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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는 온몸으로 부르는 것이다

[노래, 시를 만나다] ①가사가 영혼을 울리는 노래를 찾아서

2021.07.30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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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가 이주엽은 2020년 펴낸 탁월한 가사 비평집 ‘이 한 줄의 가사’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래의 꿈은 문학과 음악이 한몸이 되는 것이다. 가사는 지면이 아니라 허공에서 명멸한다. 써서 읽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부르는 것이다. 읽지 말고 듣고 불러봐야 안다. 그게 얼마나 좋은 가사인지를.”

노래는 사실 시의 원형질이었다. 태초에는 시가 노래요, 노래가 시였다. 글로만 전해져오는 ‘서동요’ 같은 향가 25수나, ‘청산별곡’ 같은 고려가요도 운율을 살려 노래로 불렀던 것이다.

그러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자연발생적 민요를 지나 근대에 들어와 오선지와 원고지가 분화되며 가수와 성악가라는 직업이 생겨나고 문학도 시와 소설 장르로 떠나면서 둘은 결별했다. 하지만 노래에 말과 글이 입혀져 있는 한 그 둘은 여전히 서로를 그리워하게 될 거다.

노래와 시는 원래가 한 몸이었기에 그 둘의 만남은 자연스럽다. 같은 언어, 같은 민족, 같은 심성, 같은 흥과 감수성에서 태어난 그 둘은 궁합이 맞는다.

‘대중가요’, 영어로 ‘팝(pop)’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긴 건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다. 팝 음악의 시작은 보통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대로 본다. ‘파퓰러(popular) 뮤직’은 말 그대로 대중적인, 즉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음악이라는 의미다. 음악은 음향기기와 전파송출(방송국)의 발전과 더불어 더이상 특정 계층의 소유가 아니게 됐다.

우리의 대중가요는 1924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시발점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작사는 윤심덕이 했지만 서양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을 번안한 곡이다. 그 직전 19세기 말~20세기 초 근대 계몽기에는 ‘창가(唱歌)’가 있었다. 개항과 함께 유입된 서구의 곡조에 맞춰 만들어진 일종의 ‘시가(詩歌)’다. 최남선, 안창호, 윤치호 같은 계몽적 지식인들이 창작했으니 가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요가 서서히 잊히고 팝이 유입되기 시작됐다. 1926년 서울 중구 정동에 경성방송국이 세워져 첫 전파를 쏘았다. 광복과 분단, 한국전쟁을 거치며 가요는 암흑기였다. 실질적 의미의 대중가요는 1960년대부터로 봐야 할 것이다. 밴드와 통기타를 든 포크가 등장한 것이다. 지금 한국 음악은 ‘K-뮤직’으로 성장해 세계인들이 우리의 노래를 듣는다.

다시 시와 노래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 둘의 사명은 무엇일까. 그 둘의 사명은 결국 다르지 않다. 듣는 이, 읽는 이에게 주는 영혼의 위안이요, 그 시대의 어루만짐이다. 그게 사랑이든 이별이든, 삶에 대한 비탄이든 환희든, 시대에 대한 찬사든 저항이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음악시장은 그런 점에서는 거리감이 있다. 아이돌이나 걸그룹이 전면에 등장해 스피드와 리듬과 댄스가 주류를 이룬다. 가사는 어디 저만치 뒤쯤에서 들릴 듯 말 듯, 비디오가 오디오를 압도하는 노래들이 많다. 
 
어색하고 생경하고 무의미한 단어와 표현들이 뒤섞인 노래는 그것대로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이나 그런 장소에 맞는 노래다. 노래가 반드시 사람의 심금을 건드리거나 영혼을 정화할 이유는 없다. 신나는 노래는 청중을 신나게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대체로 사람들한테 오래 사랑받는 노래, 나이와 성별과 세월을 초월해 긴 생명력을 가진 노래는 반짝이는, 서정적인 노랫말을 지닌 노래다. 평생 자기 안에 있는 노래는 그런 노래다. 꼭 시인의 시를 빌려온 것이 아니어도 좋다. 그래서 내 인생의 나침반이 되었거나, 언제 어디서든 불쑥 들려오면 내 안의 그 무언가를 살아 꿈틀거리게 하는, 추억과 회한과 사연이 얽힌, 세상이 아무리 빛의 속도로 바뀌어도 소멸하지 않는 정서를 지닌, 그런 노랫말을 담은 노래다.
 
중세유럽에는 ‘음유시인’이 있었다. 자신의 시에 리듬을 붙여 작은 악기로 연주하며 노래로 부르며 떠돌던 사람들이다. 현대에는 차분한 목소리로 의미와 메시지가 충만한 가사를 마치 시를 읊듯이 잔잔하게 노래하는 가수들을 음유시인이라고 부른다. 반짝이는 가사는 대체로 그들의 노래에서 많이 나온다.

