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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싶다, 골목의 맛
"제철 이기는 조미료는 없다"…서산 바지락 칼국수
제철 이기는 조미료도, 묘수도 없다. 거의 모든 음식이 그렇겠지만 조개는 유독 두드러진다. 올 봄에는 조개를 만나러 가보시라. 서해안의 어느 지역이든 바지락이 좋다. 칼국수를 끓여도 조개탕을 만들어도 좋다. 시원한 바다가 한 가득 들어 있는 그릇을 들이켜면 세상을 더 오래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된다. 박찬일 셰프 대도시에서 바지락 칼국수집 찾는 일이 어렵지 않다. 과거에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주로 마른멸치로 육수 내는 집이 많았다. 조개를 신선하게 운송하는 일이 쉽지 않았겠지. 이제는 음식의 지역성이 점차 허물어져 간다. 좋은 일일 수도, 아닐 수도. 어쨌든 서울 같은 대도시라면 언제든지 바지락 칼국수를 사 먹으러 갈 수 있다. 서울 동작구의 한 칼국수집에 다닌 적이 있었다. 안주인이 정갈하게 음식을 하고 남편은 홀을 보는 그런 흔한 집이었다. 내가 요리사라는 걸 안 그들은 심각하게 물었다. "바지락이 요새 좋은 게 별로 없어요. 값도 많이 올라서 구하기도 쉽지 않고. 방법이 없겠습니까." 나는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바지락이 맛있는 철이 아무래도 봄 정도잖아요. 제가 보니, 사장님은 사철 바지락칼국수를 팔고 있어요. 조개가 맛이 없을 때는 안 파시는 게 어떨까요. 소뼈로 하는 사골칼국수와 멸치칼국수를 주력으로 하시고, 바지락은 제철 메뉴로 하는 게 어떨까요." 그는 그다지 반색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저라고 왜 그 생각을 안했겠어요. 바지락을 안 팔면 앉았던 손님도 돌아서 나가버리곤 합니다." 국수골목 상인들이 칼국수를 준비하고 있다. 2025.12.2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미디어의 영향 때문인지 제철이고 지역이고 흐려진 시대다. 전라도 음식을 강원도에서도 먹을 수 있고, 경상도 음식을 충청도에서도 판다. 작은 땅덩어리에서 지역이 어디 있냐고, 몇 시간만 달리면 재료가 전국을 누비는 나라인데 말이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이 나라의 골과 산과 바다는 깊고 주름져서 개성이 뚜렷하기도 하다. 김치 맛이 다 같아졌다고 해도 지역에 가보면 여전히 개성 강한 김치가 식당에 나오곤 하는 것처럼. 바지락 칼국수를 떠올리면 충청도 서산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내가 처음 먹었던 땅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후배들과 철마다 산지로 재료를 보러 다녔다. 울진의 가자미며 고흥의 농어며 청주의 버섯 같은 제철 재료를 찾았다. 제철이란 건 잠깐 한눈을 팔면 번개처럼 미련없이 사라져버리는 존재다. 미리 길목을 지키고 있지는 못할망정 제 날짜를 지나치면 국물도 없다. 서산은 서울에서도 가깝고 해서 후배들이 종종 차를 몰았다. 겨울 끝자락에는 굴과 새조개를, 그 다음에는 그쪽에서 간재미라고 부르는 작은 가오리를, 어쩌다가는 너무도 제철이 짧은 투명한 실치를 보러 가는 땅이 그곳이었다. 그날도 그 무렵의 봄날이었다. 봄의 충청도 해안은 대개는 뿌연 날들이 많다. 다행히 그날은 아주 맑았다. 서산의 시장은,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수십 년 전에는 장날이면 함지를 들고 나온 아낙들이 많았다. 이런저런 생선들이며 해물등속과 이른 봄나물을 파는 흥미로운 장터가 열렸다. 간재미 몇 마리를 사서 시장 구석에 있는 밥집을 찾았다. 대도시는 어렵겠지만, 지역의 시장은 원래부터 '오마카세'가 된다. 원하는 메뉴를 적당히 만들어준다. 어물이 흔한 동네는 생선찌개가 언제든지 되고(물론 특정 생선을 콕 찍어서 말해도 좋다) 고기를 먹을 수도 있다. 좀 더 나아가면 아예 장을 봐서 재료를 가져다드리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재료 손질에는 이력이 난 할머니들이 아주 신이 나서 요리를 하신다. 그날도 그렇게 간재미를 회로, 무침으로 요청을 넣어두고 기다리는데 옆자리 아저씨들이 아주 맛있는 국수를 드시고 있는 게 아닌가. 커다란 양푼에 가득 국수를 담아서 후룩 후루룩 잡숫는 게 여간 맛있어 보이지 않았다. 바로 '바지락칼국수'였다. 흔하디 흔한 조개 바지락이라고 하지 마시라. 산지에서 먹는, 제철 바지락은 잊을 수 없는 미각이다. 어차피 다 같은 조개이고, 산지의 조개가 도시로 오는 것일 텐데 맛 차이가 없을 수도 있겠다. 뭐, 그 정도의 생각으로 주인 할머니에게 우리도 칼국수를 좀 해달라고 말했다. 별일도 아닌 주문일 터라, 그러마고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포를 한잔 하자 칼국수가 나왔는데 무심코 국물을 한 입 떠 넣은 후배가 갑자기 얼어붙은 듯 입을 다물었다. 