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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의 오페라에서 엿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이탈리아/로마(Roma)

2023.03.23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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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4년 3월 15일은 로마역사의 흐름을 바꾼 날이다. 로마역사에서 최고의 위인으로 손꼽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날이다. 영어권에서는 그의 이름을 ‘줄리어스 시저’라고 발음한다.

헨델의 작품 중에 <줄리오 체자레>라고 하는 3막짜리 오페라가 있는데 줄리오 체자레(Giulio Cesare)는 다름 아닌 라틴어 이름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이탈리아어 표기이다.
 
<줄리오 체자레>는 헨델이 39세 때인 1724년에 영국 왕실아카데미를 위해 작곡한 것으로 오늘날에도 비교적 자주 공연되는 바로크 오페라 중 하나이다. 이 오페라의 정식 제목은 <이집트의 율리우스 카이사르(Giulio Cesare in Egitto)>이다. 이 오페라를 좀 더 잘 이해하려면 로마역사의 흐름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동상.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동상.

고대 로마의 역사는 3개의 시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늑대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에 의해 건국된 기원전 753년부터 기원전 509년까지는 왕정시대, 기원전 509년에서 기원전 27년까지 공화정시대,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476년까지의 제정시대, 즉 로마제국시대로 구분된다.

로마 공화정시대 후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공화정의 전통을 무시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제1차 삼두정치를 했다.

그런데 크라수스가 파르티아(당시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 영토에 해당하는 강대국)와의 전쟁터에서 죽은 후 원로원의 사주를 받은 폼페이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두 세력 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고 그리스 파르살루스 평원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집트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우스는 폼페이우스를 보호했는데 당시 그는 누나인 클레오파트라와 나라를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헨델의 오페라 <줄리오 체자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집트로 진군한 시점부터 시작된다. 내용은 세부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략 다음과 같다.

폼페이우스의 아내 코르넬리아와 그의 아들 세스토(섹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를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를 받아들이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미 목이 잘려있었다. 대세가 카이사르 쪽으로 기운 것을 파악한 이집트 왕 톨로메오(프톨레마이오스)가 그를 처단했던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오히려 정적의 죽음을 슬퍼하고 분노하자 톨로메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마저 암살하려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도움으로 남동생 톨로메오을 제거하고 왕권을 독차지하려 한다. 이를 위해 그녀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유혹하고 카이사르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한편 복수심에 불타던 코르넬리아와 세스토는 톨로메오 암살에 실패하여 코르넬리아는 시녀가 되고 세스토는 투옥되는데 톨로메오는 코르넬리아에게 눈독을 들인다.

세스토는 클레오파트라의 도움으로 탈옥하여 카이사르와 힘을 합하고는 톨로메오를 살해한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여왕으로 선포하고 로마로 돌아온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 (카뭇치니 그림 1808).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 (카뭇치니 그림 1808년).

한편 로마에서 최고 실력자로 자리를 굳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2월 14일에는 스스로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그는 로마의 숙적 파르티아를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출정하기 3일 앞서 3월 15일에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새로운 원로원 건물이 신축 중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세웠던 극장 회랑을 원로원 회의장으로 사용했다.
 
그가 회랑에 들어서자 한 원로의원이 무엇인가 탄원하려는 듯 다가왔다. 그리고는 여러 명의 원로의원들이 그를 에워싸더니 갑자기 옷자락에 숨겨둔 단도를 꺼내 달려들었다. 평생을 전투와 전투 속에서 용맹을 떨쳤던 56세의 사나이의 몸에는 순식간에 예리한 칼날들이 꽂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정적 폼페이우스를 제거한 후에도 그에 대한 예우로 그의 석상은 그대로 두었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아래에서 피범벅이 되어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신전 유적에서 재현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
로마 공화정 시대의 신전 유적에서 재현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

1808년 로마의 화가 카뭇치니(V. Camuccini 1771-1844)는 상상을 통해 이 격동의 순간을 매우 현장감 있게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은 현재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역사의 현장은 로마 중심지역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에 있다.

이곳에는 로마공화정 시대 후반기의 신전 유적터가 보존되어 있는데 유적터 일부분은 폼페이우스가 세웠던 로마 최초의 반원형 극장에 속해 있었다.  3월 15일이 되면 이 유적터에서 로마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한편, 헨델은 20대에 로마에 왔었는데 당시 그는 이 역사의 현장을 보지 못했다. 왜냐면 이 유적터는 1900년대 초반에야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culturebo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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