외국에는 오래 전부터 아예 음유시인으로 대접받는 대중가수가 많았다. 격조 높은 서정적 가사에 철학적 문학적 가사를 직접 쓰고 작곡하는 싱어송라이터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가수는 2016년 대중가수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밥 딜런이다. 딜런은 사랑타령에 머물던 대중음악에 예술성을 결합해 인권·평화운동의 상징이 됐다. 그는 1970년대 한국의 포크 음악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사람들은 사람다워질까/얼마나 많은 바다를 날아야 흰 비둘기는 모래에서 평안을 찾을 수 있나/얼마나 많이 올려다봐야 그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나/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그가 사람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나/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어야 너무 많이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나/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에 흩날리고 있네, 바람만이 알고 있네.”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아는 대답)

지난 2016년 10월 18일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포크록 가수 밥 딜런의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개정판이 진열돼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지난 2016년 10월 18일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포크록 가수 밥 딜런의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개정판이 진열돼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와 비견되는 가수가 2016년 82세로 세상을 떠난 캐나다 출신의 음유시인 레오너드 코헨이다. 그는 시인과 소설가로 먼저 등단하고 나서 1967년에 가수로 데뷔했으니 문학적 감성을 세례받은 가수다. 전설적인 존 바에즈, 폴 사이먼 앤 가펑클, 윌리 넬슨, 조니 미첼, 내한 공연을 여러 차례 했던 제이슨 므라즈,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유시인 조르주 무스타키…. 이들의 노래는 그냥 노래가 아닌 ‘노래시’다. 

한국의 대중가요는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대중문화에 대한 경시, 유교적이고 억압된 시대 분위기에서 빼어난 노랫말이나 싱어송라이터가 나오지 못했다. 트롯은 통속적이고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됐다. 문인들도 대중가요에 대한 참여가 소극적이었다. 시와 노래는 따로 놀았다.
 
국내에 주옥 같은 가사들이 나오기 시작한 건 대체로 포크 이후다. 미국에서 생활했던 한대수는 한국으로 돌아와 ‘포크록의 대부’가 됐다.

“장막을 걷어라/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창문을 열어라/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또 느껴보자/가벼운 풀밭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아 나는 살겠소/태양만 비친다면/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 (한대수 작사 작곡 ‘행복의 나라로’)

그때쯤부터는 서정적이고 의미가 풍요로운 가사와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양병집, 송창식, 조동진, 김광석, 정태춘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 ‘사랑했지만’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먼지가 되어’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을 남기고 1996년 31세로 세상을 뜬 ‘가객’ 김광석은 1970년대 포크의 계보를 이어간 적자다. 그는 한국의 진정한 ‘음유시인’이요, ‘노래하는 철학자’였다.

싱어송라이터들의 작사 능력도 꽃을 피웠다. ‘북한강에서’ ‘시인의 마을’ ‘떠나가는 배’의 노랫말을 쓰고 부른 정태춘, ‘새는’ ‘사랑이야’ ‘우리는’의 송창식, ‘한계령’ ‘가시나무’의 하덕규(시인과 촌장),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의 양희은 등등. 가수는 아니었으나 작가 출신의 양인자는 ‘그 겨울의 찻집’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탁월한 노랫말을 가수들에게 지어주었다.

노래가 전통가요 형식을 벗어나 다양해지고 가사의 가치가 중요해지면서 70년대부터 대중가요가 시인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김소월의 시가 노래로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모두 59편으로 알려져 있다. ‘부모’(유주용), ‘개여울’(정미조),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활주로),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라스트포인트), ‘실버들’(희자매), ‘못잊어’(패티김), ‘진달래꽃’(최정자, 마야) 등이 사랑을 받았다. 소월의 시는 정형성과 향토적 서정성으로 노래로 만들기 좋았고 여전히 후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됐다. 현대 시인 중에는 정호승의 서정적 시가 안치환에 힘입어 노래로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윤동주, 고은, 김광섭, 서정주, 정지용, 박두진, 김지하, 천상병, 김남조, 기형도, 류근, 안도현, 박노해, 문정희, 최영미, 나희덕, 류시화 등의 시도 노래가 되었다. 
 
어쩌면 시 열 줄이 노래 한 줄에 못 미칠지 모른다. 노래는 시에 선율과 리듬과 무엇보다 가수의 천의 목소리를 얹어준다. 시는 정적이지만 노래는 동적이다. 기타와 건반, 드럼 위에서 시는 제2의 생명을 얻는다. 시집을 읽고 흐느끼지는 않아도, 시 같은 노래를 들으면 사람들은 눈물을 적신다. 가사는 읽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영혼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자신의 시가 노래로 불리길 꿈꾼다.

시를 가사로 차용한, 노랫말이 시처럼 반짝이는, 그래서 우리들 마음 속 거문고 줄을 울리는 노래 이야기를 연재하며 추억여행을 떠난다.

한기봉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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