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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전란사② '고구려의 대당항쟁'
수나라는 대내적 안정을 이룩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 중심의 국제질서를 확립하려다가 멸망하였다. 과도한 토목공사 및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백성의 고통이 가중되어 611년 이래 전국 각처에서 반항세력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들 중에 617년 진양(晉陽. 山西 大原縣)에서 거병한 이연이 여러 군웅과 연계하여 수를 무너뜨리고 당을 세우니(618) 그가 당 고조였다. 당이 성립한 초기, 고구려의 대당관계는 표면상 이전의 대수관계와 유사했으나 그 내면은 아주 판이했다. 이 때는 당은 돌궐 등 주변민족을 굴복시켜 가면서 한편으로 민심수습에 많은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전쟁보다는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고구려도 수와의 전쟁에서 받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일정정도 평화와 재건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고구려는 영류왕 2년(619) 이후 보장왕 원년(642) 경까지 매년 당에 1회 정도의 사신을 파견하며 교섭을 지속하였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양국의 교섭 내용을 살피면, 당에서는 고구려에 대해 평화공세를 취하여 은근히 압박하면서 당 자체의 민심을 수습코자 하는 이중의 효과를 노리고 있었다고 믿어진다.
즉 영류왕 5년에 당은 “지금 두 나라(二國)가 화친(和親)해 의(義)에 어긋난 바가 없게 되었다”면서 고수전쟁 당시 전쟁포로를 상호 교환하자고 고구려에 제의했다. 그리하여 고구려인으로 중국에 억류되었거나 포로가 되었던 자들을 쇄환하는 한편 1만여 명의 중국인을 당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당 내부에서는 일찍부터 고구려에 대한 신속(臣屬) 또는 정벌론이 대두하고 있었고 고구려도 대당 적대의식이 높아져 그 대비책이 강구됐다.
이미 영양왕 말기부터 축조하기 시작했던 천리장성(千里長城)이 16년 만인 영류왕 14년(631)에 완성되어 동북의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서남의 바다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구려는 돌궐을 비롯한 대부분의 동맹세력이 당의 세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해 차후 전쟁에서 이전보다 심한 피해를 받게된다.
◆ 전쟁의 발발
고당간에 벌어진 전쟁은 고수전쟁을 이어 벌어진 계승전적인 성격이 강했다. 당은 수를 이었다는 계승성으로 인해 출발부터 두 가지의 부담을 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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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태종 |
첫째, 당나라의 건국에는 수나라가 멸망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고구려의 승리가 부차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수나라가 추진하던 중화중심으로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상황은 당에 이르러서도 변화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필요하게 됐다는 것이다. 고조의 뒤를 이은 건국의 영웅 당 태종 이세민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고구려를 비롯한 주변국가들을 정복하려했다.
당은 첫 단계로 돌궐 등 북방세력의의 일부를 세력권 안에 편입시키고, 다음 단계로 고구려 등 동아지중해 세력의 편입을 시도하면서, 계속 다른 지역 역시 세력권 안에 편입시키고자 노력했다.
고구려 내정에는 연개소문(淵0蓋蘇文)의 쿠데타로 큰 변혁이 일어났다. 영류왕 25년에 중앙정계로부터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밀려났던 연개소문이, 왕과 귀족이 연개소문을 죽이려고 모의한다는 정보를 듣고 대신들을 초청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다시 왕궁으로 달려가서 영류왕을 시해한 다음 보장왕을 즉위시키고 그 스스로 막리지가 됐다.
연개소문가는 고구려의 독자성을 견지하려는 직선적 자주파이며, 대수전쟁에 승리한 제일의 공로자였던 한편, 후일 분열과 반목으로 인해고구려 패망의 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당 태종은 고구려 침략의 뜻을 굳히고 고구려 보장왕 3년(644) 11월에 원정명령을 내렸다. 우선 선박 100여 척을 건조하여 군량을 실어오게 했고, 장검 등에게 유주, 영주군사와 거란과 말갈의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나가게 하였다. 그리고 당 태종은 친정에 앞서 요동을 침공하여 고구려 병력을 요동으로 집결케 하고 수군을 동래에서 평양으로 보내 수륙양군이 합세해서 고구려를 정벌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안시성전투
당 태종의 군대는 수나라 군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강군이었다. 이 해 4월 당의 육군은 요하를 건너서 이세적은 현도성을, 도종은 신성(新城)을 포위했다. 장검이 호병을 거느리고 건안성(建安城)을 포위공격하자 이에 대항하던 고구려 병사 수천 명이 전사했다. 이어 이세적과 도종에게 개모성(蓋牟城)을 함락당했는데 1만 명이 포로가 되고 양곡 10만 석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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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시성싸움 |
따라서 당 태종이 직접 이 성의 공격에 참가했고 고구려에서는 신성,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보내어 구원하려 했다.
