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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글 국민연금 운용을 둘러싸고 이런 저런 말들이 있어 그 책임을 맡고 있는 보건복지부장관으로서 국민여러분께 몇 말씀드립니다. 연기금 활용 문제를 둘러싸고 말이 많습니다. 말은 연기금으로 되고 있지만 국민여러분께서 다 아시다시피 연기금의 거의 대부분은 국민연금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경제상황을 개선해야 한다는 대명제에 동의하면서도 국민연금이 어떻게 쌓인 돈인지를 아는지라 주무부처의 장으로서 고민이 많습니다. 특히 지난 시절 우리 정부가 국민들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운영을 잘못한 관계로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이 아직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연금운용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가 흘러나와 국민여러분들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해드린 것 같아 정말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칼에 맞은 상처보다 말에 맞은 상처가 더 크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검토 차원에서 연금운용에 대해 언급된 것은 있지만 최종적인 것은 아직 없다는 점을 국민여러분께 분명히 보고 드립니다. 어려운 경제상황에 염려가 크실 텐데 이 문제 때문에 또 다른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았으면 하는 간곡한 마음이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경기는 반드시 개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판 뉴딜 정책, 경기종합투자계획 같은 방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실생활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로서는 당연히 경기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이미 100조가 넘어섰고 멀지 않은 미래에 수백조로 불어날 돈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에 대해 경제부처가 고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경기를 개선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각종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경제부처의 고민은 이해할만 합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좀 특수합니다. 국민연금은 5천만 국민의 땀의 결정체입니다. 국민여러분께서 땀 흘려서 알토란처럼 적금을 넣은 국민연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검토와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도 후일을 대비하여 곳간에 곡식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국민여러분의 심정을 이해한다면 그 용처에 대해서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국민연금의 운용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부처간 다툼으로 비추어질 여지가 있어 참고 참았지만 경제부처가 너무 앞서가는 것 같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대적 M&A, 막아야 합니다. 새로운 투자처, 개발해야 합니다. 국민경제에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당연합니다. 국민연금을 매월 꼬박꼬박 납부해왔던 우리 국민들에게 그만한 애국심은 당연히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부처는 국민연금의 운용에 대해 조용히 조언하는 것에서 그쳐야 합니다. 경제부처가 그 용처에 대해 앞서서 주장하면 '내가 낸 돈을 정부 마음대로 하는 것 아냐, 그래서 결국 원금도 못 받는 것 아냐'하는 의구심과 불신이 증폭됩니다. 신뢰가 훼손됩니다. 결국 이러한 의구심과 불신은 국민연금 제도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비화될 수 있습니다. 이제라도 경제부처는 보건복지부가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뒤에서 조언하는 그림자 역할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국민의 위임을 받아 국민연금을 책임지고 있는 우리 보건복지부는 연금운용의 기본원칙, 즉 안정성, 수익성, 공공성의 3대원칙을 확고히 견지하겠습니다. 이 3대 기본원칙의 순서를 정한다면 당연히 안정성이 최우선입니다. 안정성의 토대위에 공공성과 수익성을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복지부 역시 국채에 집중되어 있는 연금의 투자처를 다변화하기 위해 무척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형 SOC 투자 등 사회적 논란이 많은 투자일수록 3대 기본원칙을 충실히 견지하겠습니다. 또한 기금운용위원회가 국민여러분의 염려와 고민을 충분히 고려하여 결정할 수 있도록 독립적인 권한과 책임을 확실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겠습니다. 개별사업에 대해서도 기금운용위원회가 사업성과 수익성에 대해 큰 틀을 정하고 그 원칙에 따라 국민연금관리공단과 기금운용본부가 연금기금을 수익성 있게 운영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국민여러분의 심정적 동의를 거친 다음에 집행하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혹시라도 국민여러분께서 애써서 모아주신 국민연금이 어떻게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는 정말로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도록 해낼 생각입니다. 정말로 하겠습니다. 과격한 말이어서 주저됩니다만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해내겠습니다. '콩 볶아 먹다가 가마솥을 깨뜨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애초의 취지에 맞지 않게 잘못 사용하면 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국민연금이라는 가마솥이 국민여러분의 노후를,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를 안정되게 만드는 기둥이 될 수 있도록 장관으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다짐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4. 11. 19. 보건복지부장관 김근태 드림 등록 : 참여복지홍보사업단 최영준 2004.11.19 (구)보건복지부
