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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접미사’의 세상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2020.11.24

긴 세월 기자(記者)로 일했던 나는 내 직업의 명칭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왜 하필 ‘놈 자(者)’를 붙였을까. 이왕이면 사업가나 판사, 시인처럼 뭐 좀 있어 보이는 ‘가’ 자나, ‘사’ 자나, ‘인’ 자를 붙여주지 ‘놈’이 뭐란 말인가.

한 선배가 조금은 자조 섞인 우스개로 해석하곤 했다. “기자는 기사를 잘 쓰든 못 쓰든 욕을 먹는 놈이니 그런 거야.”

2008년 2월 대통령직인수위가 이명박 당선자를 ‘당선인’으로 호칭해달라고  이례적으로 언론에 요청한 적이 있다. 헌법에는 ‘당선자’로 돼 있고 공직선거법 등에는 ‘당선인’으로 표기돼 있다. 그럴 경우는 헌법이 우선돼야 하는데도 밀어붙였다. 그 배경에는 대통령이 되실 분에게 감히 불경스럽게 ‘놈 者’를 쓰다니, 하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그때 한 기자가 “그럼 기자도 기인(記人)으로 불러 주실래요?”라고 반문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지금 생각하니 ‘기레기’로 불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때였다.
  
師, 士, 事, 官, 家, 者, 人, 員, 手, 工, 夫(婦)….

직업(군)을 나타내는 접미사들이다. 사전을 뒤져 거의 총망라했다. 그런데 정말 궁금하다. 왜 직업마다 조금씩 다른 접미사가 붙는 것일까. 무슨 원칙이나 의미가 있긴 있는 것일까. 

나는 한동안 이 직업의 한자가 참 헷갈렸다. 중매시장에서 잘 나간다는 소위 ‘사’ 자 붙은 직업들이다. 판·검사는 ‘일 사(事)’, 변호사는 ‘선비 사(士)’, 의사는 ‘스승 사(師)’를 쓴다. 이걸 올바르게 쓰는 사람 많지 않다.

많은 자료를 뒤져본 끝에 직업 접미사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들도 적지 않다. 그냥 대중의 언어생활에서, 또는 같은 한자권인 중국이나 일본에서 와서 굳어진 것들도 많다. 

우선 정부의 녹을 먹는 ‘공무원(公務員)’을 본다. ‘원(員)’ 자가 붙는다. 이 글자가 붙는 직업은 회사원, 은행원, 종업원, 판매원, 안내원, 경비원, 승무원, 특파원, 집배원 등 무척 많다.

이 직업군은 특정 조직에 소속된 일원(一員)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정해진 일터로 출퇴근을 하면서 규칙과 의무와 업무적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다. 창의적이고 불규칙한 일보다는 어느 정도 반복적인 업무를 매일 하는 사람들이다. ‘~원’은 좀 중립적 어감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군 안에 ‘일 사(事)’가 붙는 직업이 있다. 형사, 검사, 판사, 감사, 도지사 같은 경우다. 도지사는 직업이라기보다는 장관, 차관, 실장처럼 직급이긴 하다. 경찰이나 소방 업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은 ‘관(官)’이 붙는다.

‘사(事)’가 붙은 직업은 ‘특정한 일을 맡아 처리하는 사람’이란 의미가 강하다. 자신의 업무에 종사하고 충실히 복무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형사는 범인 검거가, 판사는 판결이 업무다. 도지사는 도의 행정을 총괄한다. 법인의 감사나 이사도 그렇다. 집사, 간사 등 개인적 영역으로까지 확장됐다.  

그런데 ‘사’ 자 직업군은 이것 말고 ‘스승 사(師)’, ‘선비 사(士)’ 도 많아서 헷갈린다. ‘師’는 대체로 사회적 존경을 받거나 모범을 보여야 할 직업, 특정한 기술을 전수해주는 직업에 따라 붙는 걸 알 수 있다. 교사, 목사, 의사, 약사, 간호사, 요리사, 사진사, 기사, 마술사, 미용사, 사육사, 장의사, 조경사, 원예사, 퇴마사, 강사 등이다.

반면 ‘士’는 관직이 아닌, 주로 자격시험에 합격해 자격증을 지닌 전문직에 두루 쓰인다. 변호사, 세무사, 변리사, 회계사, 속기사, 통역사, 감정평가사, 공인중개사, 사회복지사, 간호조무사, 조종사, 운전사, 영양사, 석사, 박사 등이다.

