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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 이후 봄은 다른 풍경이 됐다

[노래, 시를 만나다] ⑤불멸의 가사, 최고의 절창 ‘봄날은 간다’

2021.10.18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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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줄의 가사’라는 출중한 가사 비평집을 쓴 작사가 이주엽은 이 노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노래 이후 한국인에게 봄은 이전과 다른 풍경이 됐다.”

공감한다. 이 노래 이후 봄은 그냥 긴 겨울이 끝나고 돌아온 계절이 아니다. 이 노래를 듣고 부르는 이의 가슴 속에 봄은, 딱히 한 마디로 짚어낼 수는 없지만, 그 어떤 ‘정서’로 존재한다. 그 정서는 아마도 ‘부질없음’과 ‘속절없음’이다.

봄은 짧다. 사계절 중에 가을도 있으나 봄만 짧다고 한다. 그게 봄의 정서적 숙명이다. 봄이 왔으면 이미 봄은 저만치 가고 있는 거다. 세상 모든 아름답고 화사한 건 영원히 머물지 않고 스쳐갈 뿐이라고, 그걸 증거하려는 듯이 봄은 오는가 싶더니 어느 결에 떠나간다. 

사랑의 속성도 봄처럼 허망하다. 사랑이 한 손을 내민 순간 다른 한 손은 이별의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사랑의 정념은 벚꽃처럼 잠시 눈부시게 발화했다가 덧없이 스러진다. 어쩌면 그 유한함을 예감하고 있기에 화려하고 뜨거운 것이다. 알뜰한 그 맹세는 실없는 기약이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었다 한들 정인(情人)은 떠나갔다. 옷고름 씹고, 꽃편지 내던지고, 앙가슴 두드려도 돌아오지 않는다.

봄은 그래서 우리에게 문득 깨달음을 준다. 그 얄궂은 각성, 배반의 상처야말로 기실 살아가는 힘이다. 결국은 혼자인 것이고 남는 건 추억과 회한뿐이다. 그게 이 노래가 지닌 시적 미학이다.

노래 ‘봄날은 간다’는 가는 봄을 노래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 노래를 들으며 인생의 덧없음과 사랑의 유한함과 추억의 쓸쓸함을 조우한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봄은 다른 ‘풍경’이 되는 것이다.

앞편에서 언급했듯 시인들이 최고로 친 노랫말, 그것도 압도적으로 많은 표를 얻은 노래 ‘봄날은 간다’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불멸의 가사요, 최고의 절창이다.

이 노래는 1954년 한국전쟁의 포성이 멎은 후 발표됐다. 손로원이 가사를 쓰고 당대의 작곡가 박시춘이 곡을 붙였다. 1950년 ‘꾀꼬리 강산’으로 데뷔한 백설희는 이 노래로 스타가 되며 전성기를 열었다. 아들 전영록도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았다.  
 
손로원(1911∼1973)은 반야월(1917~2012)과 함께 초창기 한국 대중가요 노랫말의 양대산맥이다. 연희전문 문과를 나온 부잣집 아들 손로원은 1930년대 시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일제 치하에서 절필하고 술과 그림을 벗 삼아 전국을 떠돌며 방랑생활을 했다.

다수 작곡가들의 전언에 따르면, 남편을 여의고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손로원의 어머니는 열아홉 살 시집올 때 입고 왔던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고이 매만지며 아들이 장가들 때 다시 입을 것이라고 유언처럼 말했다고 한다. 객지를 떠돌다 임종을 못 한 손로원은 1953년 부산 영주동 산동네 판자촌 대화재 때 그 옷을 입고 찍었던 어머니의 영정이 불에 타자 불효의 회한으로 노랫말을 썼다고 전해진다.

손로원이 지은 노랫말은 ‘비 내리는 호남선’ ‘에레나가 된 순희’ ‘샌프란시스코’ ‘인도의 향불’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경상도 아가씨’ 등 숱하게 많다. 시대의 애환을 쓴 그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뜰 때까지 평생 욕심 없는 방랑의 예술가로 살았다.

“연분홍~~”의 시작부터 목이 잠겨온다.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에서 슬픔이 올라오다가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에서 먹먹해진다. 복숭아꽃 그늘 아래 낮술에 취해 이 노래를 들어야 한다.

‘봄날은 간다’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면 가수라고 할 수 없다. 배호부터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 김정호 장사익 심수봉 최백호 한영애 이선희 린 말로 아이유에 이르기까지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각각의 한과 애절함, 청승과 설움으로 노래했다. 한국 가요 중 후대에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노래다. 장사익은 2018년 정치인 김종필씨 영결식장 그의 관 앞에서 이 노래를 구성지게 뽑았다.