- [해외언론] 동북공정, 범한민족주의 두려움에서 시작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25일 “고구려사는 중국 변방의 역사라는 주장을 담은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향후 중국 동북부에 있는 200만 조선족들이 현재의 국경을 넘어 ‘범한민족주의(Greater Korea)’를 지지하고 나설 수 있다는 중국의 두려움에서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이 신문은 “아시아의 동맹국인 중국과 한국은 1300년 전에 지도에서 사라진 한 왕국의 경계선 문제로 외교관계를 맺은 지 12년만에 가장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며 “중국에 대해 품어 왔던 한국의 연정은 올 여름 갑자기 냉랭해졌다”고 보도했다. 이런 분위기는 “올 초 중국을 한국의 가장 중요한 경제파트너로 대답한 80%의 조사 응답자가 이달 초 6%로 급감했으며 일부에서는 티베트, 몽골, 베트남과 연대해 중화주의를 논파하자는 주장까지 일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이 신문은 “연일 계속되는 반중감정과 관련 중국 외교관들은 이를 무마하기 위한 행보를 취함으로써 반중감정이 활발한 양국간의 경제적 관계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고구려사 왜곡 해결을 위한 5가지 구두 양해를 발표했으나 한국인의 감정을 진정시키지는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리:최강(ckang@news.go.kr) 2004.09.01
- [해외언론] "역사분쟁으로 한국에 중국 위협론 급부상" 영국 더 타임스는 “1300년보다도 더 전에 멸망한 고대국가인 고구려의 역사적 소유권을 둘러싸고 한ㆍ중간에 심각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며 “이는 아시아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는 영토분쟁과는 다른 것으로 양국은 수교 12년만에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 논쟁의 시발은 영토의 일부인 북동부가 중국에 포함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명으로 널리 인식되어 왔던 고구려라는 고대왕조를 새삼 중국의 것으로 편입하려는 중국 ‘동아시아 공정’에서 기인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인의 격앙을 가져온 이 동북공정은 마치 영국 아더왕의 궁궐을 갑자기 독일인들이 자기네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격”이라고 덧붙였다. 이 신문은 특히 “중국의 자체 홈페이지에 한국의 고대 역사 언급부분을 삭제한 것은 중국의 의도적 도발이라고 한국인은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신문은 “일부 한국인들은 자국의 정부가 중국에 대해 충분히 강경한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하지만 사실 장기적으로 볼 때 확고부동한 사실은 중국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일”이라며 고대사가 미래 양국간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서는 안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도 25일 “국교수립 12주년을 맞는 한국과 중국이 고대사를 둘러싼 역사분쟁을 계기로 한국에는 중국위협론이 급부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양국은 1992년 국교를 계기로 적대관계에서 밀월관계로 변화하면서 엄청난 경제ㆍ인적교류를 통해 미·일 등 주변국이 우려할 만큼 ‘대중접근’ 현상이 나타났었으나 고구려에 대한 역사 귀속논쟁이 외교문제로 발전하면서 양국관계가 급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신문은 “한중마찰은 경제를 중심으로 잠복하고 있었던 중국 위협론이 역사논쟁을 계기로 표면화한 측면을 지닌다”고 분석했다. 이어 신문은 “역사인식과 관련된 외교문제의 해결은 쉽지 않다”며 “한중관계는 양국과의 깊은 상호의존관계를 갖고 있는 일본으로서도 무관심할 수 없는 사안인 만큼 이에 대해 주의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리:최강(ckang@news.go.kr) 2004.09.01
- 고구려 관련 독일인터넷 주소 선점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와 관련, 정부의 다양한 대응방침이 마련되고 있는 가운데 주독일 문화홍보원이 고구려 관련 독일 인터넷 주소들을 선점, 관련 사이트 개설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홍보에 나서고 있다. 주독 문화원은 최근 고구려사 관련 인터넷 홍보사이트 (www.goguryeo.de)주소를 등록하고 내달초부터 독일 네티즌을 대상으로 한국이 고조선과 부여, 발해 등의 계승자라는 점 등을 포함한 한국 역사를 적극 알려 나갈 계획이다. 문화원은 특히 현재 독일의 각종 출판물 등에서는 사용되는 고구려의 표기인 Goguryeo(한국), koguryo(북한), kaoli(독일)이란 세가지 표기방식의 인터넷 주소도 이달 초 모두 등록 완료했다. 문화원은 네티즌이 koguryo.de 또는 kaoli.de나 kaoli.org 가운데 어느 주소로 들어가더라도 Goguryeo.de.사이트로 연결되도록 사이트를 구축 중이다. 문화원 관계자는 “고구려와 관련한 인터넷 홍보를 하기위해서는 사이트 주소부터 우리가 주도권을 잡는 것이 순서”라며 “이 사이트에는 고구려는 물론 한국의 역사와 관련한 다양한 글을 독일어로 번역해서 실고 사진, 그림, 관련 서적 등의 자료를 게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이 사이트에 고구려사 연구 동호인방과 토론방을 개설해 한국과 독일의 전문가와 일반인들이 들어와 자연스럽게 정보를 교환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취재:최강(ckang@news.go.kr) 2004.09.01
- 관련사이트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 (http://www.koguryo.org) ◆국사편찬위원회 (http://goguryeo.history.go.kr ) ◆세계유산위원회 (http://whc.unesco.org ) ◆국제기념물유적위원회(http://www.icomos.org ) ◆중국 동북공정 (http://www.chinaborderland.com ) ◆중국 역사도 (http://www.chinahis.com ) 2004.09.01
- 고구려왕조 가계도 2004.09.01
