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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오면 귀 기울여봐

[시가 된 노래, 노래가 된 시] (19)조용필 ‘바람의 노래’, ‘바람이 전하는 말’

2022.10.11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삶이란 결국 바람의 성정(性情)인가? 바람도 삶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어디서 휘몰아칠지 모르는 바람, 어디서 고꾸라질지 모르는 삶.

바람은 인생처럼 고독, 시련, 방황, 희망이기도 하고 어떤 억압이나 그 반대로 해방이기도 하다. 삶은 유한한 구속이지만 바람은 불멸의 자유다. 그래서 삶은 바람을 꿈꾸거나 저항한다. 시와 노래에서도 바람은 어떤 비유나 상징으로 자주 차용된다. 시가 존재하는 한 바람은 영원한 시어요, 노래가 존재하는 한 바람은 영원한 노랫말이다.

문학 사상 바람과 인생을 교차시킨 최고의 절창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시구(詩句)일 것이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발레리(1871~1945)의 난해한 장시 ‘해변의 묘지’ 마지막 줄이다.

미당 선생을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었다(‘자화상’). 도종환의 꽃들은 다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며 피었다(‘흔들리며 피는 꽃’). 조지훈은 지는 꽃을 바라보며 바람을 탓하지 않았다(‘낙화’). 윤동주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밥 딜런의 모든 질문은 바람만이 그 해답을 알고 있다(‘Blowin’ in the Wind’)

대중가요에서 바람을 가장 많이 노래한 이는 조용필이다. 바람은 조용필의 브랜드다. 그의 노래를 지탱하는 가장 큰 줄기가 ‘고독’이고, 가장 큰 힘이 ‘위안’이라면 바람이 그의 노래의 배경을 이루는 게 이상하지 않다. 그는 바람에 ‘존재’를 부여했다. 바람은 말을 걸고 노래를 한다. 조용필은 ‘바람이 불어오면 귀 기울여봐’라고 했다. 어쩌면 조용필 자신이 바람이었다.

한줄기 바람 되어 거리에 서면(‘창밖의 여자’)
바람속으로 걸어 갔어요(‘그 겨울의 찻집’)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킬리만자로의 표범’)
바람이 잠들은 내 가슴에…이제는 내 품에서 다시 태어난 바람속에 여자(‘상처’)
돌고도는 계절의 바람속에서 이별하는 시련의 돌을 던지네(‘비련’)
바람아 멈추어라, 촛불을 지켜다오(‘촛불’)

2011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전국투어콘서트 포스터. 제목은 ‘바람의 노래’였다.
2011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전국투어콘서트 포스터. 제목은 ‘바람의 노래’였다.

조용필에게는 ‘바람’을 제목으로 한 탁월한 가사의 두 곡이 있다. 두 곡 모두 시(詩)라고 부르기에도 전혀 손색이 없다.

‘바람의 노래’(1997년, 정규앨범 16집)와 ‘바람이 전하는 말’(1985년, 정규앨범 8집)이다.

‘바람의 노래’는 조용필이 미국 LA에서 제작한 16집 앨범 ‘Eternally’의 타이틀곡이다. 당시 댄스 음악이 가요계의 주류였던 상황에서도 복고풍 발라드의 이 노래는 크게 히트했다. 지금도 수많은 후배 가수들이 커버하는 빼어난 음악성을 가진 노래로 평가받는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바람의 노래’,1997년)

작사가는 지금은 유명 컬러링북 작가가 된 김순곤(60)이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전편 참고)로 데뷔한 사람이다. 작곡가는 김정욱인데 김종찬의 ‘사랑이 저만치 가네’ 등을 만든 베이스 연주자 출신이다.

‘바람이 전하는 말’이 실린 1985년 조용필 정규 앨범 8집. 타이틀곡은 ‘허공’이었고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상처’ 등이 함께 실렸다.
‘바람이 전하는 말’이 실린 1985년 조용필 정규 앨범 8집. 타이틀곡은 ‘허공’이었고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상처’ 등이 함께 실렸다.

