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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멈춤이 한국 제조업에 묻는 것

유럽의 기관차로 불리던 독일 경제가 힘을 잃고 있다. EU 집행위는 올해 독일 성장률을 0.6%로 전망했다. EU 전체 1.1%, 유로존 0.9%에도 못 미친다. 독일경제연구소(DIW)는 2,3분기 역성장 가능성까지 경고했다. 한때 유럽 성장을 견인하던 나라가 이제는 유럽 평균에도 못 미치는 저성장 국가가 된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낯설지 않다. 러·우 전쟁과 미·이란 전쟁 이후 높아진 에너지 비용, 고령화와 숙련 인력 부족, 미국발 관세 불확실성이 겹쳤다. 자동차, 기계, 화학처럼 에너지 비용과 세계 수요에 민감한 산업이 독일 경제의 중심에 있었던 만큼 충격은 더 컸다. 중국도 더 이상 독일 제품을 사주는 시장이 아니다. 전기차와 배터리, 기계장비와 산업재에서 강력한 경쟁자가 됐다.
독일의 부진을 외부 요인으로만 설명하면 핵심을 놓친다. 충격은 밖에서 왔지만 취약성은 안에서 자랐다. 문제의 뿌리는 과거 독일을 세계 최고로 만들었던 정교한 부품, 숙련 노동, 강한 중견기업 중심의 성공 공식이 새로운 기술 질서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한 데 있다.
2010년대 독일이 주도한 인더스트리 4.0은 공장 안을 똑똑하게 만드는 자동화의 언어였다. 반면 지금의 AI와 플랫폼 경제는 공장 밖의 데이터와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연결해 수익화하는 생태계 싸움이다. 자동차는 엔진을 넘어 소프트웨어와 모빌리티 서비스로, 기계장비는 단순 판매에서 운영 최적화와 구독형 서비스로 진화하고 있다. 제조업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제조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시대가 된 것이다.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맥킨지는 유럽의 혁신 병목을 '창출이 아닌 전환의 문제'라고 짚었다. 기술력 있는 신생·성장기업은 많지만, 이들이 세계 시장에서 통할 만큼 스케일업에 성공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뜻이다. 실제로 유럽 대기업 중 스타트업의 제품·서비스를 먼저 도입하거나 투자에 나서는 곳은 20% 수준으로, 미국의 절반에도 못미친다. 어렵게 공동 프로젝트를 시작해도 실제 시장 출시로 이어지는 비율은 5% 미만이다. 완벽주의와 위험 관리에 치중한 탓에 신기술은 현장과 시장으로 충분히 확산되지 못했다. 소수 선도기업과 다수 기업 간 생산성 격차가 벌어지는 것도 독일 산업의 구조적 약점이다.

이 대목에서 독일은 한국의 거울이다. 우리도 제조업·수출 의존도가 높고, 낮은 에너지 자급도와 저출산·고령화, 중국의 추격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다만 한국은 독일과 다른 강점이 있다.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조선 등 첨단 제조업의 실행 속도가 빠르고 디지털 기술 수용성도 높다. 얼마전 방한한 피터 하윗 브라운대 명예교수가 한국의 높은 R&D 투자와 역동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제조업을 넘어설 것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조업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제조업의 울타리에 갇히지 말라는 의미다. 성장은 기존의 성공 공식을 지키는 데서가 아니라, 새로운 기술과 기업이 낡은 질서를 바꾸며 전체 생산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나온다.
이제 한국 제조업은 더 넓은 혁신 생태계로 확장해야 한다. 자동차는 모빌리티 데이터 서비스로, 반도체는 AI 인프라와 설계 생태계로, 기계·조선은 디지털 운영 서비스로 넓어져야 한다. 기술이 시장으로 가는 통로를 여는 것이 중요하다. 대기업은 스타트업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말고, 첫 고객이자 공동개발자가 되어야 한다. 정부는 R&D 지원을 넘어 실증, 조달, 규제 개선, 인력 재훈련, 성장 금융을 연결하는 시장 설계자로 거듭나야 한다.
중소·중견기업의 AI 확산도 미룰 수 없다. 일부 선두 대기업만 AI를 잘 쓰는 구조로는 산업 전체의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어렵다. 2·3차 협력사와 지역 중견기업까지 AI가 스며들어야 한다. 동시에 서비스업 생산성을 높여 제조업이 흔들릴 때 경제를 받쳐줄 두 번째 엔진도 키워야 한다. 수출 제조업 하나에만 의존해 성장하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다.
독일의 위기는 제조업 자체의 실패가 아니라, 제조업을 둘러싼 혁신·자본·서비스 생태계의 지체에서 왔다. 강점도 시대에 맞춰 변하지 않으면 족쇄가 된다. 독일은 스마트공장을 먼저 외쳤지만 AI·플랫폼 시대의 성장 언어로 넘어가지 못했다. 한국은 달라야 한다. 제조업을 지키되 제조업에 갇히지 않는 것, 그것이 독일 경제가 한국에 보내는 경고다.
◆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연세대 경제학과와 KDI대학원(MBA)을 거쳐 건국대에서 무역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 한국무역협회 입사 후 30년 이상 수출입 동향분석과 글로벌 통상전략 수립을 주도해온 무역 전문가다. 현재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으로서 수출경쟁력 강화, 산업별 공급망 안보, 신통상질서 대응 등 급변하는 대외 환경 속에서 우리 기업이 나아갈 이정표를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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