- 고구려의 대표적인 인물들 부분노 : 고구려가 건국 초기에 비류국과 행인국과의 전쟁을 할 때에 큰 공을 세운 장군이다. 그의 업적을 대표하는 것은 BC 9년 강적인 선비족을 굴복시킨 일이다. 그는 먼저 첩자를 보내 선비로 하여금 고구려를 얕잡아보도록 정보를 흘렸다. 그런 후에 유리명왕과 함께 선비의 성(城)을 공격했다. 유리명왕이 이끈 군대가 먼저 정문을 공격하다가 퇴각하자, 선비는 군사를 내어 고구려군을 추격했다. 이때 부분노가 군사를 이끌고 성을 점령했다. 선비는 놀라 다시 성으로 돌아오다가 성 안과 밖의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그는 용맹과 지혜를 갖춘 고구려 초기 최고의 명장이었다. 괴유 : 그는 먼 북쪽 바닷가 출신으로 낮은 신분을 가졌지만 무예에 뛰어났다. 그는 몹시 큰 체구에 얼굴이 희고 광채가 나는 인물이었다. 서기 21년 12월 그는 대무신왕이 부여 정벌에 나서자, 왕에게 나아가 부여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음해 2월 부여군과 전투가 벌어지자, 괴유는 앞장서서 나아가 부여 대소왕의 머리를 베어 버리는 큰 공을 세웠다. 이 전쟁의 결과 부여는 내분에 빠지게 되고 고구려는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될 수 있었다. 그가 병으로 죽게 되자, 대무신왕이 친히 병문안을 갈 정도로 고구려인의 사랑을 받았다. 명립답부 : 165년 연나부 출신의 명림답부는 차대왕이 잘못된 정치를 하여 백성들을 괴롭게 하자, 왕을 시해하고, 새로이 신대왕을 왕위에 옹립하는 혁명을 일으켰다. 신대왕은 그에게 최초로 국상이라는 최고의 관직을 주었다. 172년 후한이 대병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명립답부는 먼저 성벽을 쌓고 방어에 전념하여 적을 지치게 한 후, 후한의 군대가 철군할 때를 놓치지 않고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뒤를 쫓아서 좌원 전투에서 적군을 전멸시켜 버렸다. 그는 국정을 안정시키고, 외적의 침략을 물리친 큰 인물이었다. 을파소 : 191년 고국천왕은 정치를 바로 잡고자 널리 새로운 인재를 추천하라고 지시를 했다. 이때 많은 사람이 추천한 인물은 안유였다. 하지만 안유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을파소를 천거했다. 고국천왕은 그의 말에 따라 한낮 농부에 불과한 을파소를 불러들였다. 왕은 그에게 장관에 해당되는 중외대부를 맡겼으나, 을파소는 이를 거절했다. 왕은 비로소 그의 참 뜻을 알고, 국상을 맡기며 모든 신임을 주었다. 을파소는 왕의 믿음을 바탕으로 여러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바로잡아갔다. 특히 194년에 실시한 진대법은 봄철에 양식이 부족한 농민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수확기에 되돌려 받는 제도로 농민 생활안정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고구려 최고의 재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평범한 농민이었던 을파소를 추천한 안유, 그들을 믿고 정치를 맡긴 고국천왕은 인재 선발의 모범 사례였다. 밀우, 유옥구, 유유 : 246년 위나라 관구검이 대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동천왕은 철기병을 앞세워 초반 적군을 물리치는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자만에 빠진 동천왕은 적군가 싸우다가 크게 패배하여 궁궐을 버리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군사들도 흩어지고, 동천왕은 마땅히 몸을 피신할 곳도 찾지 못하고 있을 때에 밀우와 유유 등이 나타났다. 밀우는 결사대를 이끌고 적군과 싸워 왕이 도망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왕은 밀우를 생각하고 그를 구해줄 사람을 뽑았다. 유옥구가 자청해 싸움터에서 땅에 쓰러진 그를 구해왔다. 하지만 적은 계속 왕을 추격해왔다. 이때 유유는 적장에게 음식을 가지고 가서 적에게 항복하는 척하다가, 적장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적장이 죽자 위나라 군대는 흩어지고 왕은 반격할 기회를 잡아 마침내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목숨을 내건 이들의 활약에 고구려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창조리 : 국상인 창조리는 늘 근심이었다. 가뭄과 지진, 서리 등 이상 기후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짐에도 왕이 궁궐을 증축하는 등 심한 사치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왕에게 간청을 했지만, 봉상왕은 임금이란 위엄을 보여야 한다며 백성들을 노역에 끌어냈다. 그러자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을 폐위시킬 것을 합의했다. 봉상왕의 조카지만, 왕의 미움을 받아 신분을 속이고 나라를 떠돌던 을불을 찾아내어 그를 미천왕이 되도록 했다. 봉상왕은 민심이 떠남을 알고 자살하고 말았다. 창조리는 임금이라도 백성을 괴롭히며 쫓아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이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평강공주와 온달 : 평강공주는 어린 시절 너무 많이 울어 평원왕이 달래기 위해 너무 울면 커서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놀렸었다. 성인이 된 평강공주는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몰래 궁궐을 나와서 온달을 찾아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온달을 가르쳐서 그를 뛰어난 인재로 변모시켰다. 온달은 나라에서 열린 사냥대회에서 1등을 해서 장군이 되었다. 나아가 북주와의 전쟁, 신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임금의 사위로 인정받았다. 평민인 온달이 공주와 결혼하고, 훌륭한 장군으로 성장했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뒷날 본래 이야기에서 다소 변질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평민이라도 노력해서 능력을 키울 수만 있다면 임금님의 사위까지도 될 수 있음을 말해주는 온달의 사례는 열려 있는 고구려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을지문덕 : 을지문덕은 용맹함과 지혜를 고루 갖춘 고구려 최고의 명장이다. 612년 113만 3,800명의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수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수나라 군대는 요동성을 공략하지 못해 진격이 지연되자, 별동대를 보내 고구려 수도를 향해 진격해왔다. 을지문덕은 적의 별동대를 유인하면서, 적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적군은 식량 보급마저 끊긴 상태에서 강력한 고구려군의 방어벽에 부딪히자, 결국 퇴각을 시작했다. 이때 을지문덕은 총 공격을 명하여 살수에서 적군을 대파시켰다. 수나라 30만 5천명의 별동대 가운데 살아 돌아간 인원은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 을지문덕의 공적으로 인해 고구려는 강대국의 위상을 지킬 수 있었다. 반면 수나라는 이 패배의 결과로 나라까지 멸망하고 말았다.집필: 서길수(고구려연구회장) 2004.09.01
