'가 핵심 자산이다. 한국의 제조현장은 이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테스트베드가 될 수 있다. 지난 6월 19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피지컬 AI 얼라이언스 2기 출범식' 행사장에 전시된 로봇이 상자를 열어 마우스를 집어넣는 모습을 시연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정부도 올해부터 5년간 총 5040억 원 규모의 국가 피지컬 AI 사업을 추진하며 한국형 AI 로봇 플랫폼 확보에 나섰다. 이제 이 기반을 샌프란시스코에서 확대된 글로벌 협력과 연결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세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 먼저, 확대되는 첨단 반도체와 연산 인프라를 피지컬 AI 학습과 대규모 시뮬레이션에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로봇의 지능은 방대한 연산과 현장의 행동 데이터가 결합될 때 성장하며 가상환경에서 학습한 행동을 실제 로봇으로 이전하는 시뮬레이션 역량 또한 국가 경쟁력이다. 또한 국제 협력의 범위를 로봇으로 넓혀야 한다. 반도체·데이터센터에 집중된 협력을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과 행동 데이터로 확장해, 부품 공급국을 넘어 차세대 AI 시스템을 함께 설계하는 파트너로 올라서야 한다. 아울러 우리의 강점을 축으로 국제 규칙 형성에 참여해야 한다. 제조현장의 행동 데이터 품질 기준, 사람과 함께 일하는 로봇의 안전·성능 인증 체계는 우리가 강점을 발휘할 분야다. 모든 표준을 주도하기보다 잘하는 영역에 집중하는 전략이 현실적이다. 이 대통령은 AI를 '인류가 발견한 새로운 불'에 비유했다. 반도체와 데이터센터가 그 불을 지피는 기반이라면, 피지컬 AI는 그 불이 공장과 물류현장, 병원과 가정에서 실제로 일하게 만드는 '몸'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성과를 대한민국의 생산성과 산업 경쟁력으로 완성하는 길, 이제 그 마지막 퍼즐인 '몸'을 국가 AI 전략의 중심에 놓을 때다.◆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서울대학교 전기·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KIST AI·로봇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그동안 인공지능·로봇 분야 연구를 수행하며 국가 과학기술 전략 수립과 대형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이끌어 왔다. 인공지능 기반 영상인식, 선별 및 전역 관제 등 다양한 AI 분야에서 다수의 원천기술을 개발해 산업 및 공공 영역에 확산시켰다. 과학기술 발전과 산업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석탑산업훈장을 수훈했고, 공학한림원 젊은 공학인상과 KIST 미래재단 석학상 등을 수상했다.
2026.08.12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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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경제
국가재정전략회의로 본 '대한민국 미래 투자'
미래투자는 산업 기반을 갖추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을 활용할 인재를 키우고, 그 성과를 국민의 일자리와 기회로 연결해야 한다.…이제 성과는 지출 규모가 아니라 변화로 평가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투자가 산업의 성장에 그치지 않고 국민이 체감하는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 응용데이터사이언스 교수 국가재정전략회의는 톱다운 예산제도의 핵심 절차다. 톱다운 방식은 정부가 총지출 규모와 분야별 지출한도를 먼저 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각 부처는 정해진 한도 안에서 사업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워야 한다. 꼭 필요한 사업을 고르는 동시에 효과가 낮은 사업은 줄이거나 뒤로 미뤄야 한다. 정부가 역대 최대 수준의 지출구조조정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투자를 늘리려면 기존 지출을 과감하게 정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7월 13일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는 필자 포함 정부와 여당, 민간 전문가 등 130여 명이 참석했다. 회의가 던진 메시지는 분명해 보였다. 재정은 경기변동을 완화하는 역할에만 머물지 않는다. 전략적 투자의 후원자로서 시장이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병목을 찾아 풀어주는 신산업정책의 역할도 맡아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1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6년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6.7.13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정부가 반도체, 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를 3대 메가프로젝트로 제시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미래대응기금의 투자 대상도 청년, 성장동력, 지방, 인재의 4대 분야로 정했다. 각 부처가 원하는 사업을 모아 예산을 나누는 데서 벗어나 국가 전체의 우선순위를 먼저 정하겠다는 뜻이다. 이번 회의에서 제시된 숫자는 선택의 크기를 보여준다. 2029년까지 민간이 추진하는 AI 데이터센터는 총 8.4GW 규모다. 정부는 범부처 지원체계를 가동해 인허가와 제도를 정비하고 핵심기술, 테스트베드, 클러스터 구축을 지원할 계획이다. 피지컬 AI는 2030년 세계 1강을 목표로 한다. 제조업뿐 아니라 국방, 돌봄, 농업, 치안으로 활용 범위를 넓힌다. 반도체 분야의 민간 팹 투자 규모는 957조 원에 이른다. 정부는 소재·부품·장비, 패키징, 파운드리까지 이어지는 공급망을 보강하고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지원한다. 호남권에는 800조 원 규모의 기업투자를 지역 성장으로 연결할 첨단산업 거점이 추진된다. 용인 국가산단은 2031년 첫 팹 가동을 목표로 하며, 국도 45호선 확장사업도 2026년 8월 발주할 예정이다. 정부 재정이 민간투자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 재정은 기업이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병목에 집중해야 한다. 전력과 용수, 입지와 교통망, 인허가와 기술개발이 대표적이다. 공장을 대신 짓는 것이 아니라 민간투자가 제때 실행되도록 필요한 기반을 먼저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다. 재원 조달 방식도 달라진다. 정부는 장기 추세를 웃도는 추가 세수를 미래대응기금에 적립할 계획이다. 호황기에 늘어난 세수를 일회성 지출로 소진하지 않고 미래의 생산능력으로 바꾸겠다는 취지다. 다만 추가 세수의 산정 기준과 적립·인출 원칙, 투자 성과의 평가 방식은 명확해야 한다. 미래투자는 산업 기반을 갖추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을 활용할 인재를 키우고, 그 성과를 국민의 일자리와 기회로 연결해야 한다. 정부가 AI 전환에 대응할 청년 전문인력 20만 명 이상을 양성하고, 민간·공공 일자리와 창업을 통해 30만 명 이상의 기회를 만들겠다고 밝힌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성과는 지출 규모가 아니라 변화로 평가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투자가 산업의 성장에 그치지 않고 국민이 체감하는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 응용데이터사이언스 교수 서울대 경제학 학·석사, 美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로 2008년부터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구 분야는 공공경제·재정학(출산·지방재정·기초소득), 노동경제학(최저임금·고령자 노동), 복지정책평가(보육·빈곤), 조세정책(종부세·조특법), 빅데이터·데이터사이언스이다. 빅데이터연구소장을 맡아 정책 평가와 실증분석을 수행해왔다.
2026.08.03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 응용데이터사이언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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