뭐지, 모래라도 씹은 걸까. 왜 그래? 후배는 답도 없이 국물을 한껏 들이켰다. 질문 안 받겠다는 표정으로. 일행은 그렇게 바지락칼국수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조개가 얼마나 싱싱하고 영양을 가득 품었는지 진득한 육수를 뿜어냈다. 이 세상의 모든 조미료를 다 가져와도 이길 수 없는, 인간의 기술로는 발치에도 닿을 수 없는 감칠맛이 양푼의 열 배 크기로 밀려들어왔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달고 시원했다. 몇 해가 지나고 다시 그 집을 찾아서 국수를 청했다. 불행하게도 감동의 그 맛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아주 명쾌하게 해답을 냈다. "지금은 가을이여…" 이 얘기를 글 서두의 칼국수집 사장님에게 꼭 해드려야겠다. 달리 방법이 없다고 말이지. 조미료를 아무리 좋은 걸 써도 계절을 못 이긴다고 말이지.◆ 박찬일 셰프 셰프로 오래 일하며 음식 재료와 사람의 이야기에 매달리고 있다. 전국의 노포식당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일을 오래 맡아 왔다.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등의 저작물을 펴냈다.
2026.03.27
박찬일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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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새 지평
미·이스라엘의 이란 전쟁과 한국의 대응
무엇보다 정부는 당장 닥쳐오는 큰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국익을 지키는 데 집중해 왔다…정부의 경제 대책은 먼저 국민의 최소한 경제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하고, 우리 산업의 생산 활동에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하며, 산업 내에서도 우선순위를 점검해 물량이 흘러갈 수 있도록 할 것이다.홍현익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 미국의 2월 28일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이란 전쟁이 당초 트럼프 대통령이 조기 종전을 장담했던 것과 달리 확전 양상을 보이고 장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인권 존중이 시대정신이 된 현대사회에서 다수의 민간인을 포함한 수많은 인명 살상이 자행되는 전쟁의 도발은 오로지 자국에 대한 상대국의 공격이 명백히 임박할 때만 정당화될 여지가 있는데 미국의 전쟁 개시는 이에 너무도 부족한 상태에서 감행됐고 미국은 이를 입증하려 하지도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한국 정부의 입장은 안타까우며 유감스럽지만 매우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정부는 당장 닥쳐오는 큰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국익을 지키는 데 집중해 왔다. 중동지역에 체류 중이던 국민들이 현지시간 14일 '사막의 빛'으로 명명된 이번 작전으로 공군 수송기(KC-330)에 탑승한 후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외교부 제공) 특히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지향하는 이재명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 경제 안정과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배려하고 이에 정책을 펼쳐왔다. 이란과 인근 국가들에 있다가 갑자기 위험에 빠진 우리 국민을 무사히 구출하고 전쟁으로 파생된 석유 등 에너지 수급 위기에 대처해 공급을 확보하고 가격을 안정시키는 등 경제를 안정시켰다. 또 한미동맹을 지키면서 국가안보를 확고히 하고 미국이 요구하는 호르무즈 해협 파병 요청에는 슬기롭게 대응하면서 한미 관계를 안정시켰다. 우리 국민 구출 '사막의 빛' 작전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3월 5일 이란 전역에 대해 여행경보 4단계 '여행금지'를 발령했다. 전쟁이 예상과 달리 장기화하고 악화해 중동 국가들의 항공편이 끊기면서 중동 지역에 있는 한국인들의 신변에 위협이 생겼다. 대사관 지원 버스를 이용해 투르크메니스탄 국경을 넘어 대피시켰고, 민항기와 전세기로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의 교민들을 이송했지만, 그 외 전쟁의 영향을 받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레바논의 한국 교민들은 계속 전쟁의 위협에 노출돼 있었다. 