- 고구려의 문화와 풍습 ◦ 종교 생활 고구려 사람들에게 종교는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들은 조상에게 제사를 자주 올렸으며, 때로는 신으로 섬기기도 했다. 특히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과 그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은 각각 고등신과 부여신으로 받들어져 매년 열리는 동맹 축제에서 섬김을 받았다. 고구려 사람들은 추모왕을 천신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천신은 고구려인이 모신 최고의 신이다. 그의 후손이 고구려를 세운 만큼 고구려는 남다른 신성한 나라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고구려인에게는 자부심이었다. 따라서 그 자부심과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동맹 축제에서 추모왕이 신의 자손으로 이 땅에 태어났음을 확인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저승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에 거대한 무덤들이 만여 개 이상 몰려 있었던 것은 이러한 믿음 때문이다. 고구려인들은 용, 학, 기린 등을 타고 다니며 오래도록 살아가는 신선의 삶을 최고의 이상적인 삶으로 여겼다. 또 천신과 조상신 이외에도 해의 신, 달의 신과 농사의 신, 불의 신 같이 기능을 가진 신들을 비롯해서 다양한 신들을 섬겼다. 종교적 의례를 담당하는 무당이나, 제사장, 그리고 신전이 있었으며, 수시로 신들을 받드는 의식이 치러졌다. 왕들도 천신과 조상신께 바치는 제사와 동맹축제에는 결코 빠지지 않았다. 고구려 종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온 것은 AD372년에 국가에서 종교로 인정받은 불교였다. 불교는 구체적 신상(神像)을 가진 부처님과 전문 신앙인의 조직체인 교단을 제대로 갖춘 종교였다. 고구려 불교는 왕과 그 가족의 적극적 지원을 받으면서 여러 곳에 사찰을 세었고, 거대한 탑과 금으로 만든 불상 등을 만들었다. 고구려의 스님들은 신라에 불교를 전해주고, 왜를 비롯한 주변 나라에 불교 문화를 전해주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 축제와 놀이, 생활풍습 고구려 사람은 춤과 노래를 매우 즐겨하는 사람들이었다. 매우 엄한 법질서를 갖고 있고 수시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긴장된 사회에 사는 고구려인들에게는 밤늦도록 마을 사람들과 모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이 삶의 피로와 긴장을 풀어주는 가장 좋은 오락이 될 수 있었다. 매년 10월 하늘과 조상신에게 제사지내는 동맹(東盟)은 물론, 크고 작은 축제가 열려 신분의 높고 낮음, 부유한 정도의 차이를 떠나 서로 어울려 축제를 즐겼다. 고구려의 동맹 행사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엄격하게 예(禮)를 따지며 장중한 분위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해주는 중국의 제사풍습과는 크게 달랐다. 신이 강림할 때에 함께 어울려서 신을 맞이하고 서로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함께 신의 기운을 받아 함께 즐기는 축제의 장이 동맹이었다. 매년 초에는 강가에 사람들이 나와 노는데, 왕도 여기에 참관하여 구경을 했다. 사람들은 서로 돌을 던지며 싸우는 돌싸움을 하기도 했는데, 이 풍습은 20세기 중반까지도 한국에 계승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바둑, 장기, 축구와 유사한 축국이라 불리는 공차기 놀이, 주사위 놀이, 윷놀이와 투호 같은 놀이도 즐겼다. 또 씨름과 수박도 있다. 수박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대표적 무예인 태권도 등으로 발전하는 겨루기 놀이였다. 씨름은 현재까지 전해오는 놀이로서 두 사람이 각자 허리에 샅바를 맨 후, 상대편 샅바를 잡고서 손과 발을 이용해 서로를 먼저 땅에 닿게 하는 경기다. 고구려 사람들은 서역에서 전해온 서커스를 관람하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듣거나, 자신이 직접 거문고, 완함, 피리를 비롯한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 사냥 역시 고구려인에게는 중요한 오락이었는데, 산과 들에 나가 대규모로 사냥을 하기도 했지만, 표적을 설정해놓고 서로의 활쏘기 솜씨를 겨루는 것도 중요한 놀이였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은 ‘주몽’이라 부르며 존중해주었는데,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의 별명이 곧 주몽이었다. 고구려 청소년들은 교육기관인 경당에 가서 글공부와 함께 활쏘기 등을 배웠는데, 이런 평소 훈련 탓에 고구려의 강한 군대가 만들어 질 수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결혼을 할 때면 먼저 신부의 집에서 사위가 머물 수 있는 작은 집인 서옥을 짓고, 이곳에서 부부가 아이를 낳아 성장할 때까지 살게 하는 서옥제라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이 풍습은 점차 고구려 후기로 갈수록 사라지게 되며, 남녀가 모두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할 만큼 자유로운 결혼 풍습이 생겼다. 장례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었는데, 장례는 많은 비용을 치르고 크게 행사를 했다. 특히 죽은 자가 살았을 때 쓰던 물건을 무덤에 많이 넣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후기에는 죽은 자의 유품을 무덤 옆에 놓아두어서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가져가게 하는 풍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몹시 슬퍼하지만, 장례를 지낼 때에는 오히려 풍악을 울리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죽은 사람을 떠나보냈다. • 세계문화유산 - 산성과 릉비, 고분벽화 고구려에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화려한 색감과 다양한 소재를 자랑하는 고분벽화, 1,500년이 흘러도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높은 성벽(城壁), 그리고 거대한 비석을 들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산지에 풍부한 돌을 채취하여 교통과 방어의 요지에 어김없이 튼튼한 성벽을 만들었다. 성은 고구려 건축 기술의 종합체였다. 