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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꼭 120년 전인 1901년 1월 30일의 일이다. 인적이 드문 새벽 시간에 스칼라 오페라극장 근처의 그랜드 호텔을 떠난 베르디의 장례마차는 밀라노 공동묘지로 향했다. 장례마차에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간소하게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어떠한 음악도 없었다. 이탈리아 통일의 혼을 불태우게 하고 또 이탈리아 오페라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위대한 인물의 장례식치고는 그야말로 조촐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87세.
베르디는 1813년에 레 론콜레(Le Roncole)라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그곳은 파르마 공국에 속한 땅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청운의 꿈을 안고 ‘국경’을 넘어 스칼라 오페라극장이 있는 밀라노로 ‘이민’왔다.
당시 밀라노와 베네치아를 포함 북부 이탈리아 상당부분은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다. 스칼라 오페라극장도 오스트리아 지배 하에서 세워진 것이었다.
그런데 밀라노에서 젊은 베르디는 자식과 아내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인간적인 슬픔을 겪었고 무대에 올린 오페라 작품이 번번이 흥행에 실패하는 등 고통과 좌절 속에서 살아갔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음악계를 완전히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29세 때이던 1842년 3월 9일 스칼라 오페라극장에서 그의 오페라 <나부코>가 초연되었는데 제3막에서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간 히브리인들이 잃어버린 아름다운 조국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가라, 생각이여, 황금 날개 위에서’(Va, pensiro, sulle ali dorate), 일명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흘러나오자 관객들은 격하게 동요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통일의 염원이 순식간에 횃불처럼 타올랐던 것이다.
외세의 지배를 받던 이탈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은 이 오페라는 성공에 성공을 거듭해 스칼라 극장 역사상 유례없이 57회나 더 공연되었으며 베르디의 명성은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다른 나라에도 퍼지게 되었다. 아울러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입에서 입으로 알려져 모든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불려지게 되었으며 거리에는 ‘Viva VERDI!(비바 베르디!)’라는 글씨도 곳곳에 나붙었다. 이것은 두 가지의 뜻이 있다. ‘베르디 만세!’이기도 하지만 VERDI는 다름 아닌 Vittorio Emanuele Re D‘Italia(빗토리오 에마누엘레, 이탈리아의 왕)의 약자였던 것이다. 그럼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누구인가?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이탈리아는 오랜 세월동안 여러 개의 군소국가로 갈라져 있었으며 또한 여러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다. 19세기에 들어서 이탈리아 사람들은 통일의 중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는 북서쪽의 토리노를 수도로 하는 사르데냐 왕국만이 외세의 간섭 없는 자주적인 입헌군주제 왕국이었고 왕이 바로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를 구심점으로 통일운동을 전개했고 험난하고 힘든 과정 끝에 이탈리아 북동부 지방과 교황령을 제외한 채 ‘이탈리아 왕국’이란 국명으로 1861년 제1단계 통일을 이루었다. 이에 베르디는 이탈리아 왕국의 종신상원의원으로도 추대되었다.
그후 1870년에는 마지막까지 버티던 교황청의 수도 로마까지 흡수함으로써 이탈리아는 비로소 제대로 된 통일을 이루었다. 이러한 연유로 이탈리아 주요도시 중심부에는 통일 이탈리아 왕국 초대왕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념상이 세워져있는 것이다.
<나부코> 이후에도 많은 불멸의 오페라를 작곡해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상 최고의 대가로 자리를 굳힌 베르디는 50대에 구입한 고향 근처 한적한 산타가타 별장에서 두 번째 아내 스트렙포니와 조용히 살면서 노년에도 작곡에 몰두했다. 또한 그는 1896년에 사재를 털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노년의 음악가들을 위해 ‘휴식의 집’을 밀라노에 착공했고 3년 후에 완공했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음악가 양로원이다.
1897년에 두 번째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밀라노로 돌아온 그는 스칼라 오페라극장 근처 그랜드 호텔에서 홀로 거주하다가 1901년 새해를 맞은 지 3주후에 그만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그리고는 엿새가 지난 1월 27일 밤 2시50분에 영원히 눈을 감았는데 장례식을 꽃이나 음악 없이 소박하게 치르라는 유언에 따라 3일 후 그의 관은 두 번째 아내가 묻혀있던 밀라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가 세웠던 음악가 양로원 안에 묘당이 새롭게 단장되자 2월 26일에 베르디와 두 번째 아내의 관이 그곳으로 함께 옮겨지게 되었다. 이때 국가차원의 성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30만 명의 시민들이 화려하게 장식된 장례행렬을 따라가며 애도하는 가운데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820명의 합창단이 부르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밀라노 거리에 울려 퍼졌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나부코> 공연 중에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나오면 관객들은 모두 기립하고 곡이 끝나면 비스(bis 앙코르)를 요청한다. 이탈리아에서 이 곡은 제2의 국가나 다름없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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