정부는 3월 10일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군용기 활용을 결정하고 외교부,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공군과 경찰청이 참여한 정부합동 신속대응팀을 구축해 사막의 빛 작전을 시행했다. 작전의 성사 및 원활한 진행을 위해 조현 외교부 장관과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각각 사우디 외교장관 및 국방장관과 통화해 사우디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했다. 대응팀이 현지로 급파된 후 외교·국방 관계자들은 시차를 넘어 실시간으로 소통해 공군 급유수송기 시그너스가 거쳐야 하는 10여 개 국가의 영공 통과 승인을 받아내고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로 4개국 교민들을 집합시켰다. 지난 14일 김해기지에서 공군 공중급유수송기(KC-330)가 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해 이륙하고 있다.(사진=외교부 제공) 3월 14일 리야드에 도착한 KC-330 시그너스기와 임무요원들은 한국 교민 204명(한국·일본 복수국적자 1명 포함)과 외국인 7명(외국인 5명, 일본 국적자 2명)을 포함한 총 211명을 급유수송기에 태우고 영공 개방된 나라들을 거쳐 3월 15일 서울공항으로 무사 귀환했다. 정부는 우리 국민을 안전하게 구출해 국민 주인 정신을 실현했다. 게다가 다카이치 일본 총리가 "한국 정부와 한국군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밝혔듯이 한일 간 형성되고 있는 우호 관계도 한층 돈독하게 했다. 물가와 경제 안정 전쟁 당일인 2월 28일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제1차 실물경제 점검회의'를 개최하고 연이어 3월 1일에는 차관 주재 2차 회의, 3일에는 필리핀에서 3차 회의를 화상으로 진행하는 등 긴박하게 에너지 가격 인상과 공급망 수급 안정화 방안을 마련했다. 유가 상승, 에너지 수입망 불안정, 주요 무역로 폐쇄 등의 여파가 자원 수급 등 국내 산업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고 석유 수급, 가스 수급, 해상 물류, 국내 산업 공급망, 전력 수급 안정화 대책을 마련했다. 3월 13일부터 정부는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를 시행해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가격이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하도록 상한선을 뒀고, 최고가격이 2주 단위로 조정되므로 27일 2차 최고가격을 발표할 예정이다. 또 일정 부분 국민의 소비 절약을 요청하고, 차후에 재정으로 정유사 손실을 부담해 주는 대신 정유사들은 가격을 급하게 올리지 않도록 하면서 유류 가격을 최대한 안정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아울러 상황이 더 악화하면 에너지 절약 정책과 관련해 차량 5부제·10부제 등의 도입도 검토하는 등 적극 대처하고 있다. 정부의 경제 대책은 먼저 국민의 최소한 경제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하고, 우리 산업의 생산 활동에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하며, 산업 내에서도 우선순위를 점검해 물량이 흘러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원유 도입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비상 상황이므로 대체 수입선 확보뿐 아니라 정유사에 대한 수급 조정 명령이나 수출제한 조치 같은 비상 플랜도 강구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파병 요청 대응 전쟁이 장기화하고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해 세계 석유의 20% 정도의 공급이 차질을 빚자, 국제 원유가가 2배 정도로 인상돼 세계 경제가 불안정해졌다. 특히 원유 공급의 91%와 71%, 44%를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중동 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과 한국, 중국 경제의 타격이 가장 컸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은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영향으로 액화천연가스(LNG) 가격 상승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4일 인천 연수구 송도 한국가스공사 인천생산기지 터미널에 LNG 수송선이 정박해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은 3월 14일 호르무즈 해협 폐쇄에 피해를 보고 있는 한·중·일과 프랑스 및 영국에게 해협 개통에 필요한 기뢰 제거 및 유조선 호위를 위한 군함 파견을 요청했다. 