특히 치(雉)는 성벽에서 돌출하여 나온 시설물로 공격해오는 적을 삼면에서 반격할 수 있어 성의 방어력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성벽의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성벽 하단은 튼튼한 큰 돌로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쌓았으며, 성벽의 각도를 조정하여 안정감을 갖게 했다. 또 자연의 절벽이나, 바위 등을 그대로 깎아내기보다는 이를 그대로 활용했으며, 돌과 돌이 서로 맞물리게 쌓아 가장 견고한 방어벽을 만들었다. 고구려의 성벽 축조 기술의 우수성은 주변국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여러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여러 강대국들이 고구려와 전쟁을 기피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의 성벽이 워낙 견고하여 섣불리 공격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고구려 옛 터 곳곳에서는 1,500년 전의 고구려 성벽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돌을 잘 다룬 고구려인들은 거대한 돌무덤을 만들기도 했다.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흔히 불려지는 장수왕릉은 높이 13미터, 폭 31미터의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다. 고구려에는 이와 같은 돌로 만든 무덤들과 내부에 돌로 방을 만들고 외부는 흙으로 덮은 무덤들이 1만기 이상 남아있다. 그 가운데는 한 변의 길이가 71m나 되는 거대한 무덤도 있다. 왕과 귀족의 거대한 무덤들은 수묘인(守墓人)에 의해 관리되고, 정기적인 제사가 이루어졌다. 광개토태왕의 무덤 앞에는 거대한 돌로 된 광개토태왕릉비가 있다. 414년 장수왕이 부친의 무덤 앞에 세운 높이 6.39m, 무게 37t에 이르는 거대한 돌의 4면에는 1775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으며, 세계적인 대형 석비로 그 비문의 가치는 대단히 높다. 이 비에는 수묘인에 대한 관리 규정을 비롯해서, 고구려의 간략한 역사와 왕의 계보, 그리고 광개토태왕의 업적이 적혀져 있다. 한편 1979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었는데 2000자에 가까운 비분 가운데 200자 남짓한 글자만 판독했지만 고구려의 남방 경영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고구려의 예술을 대표하는 작품은 약 100기의 옛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들이다. 무덤에 묻힌 자의 편안한 안식을 위해 그려진 고분벽화는 다양한 내용이 담긴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무덤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하거나 특정한 의미를 나타내는 장식무늬, 무덤 주인의 생전에 기억할 만한 모습과 생활상, 편안한 영혼세계로 가기 위해 악령들을 물리치는 수호신인 사신(四神)과 용맹한 수문장, 도깨비, 천상계의 신들의 모습, 별자리 등이 그것이다.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는 고구려 사람들의 당시 생활상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생생히 보여준다는 점과 뛰어난 그림 솜씨 때문에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뛰어난 색감과 생동감 넘치는 필치가 돋보이는 고분벽화 가운데, 250명이 야외 행차하는 모습이 그려진 안악3호분의 대행열도, 무용총 벽화의 수렵도, 강서대묘의 현무도, 강서중묘의 주작도 등은 같은 시대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또 사신도와 신선도가 많이 그려진 5회분 4호묘 벽화는 당시의 화려한 채색이 지금까지도 거의 손상되지 않고 아름다운 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보는 이를 감탄하게 한다. 집필: 서길수(고구려연구회장) 2004.09.01
- 고구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신분, 법과 제도 고구려는 왕과 귀족, 평민과 노비로 사회적 신분이 구성된 전형적인 계급사회였다. 개개인의 삶은 계급의 틀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되기도 했다. 고구려왕은 계루부라는 특정 부족에서 배출되었고, 점차 왕실은 다른 귀족들과 뚜렷한 차별이 생겼다. 왕실 가족들은 커다란 특권도 가졌지만, 때로는 권력다툼에 희생되기도 했다. 고구려를 구성한 5부족 가운데 나머지 비류나부, 연나부, 환나부, 관나부 등의 부족장과 지도부는 고구려 체제에 편입되어 관직을 맡게 되면서 점차 고구려 귀족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세습적으로 그 지위와 재산을 후손에게 넘겨줄 수 있었지만, 전쟁이 나면 직접 전투에 나가 싸워야 하는 책임도 가졌다. 대체로 3세기 말에는 각 부족이 해체되고 권력은 중앙에 집중되었다. 고구려에는 노비가 많기는 했지만, 생산의 주체는 평민들이었다. 이들은 농사를 지으며 국가에 세금을 내고,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국가의 중추였다. 고구려는 전쟁에서 포로를 잡아 노비로 사용했지만, 유능한 자에게는 그에 걸 맞는 직위를 주고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또 집단으로 복종해오는 세력에 대해서는 세금을 거둘 뿐, 생활방식 등에 대해서는 일정한 자율권을 부여해주기도 했다. 때로는 이들 집단의 군사력을 활용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고구려 세력권 안에 붙잡아 두기도 했다. 705년간의 긴 시기 동안 법과 정치제도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373년에는 기존의 관습법과 개별적으로 시행되던 법들을 체계화된 율령으로 정비해 반포하는 등 고구려는 엄격한 법에 의해 다스리는 국가였다. 반역자는 죽이고, 도둑질한 자는 도둑질한 물건의 10배를 갚도록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길에 떨어진 것도 함부로 줍지 않았으며, 감옥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국가 기강은 확고했다. 법에 의해 정부 조직과 지방 조직도 정비되었는데, 대체로 고구려 후기에는 전국과 수도를 5개 부(部)로 나누어 다스렸고, 지방행정조직은 대체로 성(城)을 단위로 편성했다. 큰 성에는 5부의 장관인 욕살, 중간급 성에는 처려근지, 작은 성에는 루초 등이 각각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다. 중앙에는 대대로, 막리지 등 13개의 관등이 있었고, 각 부서별로 해당업무를 관장했다. 5위 이상의 관등을 가진 자들이 모인 귀족회의에서는 중요한 정책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귀족회의는 초기 5부족의 지도자들이 모인 제가회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합의와 토론에 의한 정책 결정은 고구려 정치 문화의 오랜 전통이었다. • 산업 활동 고구려가 처음 건국한 지역은 농사짓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초기 고구려는 농사와 함께, 수렵과 방목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나라였다. 