젊은 세대는 노래 ‘봄날은 간다’ 하면 김윤아 것을 떠올린다. 동명의 영화 전편에 흐르는 건 백설희 원곡이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으로 시작하는, 역시 아름다운 가사를 가진 김윤아 노래로 바뀐다. 마치 세월을 훌쩍 뛰어넘듯.  

소설가 고 이윤기는 ‘봄날은 간다’라는 단편소설에서 “시간에, 세월에 저항하는 인간에게 흘러가는 봄날은 처참한 것이다. 시간에 저항하는 인간에게 이만큼 잔인한 노래는 없다”고 했다.

이 다섯 글자 노래 제목은 영화로, 소설로, 시로, 드라마로, 뮤지컬로, 연극으로, 미술로, 악극으로 무한히 차용됐다. 아마도 가장 많은 시 제목 중 하나가 ‘봄날은 간다’일 것이다.

“연분홍 치마가 휘날린다고? 그런 늙은 유행가가 흥얼거려진다는 것은 내 생도 잔치의 파장처럼 시들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벚나무 아래서 만났던 첫사랑. 그 소녀의 허리도 이 나무 몸통처럼 굵어졌을 터다. 터질 것처럼 뛰는 가슴을 가졌던 열일곱 나도 없다. 돌아보면 화무십일홍. 잔치도 끝나기 전에 꽃이 날린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삶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구경꾼일 뿐이다. 그렇게 시들시들 내 생의 봄날은 간다.” (정일근)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이 가고 있습니다”(안도현).
“미쳤습니다. 처음으로 사내 욕심이 나서 사내 손목 잡아끌고 초저녁 풋보리잎을 쓰러뜨렸습니다”(김용택).
“이렇게 다 주어버립시다, 꽃들도 지고 있는데. 이렇게 다 놓아버립시다. 지상에 더 많은 천벌이 있어야겠습니다”(고은). 

시인들은 심지어 3절까지인 이 노래에 4절을 만들어 헌사했다. 지난 6월 타계한 서정시인 문인수는 그의 마지막 시집에 ‘봄날은 간다 4절’이란 시를 남겼다. 남편을 여의고 칠순을 넘긴 누이들과 강원도에 여행갔다가 누이들이 비 오는 숙소 창가에 기대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 것을 보고 썼다고 한다.

“밤 깊은 시간엔 창을 열고/하염없더라/오늘도 저 혼자 기운 달아/기러기 앞서가는 만리 꿈길에/너를 만나 기뻐 웃고/너를 잃고 슬피 울던/등 굽은 그 적막에 봄날은 간다”

2001년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 마지막 장면. 벚꽃길 아래서 상우는 다시 찾아온 은수를 떠나보낸다. 상우는 비로소 깨달았다. 오는 순간 떠나가는 봄처럼 세상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손로원 작사 ‘봄날은 간다’는 시인들이 뽑은 한국 대중가요 최고의 노랫말이다.
2001년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 마지막 장면. 벚꽃길 아래서 상우는 다시 찾아온 은수를 떠나보낸다. 상우는 비로소 깨달았다. 오는 순간 떠나가는 봄처럼 세상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손로원 작사 ‘봄날은 간다’는 시인들이 뽑은 한국 대중가요 최고의 노랫말이다.

최고의 멜로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봄날은 간다’(2001년)에서 허진호 감독은 닳고 닳은 연상 의 이혼녀 은수(이영애)와 맑고 순진한 청년 상우(유지태)의 통속적 사랑 이야기에 왜 이 노래 제목을 갖다 썼을까.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상우를 먼저 유혹했다가 차버린 은수. 계절이 바뀐 후 돌연 다시 그를 찾아온다. 둘은 벚꽃이 터질 듯 만개한 거리를 걷는다. 여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팔짱을 낀다. “우리 같이 있을래?” 그러나 남자는 여자를 밀어낸다. 여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갈게” “응 잘 가” 여자는 돌아섰다 되돌아와 괜히 남자의 옷매무새를 고쳐주고 악수를 청한다. 두 사람은 비로소 ‘완전하게’ 헤어졌다. 여자의 변심에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며 괴로워했던 남자는 봄의 한가운데 비로소 깨달았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영원할 수 없다는 걸. 벚꽃은 분분히 휘날리고 봄날은 그렇게 속절없이 가고 있다.

<봄날은 간다>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 1954년

1.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2.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3.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한기봉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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