구원병은 패배하고, 요동성은 12일간 적의 포위 속에서 신념에 찬 항전을 계속하였지만 포로된 성병(城兵)이 1만 명, 남녀가 4만 명이었고, 양곡 50만 석도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제 요동 국경선 부근에서 적의 침공에 맞서 최후까지 항전해 고수된 성은 안시성(安市城)과 건안성(建安城)이었다.
고구려에서는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편성된 15만 명의 군사를 주어 안시성을 구원하게 했으나 당 태종의 기만전술에 속아 고구려군은 대패하여 3만여 명이 전사하고 고연수와 고혜진 등은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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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장대에서 본 안시성 외곽. |
적에게 포위된 안시성군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성을 굳게 지켰다. 당병은 60일간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밤낮으로 토산을 쌓고 성 안을 굽어보았는데 이 토산이 무너지면서 성의 일부도 무너졌다. 이곳으로 적병이 몰려와서 격렬한 접전을 벌였는데 토산을 안시성군이 점령했다.
때는 9월, 요동에는 일찍이 추위가 닥쳐 초목이 마르고 물이 얼었다. 치열한 전투가 5개월간 지속되면서 당군의 군량도 다해갔으므로 당 태종은 안시성의 공격을 포기하고 귀환를 명령했다. 사력을 다한 안시성 사람들의 항전은 전세를 고구려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형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안시성을 수호함으로써 당병의 발을 묶어 더 이상의 진격을 저지시키고 그들의 평양 직공을 예방하는 동시에 고구려인의 투혼을 보여줬다.
당태종은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에서 "고구려와 전쟁하지 말아라. 아비의 실패를 되풀이하면 사직을 지키기 어렵다. 우리가 고구려를 치지 않은 한 고구려도 우리를 칠 힘은 없다." 라는 말을 남겼다. 당 태종은 이 전쟁의 실패로 그 정치적 권위가 떨어지고 그의 사후엔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측천무후의 정변을 불러오게된다.
◆마지막 막을 향하여
당 태종은 전체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종주권을 장악하고, 군사적으로 패자가 되려했다. 즉 군사적으로는 북방을 제압하면서 방어망을 튼튼하게 구축하고, 그를 위해서는 북방의 유목민족을 포위하는 대응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서쪽으로 서역지역의 지배권을 확실히 하는 한편, 남방교역을 활성화시키고, 동쪽으로는 군사적인 경쟁상대인 고구려를 붕괴시키면서 안전하게 교역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보장왕 4년(645)의 1차 전쟁은 쌍방의 엄청난 손실이 따랐기 때문에 향후 당의 전략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병력에 의한 침략에 실패한 당은 수성전과 유격전에 능숙한 고구려를 일시에 멸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장기전략을 채택하고 일차로 압록강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를 실천해 갔다. 그리하여 고구려 보장왕 6년(647) 3월에 당의 1만 병력은 바다를 건너왔고 석성이 함락되기도 했으나 곧 당군을 물리쳤다. 보장왕 7년 정월에는 당의 설인귀 등이 3만 병력을 거느리고 내주에서 바다로 건너와 역산(易山)에서 교전했다.
이런 소규모의 침략 모두를 고구려군은 전부 격퇴했으나, 국경지방 백성들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정부의 통치력이 약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왕 8년(649)에 당 태종이 죽고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수년간은 고구려를 침략하지 않았다. 중국의 신질서 구축에서 고구려는 여전히 강력한 제동을 가할 수 있는 나라였고, 이제 동북아시아의 전쟁은 그 마지막 막으로 향해 나가고 있었다. 국제질서의 재편과 동아지중해의 장악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통일중국과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자료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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