고구려인들은 사냥을 매우 즐겼지만, 수렵이 중요한 산업이 될 수는 없었다. 또 넓은 초원도 갖지 못했기에 대규모로 가축을 기를 수도 없었다. 따라서 군사력을 육성하여 농경민의 나라인 후한(後漢)이나, 아직까지 발전이 더딘 동예와 옥저 등을 습격하여 포로와 식량을 빼앗아 고구려의 부족한 것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포로는 유용한 노동력이 되어 고구려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후한은 고구려가 자국인을 많이 잡아가자, 마침내는 포로 1명당 비단 40필, 어린이는 그 절반을 고구려에게 주고 포로를 돌려 받았다. 하지만 약탈경제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고구려는 점차 부가 축적되고 영토가 황해를 낀 비옥한 농경지대로까지 확대되자, 농업을 발전시키는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철제 농기구를 널리 보급하고, 많은 양의 소를 농사에 활용했다. 폭 40cm, 무게 10kg가 넘는 커다란 쇠보습을 단 쟁기를 소가 끌어 경지를 개간하게 되면서 농업생산은 크게 증가했다. AD 194년 식량이 부족한 봄철에 나라의 식량을 농민에게 대여해주었다가, 수확기에 받는 진대법이 시행되면서 농민들의 생활은 크게 안정되었다. 그러자 주변국에서 많은 수의 농민들이 이주해오기도 했다. 4세기 말 이후 광개토대왕 등의 정복활동에 의해 영토가 더욱 확대되어 농경지가 늘어나게 되자, 고구려는 점차 선진 농업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농산물의 생산이 늘자, 고구려에는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게 되었다. 수도였던 국내성과 평양 등지는 물론 변방에도 거대한 시장이 들어서서 한때 초원지대의 유목민, 화북 지역의 농경민과 교역하는 고구려 서부의 국제시장인 유성(요녕성 조양시)에는 한번에 3만 명의 상인이 왕래할 정도로 번창했다. 황금, 백은 같은 것을 결제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고, 철과 인삼, 비단, 담비가죽, 각종 공예품 등은 중요한 교역 물품이었다. 동남아, 남부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시베리아까지 확대된 고구려의 대외교역 망을 통해 들어온 물자들은 수레에 실려 잘 닦여진 도로와 다리를 통해 각지로 운반되어 거래되었다. 고구려에는 국내성과 평양 외에도 인구 10만이 넘는 한성, 성 둘레만 16km 가까운 오골성을 비롯해 요동성, 신성, 건안성, 부여성, 책성 같이 인구가 밀집된 도시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후기의 수도인 평양에는 궁성을 보호하는 내성과 북성, 관청을 보호하는 중성과 함께 일반 시민들의 거주지와 시장을 보호하는 외성을 갖춘 길이 23km의 장안성이 축조되었다. 장안성 외성은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외성 구역을 둘러싼 대동강과 보통강에는 다리가 놓여졌고, 물자 운반을 위해 운하가 건설되었다. 거주지는 1개 지역마다 세로 84m, 가로 120m로 구획되어 있었고, 수레 6대가 지나갈 큰 도로와 2대가 지나갈 작은 도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고구려는 금, 은, 철 등의 생산도 매우 많았다. 특히 고대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철이 부족했던 거란과 실위에게 철을 공급해줄 정도로 고구려는 철 생산이 많았다. 철 가공기술도 매우 뛰어나 성능 좋은 많은 무기류가 생산되어 고구려의 국방력을 강화시켰다. 고구려 사람들은 수레바퀴를 만드는 신, 대장장이 신, 불의 신들을 숭배하며 기술자를 우대했었다. 이로 인해 다양한 산업이 발달하였고, 산업의 발달은 곧 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주변 국가에 대한 강한 구심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 의식주 생활 고구려의 겨울 날씨는 매우 춥다. 따라서 따뜻한 주거환경은 생활에서 매우 중요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불을 피워서 바닥 돌의 온도를 높여서 열을 내어 실내를 따뜻하게 하는 온돌 난방을 개발하여 일반 주택은 물론 궁궐과 사원, 군사 초소 등에 널리 사용했다. 현대 한국의 주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온돌 난방은 고구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온돌로 방 전체를 따뜻하게 하지 아니하고, 방의 일부분에만 온돌을 놓는 부분 난방을 했다. 대신 실내에 평상, 좌상, 의자 등의 가구를 놓고 그 위에 앉아서 생활했다. 활동성이 편한 바지와 저고리는 고구려 남성들의 기본 의상이었다. 치마(裳)를 입는 중국인들과 달리 고구려는 북방 유목민들과 같이 말타기에 유리한 바지를 입었다. 또 윗옷의 여밈도 대체로 좌측으로 여미게 하여 활쏘기를 할 때에 편리하도록 했다. 또한 단추가 없이 허리띠로 옷을 고정시켰는데 이것 역시 활동성을 고려한 것이다. 여성들은 주름치마와 색동치마, 점무늬 치마 등 다양한 치마를 입었지만, 때로는 편한 바지도 입었다. 또 화려한 문양이 장식된 겉옷을 많이 입었다. 고구려 남자들은 대체로 두발을 머리 꼭대기에 모아 방망이처럼 묶은 상투형 머리를 많이 했고, 여기에 모자를 썼다. 여성들은 다양한 머리모양을 했는데, 가발을 사용하기도 했다. 고구려에서는 비단을 비롯한 다양한 옷감을 생산되었고, 염색기술도 발달했기 때문에 복식은 매우 다채롭게 발전했다. 노비들조차 색깔과 무늬가 있는 옷을 입었다. 대체로 남성들은 실용적이고 활동적인 옷을, 여성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편안한 옷을 즐겨 입었다. 고구려인들은 다양한 식생활을 즐겼는데, 조와 쌀, 콩 등이 중요한 곡식이었다. 보리, 밀, 기장, 수수 등은 보조적인 곡식이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쌀의 소비량이 많아졌다. 식사법은 초기에는 곡식을 가루로 내어 토기에 물을 붓고 가열함으로써 죽으로 먹었으나, 곧 시루에 곡물을 쪄서 먹다가 점차 무쇠 솥에 밥을 해먹었다. 고구려를 대표하는 음식으로는 양념을 한 고기구이 요리인 ‘맥적’이 있다. 현대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인 불고기의 원조가 된다. 고구려 사람들은 ‘맥반’이란 식탁에서 ‘조두’라 불리는 좋은 그릇을 비롯해 여러 개의 그릇에 음식을 담아 놓고 수저와 젓가락을 사용해 식사를 했으며, 고기를 썰기 위한 ‘오자도’라는 작은 칼을 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배추나 아욱, 무 등은 소금에 절여 먹었다. 이 음식에 뒷날 고추가 첨가되는데, 이것이 현대 한국의 대표적 음식인 ‘김치’이다. 고구려는 콩의 원산지답게 콩을 이용한 된장과 간장 등의 장류를 잘 만들어 먹었으며, 술도 잘 빚어 먹었다. 집필: 서길수(고구려연구회장) 2004.09.01