판·검사는 ‘일 事’인데 비슷한 일을 하는 변호사는 왜 ‘선비 士’ 일까. 판·검사가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다. 판·검사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반복적 업무를 하지만 변호사는 사건마다 치밀한 논리를 세워 억울함이 없게 하는 또 다른 전문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해석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집 가(家)’ 자가 붙은 직업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원(員)’은 일원(一員)이 됐다는 데 방점이 있지만, ‘가(家)’는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는 의미가 강하다. ‘일가를 이뤘다’는 말은 한 가족을 가진 게 아니라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는 의미로 널리 쓰이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작가, 평론가, 소설가, 문학가, 수필가, 사상가, 연출가, 작곡가, 성악가, 화가, 예술가, 조각가, 무용가, 건축가, 사업가, 탐험가, 여행가, 저술가, 전문가, 만화가, 장서가, 미식가, 애처가, 애연가, 애주가, 대식가 등등이다.

특정 기관이나 조직에 소속돼 일하지 않고 전문적 분야에서 홀로 학문적·예술적 업적을 이루거나 능숙한 사람, (직업은 아니지만) 어떤 것을 많이 갖거나 특성을 지닌 사람을 뜻할 때 ‘家’ 자가 붙는다. 
 
그럼 ‘사람 인(人)’과 ‘놈 자(者)’를 쓰는 직업은 어떨까. ‘人’은 주로 직업의 포괄성을 뜻할 때 쓰인다. 문인, 시인, 예술인, 연예인, 체육인, 간병인 등이다. 직업은 아니지만 증인, 범인, 죄인, 피고인, 걸인처럼 사람의 특정 상황에 붙여 쓰기도 한다.
 
가장 애매모호한 건 ‘자(者)’가 붙는 직업군이다. 사람을 좀 얕잡아 칭할때 쓰기도 하지만 반대로 어느 방면이나 지식에 능통한 사람에게 붙인다. 학자, 기자, 성직자,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 교육자, 연구자, 지휘자, 노동자, 기술자, 연기자 등을 보라. 대체로 자신을 낮추고 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직업인에게 ‘者’가 붙는다는 우호적 해석도 있다.

손기술이나 재주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손 수(手)’가 붙는 직업이 있다. 가수, 목수, 무용수 등이다. ‘~공(工)’도 기술을 지닌 사람들로 벽돌공, 배관공, 용접공 같은 직업이 있다.

그런데 ‘~부(夫)’ 혹은 ‘~부(婦)’는 어떤가. 농부, 어부, 광부, 마부, 인부, 잡부, 우편배달부, 청소부, 가정부, 파출부처럼 일꾼의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환경미화원이나 집배원 경우에서처럼 ‘원(員)’으로 ‘격상’이 되기도 했다. 간호사는 관련 법이 바뀔 때마다 ‘간호부(婦)’에서 ‘간호원(員)’으로, 그리고 ‘간호사(師)’로까지 변천했다. 그렇지만 간호조무사는 전문직업군에 주로 쓰이는 ‘士’를 여전히 쓴다.
 
직업에 붙는 접미사를 나열하다보니 마치 직업에 귀천이나 등급이 있고 잘난 사람, 못난 사람으로 차등을 두는 거 같아서 국어가 미워졌다. 영어나 유럽 언어권처럼 관련된 명사 뒤에 ~er, ~or, ~ist, ~an, ~ian 같은, 사람을 평등하게 뜻하는 접미사들을 붙여 직업을 가리키면 편할 텐데 말이다.

가족의 형태도, 성별의 역할도 점차 바뀌어가고 있는데 ‘주부(主婦)’는 언제까지 주부여야 할까. 시인(詩人)을 소설가나 화가처럼 ‘시가(詩家)’라고 부른다면 느낌이 전혀 살아나지 않으려나?
 
공무원을 공무가로 부른다면? 판사나 검사를 판원, 검원이라 한다면? 기자를 정말 기인이나 기사로 부른다면? 뭐가 달라질까.

‘정치인’과 ‘정치가’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정치인’은 정당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정치가’는 국가와 국민의 장래를 위해 대의를 품은 사람이란 어감을 준다. 다양한 직업 접미사를 가진 국어는 참 미묘하다.

한기봉

◆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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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정책브리핑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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