사실 미국과 동맹이더라도 침략을 당했을 때 도울 의무가 있는 것이므로 이번 경우에는 파병 의무가 없다. 유럽 동맹국들뿐 아니라 중국도 파병을 거절하면서 항변했듯이 미국이 불을 지르고 나서 함께 끄자고 하는 격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중동 석유에 별로 의존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에 의존하는 나라들이 자국 이익을 챙기는 차원에서 파병하면 미국은 돕겠다는 입장이다. 또 우리 경우에는 에너지 자급률이 84.6%인 중국과 달리 중동 원유 의존도가 매우 높고, 국가안보와 경제 모두 미국과 긴밀한 관계이며 관세 문제와 원자력 협정 개정과 원자력추진잠수함 건조 등의 중요한 현안도 있으므로 유럽 국가들이나 중국처럼 단호히 거절하기는 쉽지 않은 처지다. 이런 맥락에서 다카이치 총리가 이번 미·일 정상회담에서 구사한 외교에서 함의를 얻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처한 어려워진 정치적 위상을 치켜세워주기 위해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규탄하고 미국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며 원자력, 조선, 희토류 등 핵심 광물 협력 의사 등 미국이 필요한 산업에 2차 대미 투자 프로젝트를 시행할 것임을 밝히면서 이란전의 조속한 종전과 한미 관계 발전을 희망한다는 의사표시와 함께 파병은 어렵지만 간접 지원은 제공하겠다는 수준으로 난관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다급한 상황이 전개되자 우리와 상의 없이 패트리어트(PAC-C)와 사드 반출을 시행하는 미국의 모습을 보여준 이번 전쟁의 교훈은 한국의 안보는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는 국방과 첨단기술력 강화, 그리고 공급망 및 수출로 다원화 등 제반 부분에서의 자강력 배양과 강화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전시작전권을 차질 없이 조속 환수하는 동시에 한미동맹의 우의는 지키고 강화하며 한미일 안보 공조도 유지하되 중국과의 관계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러시아 및 북한과의 관계도 정상화를 거쳐 호혜적인 협력을 도모하는 길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홍현익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 27년 간 세종연구소에서 북핵문제, 남북관계, 한미동맹, 한러관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 한국의 국가안보와 국가전략을 연구했다. 한반도 정세 안정과 평화 구축 및 평화통일을 위해 화해와 공동번영 및 국익 극대화를 지향하는 실용외교를 주창해왔다. 국정기획위원회 외교안보 분과장을 맡았다.
2026.03.25
홍현익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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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경제다
코스피와 반도체 그리고 이중 양극화
반도체에 극단적으로 편중된 산업구조로 만든 수출 호조와 성장률 개선, 주식시장 붐 등으로는 상생 생태계는 기대하기 어렵고, 한국 경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서 제일 큰 근본적인 문제가 양극화"(이재명 대통령, 2025년 12월 16일 국무회의)라고 말한 것처럼 양극화 해결 없이 우리 사회 비정상의 정상화는 요원하다.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출범한 지 10개월이 되어 가는 이재명 정부는 우리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비정상적인 요소의 정상화를 대전환과 대도약을 위한 출발점으로 설정하고 있다. 경제에서도 국정 정상화의 결과로 수출 호조나 성장률 2%대 회복, 특히 코스피 5000 돌파를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회복세에서 여전히 소외된 중소기업, 지방, 노동 부문, 특히 취약 청년 문제를 해결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코스피가 종가 기준 사상 처음 6000선을 돌파한 25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직원들이 축하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2026.2.25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그러나 수출, 성장률, 코스피 5000 등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해결 과제들이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단기간에 급등한 코스피 붐은 수출 및 성장률의 내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코스피 붐의 원인으로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기업 실적과 더불어 상법 개정을 통한 지배구조 개선 등을 꼽는다. 