- 고구려는 어떤 나라인가? ◦ 고구려의 건국과 성장 고구려는 아시아 동부 지역에서 넓은 영역을 차지하며 화려한 역사를 꽃피웠던 고대 제국(帝國)이다. BC 37년에 건국되어 AD 668년 멸망할 때까지 705년간 고구려가 이룬 역사적 성취는 후손들에게 커다란 자랑이 되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처음에는 압록강 유역의 졸본 지역에서 아주 미약하게 출발하였다.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은 부여국 출신의 추모왕(고주몽)이다. 그가 부여를 탈출해 처음 고구려를 건국할 때에는 궁궐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할 정도였고, 식량 생산도 넉넉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주변에는 비류국, 선비, 부여, 한 같은 강국들이 많이 있었다.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남에게 굴복하여 제후국으로 살아야 할 상황이었다. 고구려는 강한 리더쉽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소국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가는 팽창정책을 펼쳐갔다. 주변의 비류국, 옥저, 행인국, 양맥 같은 작은 나라를 정복한 고구려는 AD 1세기 초에는 부여국마저 압도하는 나라로 성장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앞서 있었던 고조선과 부여의 문화적 토대와 외래의 여러 문화적 요소를 흡수하여 1세기 중반 태조대왕 시대에는 체계적인 지배체제를 갖춘 안정적 국가로 자리 잡았다. 태조대왕은 후한의 동방군현인 낙랑, 현도, 요동군을 공격하여 이들을 서쪽으로 쫓아내며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평야 지대로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246년 고구려는 서쪽에서 쳐들어오는 위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일시 함락되는 등의 상처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고구려는 곧 국력을 회복하여, 위나라의 거듭된 공격을 격퇴했다. 또 북쪽의 부여와 숙신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4세기 초 미천왕이 낙랑, 대방군을 소멸시켜버리는 등 고구려는 꾸준하게 성장을 해갔다. 그러나 342년 모용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다시 한번 수도가 함락되고, 371년에는 남쪽으로부터 백제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죽는 등 고구려의 발전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 고국원왕의 뒤를 이은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고구려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내부 제도부터 고쳐가기 시작했다. 율령을 제정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고, 불교를 도입하여 사상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태학을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주력하는 등 두 왕을 거치면서 고구려는 단단한 국력을 다질 수 있었다. 391년 등장한 광개토태왕은 고구려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그는 축적된 고구려의 힘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펼쳐 남쪽으로 한반도 남부의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고, 백제와 가야, 왜를 굴복시켜 조공을 받았다. 북쪽으로는 숙신과 동부여를 속국으로 굴복시켰으며, 서쪽으로 현재의 서요하 중상류에 있는 거란족을 정벌하였으며, 모용선비족이 세운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했다. 그의 아들 장수왕 시대에는 북으로 더욱 세력을 넓혀 대흥안령에 위치한 지두우를 유목제국인 유연과 함께 분할하여 차지하기도 했으며, 남쪽으로는 경기만에서 경상북도 영일만에 이르는 지역을 직접 지배하기도 했다. 고구려의 영토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넓어져 북쪽 영역은 대체로 동류송화강, 서쪽은 요하를 넘어 의무려산, 동쪽은 연해주 남부에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이 영역을 넘어 유목민 부족 등에 대한 간접지배 방식을 고려한다면, 고구려의 세력권은 대체로 현재의 만주 전역과 연해주 일대, 한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국을 건설하였다. 거대한 세력권 안에는 거란, 말갈, 지두우, 신라, 예 등이 속국과 속민의 형태로 속해 있었다. 이 무렵 고구려는 스스로를 천하의 질서의 수호자, 천하에서 가장 신성한 나라로 자부하는 제국이었다. 5-6세기 고구려는 유목제국인 유연, 황하 유역에 선비족이 세운 북위, 양자강 유역에 한족이 세운 송나라 등과 함께 동아시아 4대 강국의 하나가 되었다. 고구려는 항상 전란이 끊이질 않았던 북위나 송 등과 달리 상대적 평화를 누리면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백제와 신라, 왜 등은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 6세기 초 북중국의 지배자 북위는 고구려를 일컬어 커다란 술항아리라고 일컫고, 그 안에 작은 술독이 빈 것은 고구려의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고구려가 만리장성 동쪽에서 하나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주변국에서도 서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 고구려의 전성기에도 한 차례 위기가 닥친 바가 있다. 540년대 왕위계승권을 놓고 귀족간의 다툼이 한 차례 벌어진 이후, 55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유목제국인 돌궐이 공격해오고, 이 틈을 타서 백제와 신라 양국이 남쪽에서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신라에게 한반도 중부지방을 내주고, 돌궐과의 전쟁에 전념하여 승리를 거두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더 큰 위기는 6세기 후반에 찾아왔다. 동아시아 4강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강자가 수나라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수나라는 황하와 양자강 일대에서 서로 자웅을 겨루던 나라들을 통일하고, 초원을 지배하던 돌궐마저 굴복시켜 버렸다. 