‘바람의 노래’는 삶의 연륜이 있어야 가슴에 와닿는 노래다. 수많은 실패와 고난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그러다 중년의 나이에 들어 문득 깨닫는다. 내가 아는 건 오직 살아가는 방법뿐이었다고. 노래하는 바람, 지는 꽃, 스쳐가는 인연,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 그런 심오한 것들의 정체를 작은 지혜로 어찌 알았으랴. 이제는 바람이 말하는 걸 알아들을 수 있을까. 결국은 사랑이었다. 삶의 해답은 사랑이었다. 바람은 이제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 한다.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 행복한 너는 나를 잊어도
어느 순간 홀로인 듯한 쓸쓸함이 찾아올 거야
바람이 불어오면 귀 기울여봐
작은 일에 행복하고 괴로워하며
고독한 순간들을 그렇게들 살다갔느니
착한 당신 외로워도 바람소리라 생각하지마
너의 시선 머무는 곳에 꽃씨 하나 심어놓으리
그 꽃나무 자라나서 바람에 꽃잎 날리면
쓸쓸한 너의 저녁 아름다울까
그 꽃잎 지고나면 낙엽의 연기
타버린 그 재 속에 숨어있는 불씨의 추억
착한 당신 속상해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 (‘바람이 전하는 말’, 1985년)

‘바람의 노래’ 12년 이전에 ‘바람이 전하는 말’이 있었다. 노랫말의 의미는 진화했다. 처음의 바람은 누군가에게 말을 전하는 존재였으나 12년 후(‘바람의 노래’)에는 스스로 노래를 불렀다.

1985년 조용필 8집에 실린 ‘바람이 전하는 말’은 그의 평생 음악 반려자 김희갑(작곡)-양인자(작사) 부부가 만들어줬다. 8집 앨범에는 지금도 사람들의 노래방 18번으로 불리는 노래들이 많이 있다. 타이틀곡인 ‘허공’부터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상처’ 등이다.

‘바람의 노래’가 사뭇 철학적이라면 ‘바람이 전하는 말’은 서정적이고 애잔하다. 노래의 화자는 정인(情人)과 헤어졌거나 죽어 영혼이 떠나 ‘바람’이 된 자다. 지상에는 내가 없어도 여전히 ‘행복한 당신’이 살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당신에게도 홀로인 듯한 쓸쓸함이 찾아올 거고, 그때 바람이 불어오면 귀를 기울여 보라고 한다. 누구나 다 작은 일에 행복하고 때는 괴로워했고 고독한 순간들을 살다 가는 거라고. ‘착한 당신’은 외로워도 이 말을 그저 지나가는 바람소리라고만 생각하지 말라고. 꽃잎도 지고 나면 낙엽의 연기로 사라지지만 재의 불씨 속에는 우리의 추억이 남아있다고. 바람에 꽃잎 날리는 너의 저녁이 쓸쓸하고 속상해도 인생은 따뜻한 거라고.
 
지난해 ‘문학으로 읽는 조용필’을 펴낸 유성호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조용필 노래에서 ‘바람’은 강렬한 배경이자 지향이자 시적 원리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바람은 거대한 흐름으로 존재하면서 어떤 ‘신성함’을 획득해간다고 했다. 바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조용필을 한사코 데려간다고 했다. 

조용필은 ‘바람의 가수’요, ‘바람의 시인’이다. 조용필은 노래가 갖는 ‘위안의 미학’을 가장 잘 구현한 가왕이다. 그는 슬픔과 고독과 자존감과 처절함에서 출발해 사랑의 힘과 삶의 긍정에 도달했다. 그는 ‘신화’다. 가을이 깊어간다. 조용필의 노래는 가을에 들어야 제격이다.

한기봉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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