실제로 2024년 2분기부터 1년 간 분기 당 50조 원 안팎을 움직였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반도체 매출액이 지난해 3분기 58조 원, 4분기 77조 원으로 급등하였다. 그렇지만 코스피 붐의 기저에는 외국인의 매도를 개인투자자들이 받아주며 시장을 떠받치고 있듯이 많은 국민의 자산 증식 욕망이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욕망은 일자리와 소득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적 현실의 산물이다. 예를 들어, 최근 공개한 국세청 1000분위 통합소득 자료를 보면 중위소득자의 월평균 실질소득은 220만 원에 불과하고, 10년 전인 2014년에 181만 원이었으니 지난 10년 간 연평균 증가액은 4만 원도 되지 않았다. 또한, 고용노동부의 사업체노동력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자리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상용직의 지난해 12월의 월평균 실질 급여도 431만 원으로 10년 전인 2015년의 436만 원을 밑도는 현실이다. 200만 명에 가까운 임시직·일용직의 실질 월평균 수입은 153만 원으로 2015년의 155만 원을 밑돈다. 여기에 갈수록 악화하는 자영업자 1인당 평균 수입은 임금노동자 소득의 35%도 되지 않는다. 이처럼 보통 사람들은 10년째 정체된 불충분한 소득으로 생활과 자녀 교육을 해야 하고, 여기에 갈수록 양질의 일자리 부족과 일자리 단기화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청년층은 저임금 알바 일자리에 내몰리고, 장년층은 노후 빈곤의 위협 속에 살아가고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산 증식은 유일한 출구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이 코스피 붐에 열광하는 배경이다. 문제는 자산 양극화가 소득 양극화보다 심하다는 점이다. 하위 50%가 차지하는 소득은 16%인 반면, 자산은 10%에 불과하다. 국가데이터처의 가계금융복지조사 마이크로데이터를 보면, 상위 0.1% 가구의 순자산은 2017~2025년 사이에 43억 5140만 원이 증가하였고 중위 50% 가구의 순자산은 5132만 원 증가하였다. 이 중에서 채권 포함 주식 자산의 증가는 각각 8억 3518만원과 491만 원이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세후 개인 소득의 경우 상위 0.1%는 2억 8512만 원이 증가하였고, 중위 50%는 793만 원 증가에 불과했다. 통계 수치는 부를 축적하는 길이 소득보다 자산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즉 노동을 통한 소득 증식은 멍청한 짓이다. 코스피 붐은 지난해 2분기, 특히 트럼프 관세 전쟁 선포 충격이 다소 진정되기 시작한 4월 중순 이후부터 본격화하였다. 2025년 3월 기준 계층별 가구의 주식 소유액을 보면 상위 0.1%는 15억 1245만 원, 중위 50%는 841만 원이었는데, 여기에 최근 2월 말까지 주식 평균 수익률을 단순 적용하면 상위 0.1%와 1%의 주식 자산은 각각 11억 1353만 원과 1억 6543만 원 증가했던 반면 상위 30%와 중위 50%의 주식 자산은 각각 842만 원과 619만 원 정도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주식 자산을 보유하지 못한 하위 30%는 코스피 붐의 혜택에서 소외되었을 것이다. 코스피 붐으로 중산층 역시 자산 증가의 혜택을 누렸지만, 자산 양극화는 더 벌어졌다. 이런 결과는 기본적으로 자산 시장이 돈의 힘이 지배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코스피 붐을 통한 자산 증식은 실물경제 성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코스피 붐이 시작된 2025년 2분기부터 4분기까지의 주요 경제지표를 1년 전인 2024년 2분기부터 4분기까지와 비교하자. 먼저, 실물경제를 위해 돈이 얼마나 잘 도는지를 나타내는 화폐유통속도를 보면 2024년 2분기에 0.652에서 4분기에는 0.656까지 증가하였다. 특히 정치 리스크가 가장 고조되었던 2025년 1분기에도 0.656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코스피 붐이 시작된 2025년 2분기부터 4분기까지는 0.652에서 0.649로 하락하였다. 24년 4~12월과 25년 4~12월 간 실물경제 지표 비교. 