결국 고구려는 팽창주의 정책을 고수하던 수나라와 격돌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충분한 정보를 수집하고, 무기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내적 단결을 꾀하며 전쟁에 대비했다. 612년 고구려는 수백만 대군을 동원해 공격해온 수나라 군대를 맞이하여 살수 전투에서 적의 별동대 30만 5천명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는 등, 4차례에 걸친 수나라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었다. 결국 수나라를 패전의 후유증으로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다. 30여 년이 지난 뒤 고구려는 수를 계승한 당나라와 또 다시 전쟁을 해야 했다. 645년 고구려는 서부 변방의 군사요지인 신성과 건안성, 안시성과 주필산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중국 최고의 제왕으로 칭송 받는 당태종이 이끄는 수십만에 달하는 당군을 격파했다. 당나라는 661년에도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해왔으나, 다음해 2월 고구려군은 당의 주력군을 모두 궤멸시키는 등 당의 침략야욕을 분쇄하였다. • 고구려 멸망과 계승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강대국도 결국에는 멸망한다. 이 점에서 고구려도 예외는 아니었다. 642년 권력을 쟁취한 연개소문은 645년과 662년 당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의 명장이었지만, 그는 독재정치라는 폐해를 남겼다. 그의 독재정치로 인해 고구려는 인재 등용의 폭이 좁아들고, 새로운 정세 변화에 둔감해져갔다. 게다가 그가 죽자 후계자 자리를 두고 그의 첫째 아들 남생과 둘째, 셋째인 남건, 남생 형제간의 내분마저 일어났다. 이 싸움에서 패한 남생은 고구려를 배신하여 적국인 당나라에 투항하여 고구려의 고급정보를 제공했다. 거듭된 당과의 전쟁으로 국내 생산기반이 약화된 상태에서, 독재 정권으로 인한 폐해와 지도층의 분열과 배신마저 생긴 것이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 당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멸망하였다. 고구려의 멸망의 여파는 매우 컸다. 동아시아의 다원 문명의 한 축을 이루던 고구려가 사라짐에 따라, 동아시아에는 당나라 중심의 단일 문명권이 형성되었고, 그것은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로 굳어졌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고구려인들은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결국 고구려 후예인 대조영이 698년 발해를 건국함으로써 고구려를 이었다. 발해(698-926)는 외국에 보낸 국서에서 고려(고구려)왕이라고 표시하는 등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랑으로 여겼다. 발해에 뒤이은 고려(918-1392) 또한 고구려의 국호를 그대로 이어 ‘고려’라고 했다(고구려 후반기에는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했다. 집필: 서길수(고구려연구회장) 2004.09.01
- 고구려 유물(5) 유물이 출토되는 고구려의 고분은 구조상 도굴이 쉬운 탓에 많은 유물이 남아있지 않으며, 일제 강점기 동안에는 발굴을 명분으로 많은 유적이 파괴됐다. 고구려 유물은 다양한 종류의 금동공예품과 토기를 비롯한 기와·벽돌 등 소조품, 각종 철기 및 청동기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토기는 고구려 유물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데, 시간적·공간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고구려 토기는 바닥이 납작한 평저기(平底器)가 많고, 고운 점토로 된 니질(泥質) 태토가 많으며, 표면색조는 황색·흑색·회색이 주를 이룬다. 철기는 무기류와 마구류, 농공구류 및 용기류로 구분되는데 각각의 기능에 따라 서로 다른 재질의 철기를 사용하였으며, 제작 기법도 다양하다. 철제 무기와 마구의 발달은 전력의 향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기병전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금동공예의 대표적인 것으로 금동관(金銅冠) 및 관장식을 들 수 있다. 불꽃무늬맞새김금동관(火焰文透彫金銅冠)은 인동(忍冬)무늬를 맞새김한 테두리 위에 아홉 개의 불꽃무늬를 세워 장식하였으며, 테두리의 양쪽에는 옷고름과 같은 모양의 드리개 장식을 두 개 늘어뜨렸다. 고구려의 불상은 5~6점에 불과하지만 제작 연대와 제작 동기 등을 기록한 명문이 남아있는 예가 많아 중요하다. �돛슝ゴ�금동판과 함께 나온 종이는 삼섬유로 만들어진 것으로 매우 고르고 치밀하게 만들어졌다.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보다 먼저 기와를 사용하였는데, 국내성(國內城) 도읍기에 이미 기와제작기술을 받아들여 기와를 얹은 목조건물을 축조했다. 기와의 종류는 암키와, 수키와, 그리고 막새기와(瓦當)·반쪽막새기와(半瓦當)·치미기와(鴟尾) 등 다양하다. 2004.08.31
- 중국 집안 지역의 고구려 고분벽화(5) ◆무용총,춤무덤(Muyongchong-Chummudeom, 舞踊塚)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縣). 광개토태왕비의 북서쪽 약 1km 지점에 각저총(角抵塚)과 나란히 있다. 이 고분은 묘실의 동쪽 벽에 14명이나 되는 남녀가 대열을 지어 노래를 부르고 춤추는 무희들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로 인해 무용총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춤무덤이라고도 한다. ◆각저총-씨름무덤(Gakjeochong-Ssireummudeom, 角抵塚) 광개토태왕릉의 북서쪽 약 1km 지점에 무용총과 나란히 있다. 각저총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무덤 현실의 동쪽 벽에 고구려의 전형적인 씨름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 5세기말 6세기초의 고분으로 추정된다. ◆오회분 4호묘(Ohoe Tomb No. 4) 중국 길림성 집안시 우산하 고분군에 속하며, 6세기 중반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오회분이란 이름은 그 곳 사람들이 5기의 거대한 봉토분이 마치 투구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부른 이름이다. 오회 4호분은 고구려 후기 무덤으로서 고도의 건축 기술 및 발전된 벽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집안 20기 벽화 고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고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4.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