통화량이 106조 원이나 더 풀렸으나 풀린 돈이 실물경기로 유입되지 못하고, 자산 가격 및 물가를 자극한 것이다. 실제로 은행의 산업 대출금이 2024년 2분기부터 4분기에는 94조 원이었으나, 2025년 2분기부터 4분기에는 89조 원으로 14조 원이나 줄어들었다. 특히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이 9.3조 원이나 줄어들었다. 반면, 주식시장 대기 자금인 현금성 통화량은 비교 기간 중 28조 원에서 124조 원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풀린 돈 대부분이 주식시장으로 흘러간 것이다. 특히 중산층과 저소득층에게 부담이 큰 식료품 물가가 크게 상승하였다. 자산 및 물가 인플레로 이중 소외를 겪고 있다. 이처럼 소득 양극화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주식시장 붐은 실물경기를 강화하지 못하면서 자산 양극화만 악화시킨다. 소득과 자산의 이중 양극화는 신분 대물림으로 이어진다. 2025년 순자산 상위 0.1% 가구 자녀의 교육비 지출은 2578만 원, 상위 10% 자녀는 1703만 원, 상위 30% 자녀는 736만 원, 중위 50% 자녀는 556만 원, 하위 30% 자녀는 273만 원이었다. 그런데 이는 8년 전인 2017년의 자녀 교육비 지출보다 상위 1%는 1048만 원, 상위 10%는 277만 원, 상위 30%는 69만 원이 증가한 수준이라면, 오히려 중위 50%와 하위 30% 자녀의 교육비 지출은 각각 276만 원과 443만 원이 줄어들었다. 소득과 자산의 이중 양극화로 계층별 자녀 교육비 지출의 격차가 갈수록 확대되고, 이는 자녀의 경제력 격차로 이어지며 신분의 대물림을 고착화하고 있다. 반도체 수출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난해 18.4%에서 1년 만에 두 배 이상 증가한 37.3%(2월 기준)에 달한다. 그 결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이 코스피의 40%(2월 말 기준)를 차지한다. 반도체에 극단적으로 편중된 산업구조로 만든 수출 호조와 성장률 개선, 주식시장 붐 등으로는 상생 생태계는 기대하기 어렵고, 한국 경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서 제일 큰 근본적인 문제가 양극화"(이재명 대통령, 2025년 12월 16일 국무회의)라고 말한 것처럼 양극화 해결 없이 우리 사회 비정상의 정상화는 요원하다. 소득 양극화는 지난 10년간 정체 혹은 후퇴하는 서민 소득을 시장 소득에만 맡긴 결과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사회소득은 OECD 평균보다 25년 기준 157조 2171억 원이 적다. 이는 국민 1인당 1년에 305만 원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4인 가족 기준으로 매달 100만 원 이상을 적게 누리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비정상적인 조세체계에서 비롯한다. 2024년 기준 개인별 소득 총액은 1131조 원에 달하는데 이중 공제 혜택이 적용되는 소득이 410조 원이나 되고, 이중 103조 원이 감세로 이어진다. 103조 원 세금 공제 중 38조 원을 상위 10%가 누리고 있다. 문제는 지난 10년 간 세금 공제가 45조 원이나 증가할 정도로 비정상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상위 10%의 세금 공제 혜택이 지난 10년 간 17조 2000억 원이나 증가할 정도로 대한민국은 부자친화적인 정책이 계속되고 있고, 그 결과가 돈이 지배하는 경제구조의 고착화다. 돈의 힘이 지배하는 시장을 견제해야 할 정치가 오히려 돈의 힘을 부추긴 결과가 이중 양극화와 신분 대물림이다. 비정상적인 조세체계의 정상화는 양극화 해결의 출발점이다. 인적 공제를 중심으로 공제 제도를 재편하면 된다. 공제 폐지 후 추가 세금 수입을 전 국민에게 1/n로 배분하면 중산층과 저소득층, 특히 하위 50%의 소득이 크게 개선된다. OECD에서 소득세율은 높은 국가로 분류되는데 GDP에서 개인소득세가 차지하는 비중이나 소득재분배 효과는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라는 비정상의 정상화가 기본사회의 출발점이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자 최배근 경제연구소 이사장. 건국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사학회 회장, 민족통일연구소 소장, 대안학교인 민들레학교 설립자이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누가 한국 경제를 파괴하는가, 화폐 권력과 민주주의 등이 있다.
2026.03.20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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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일의 미래
구슬을 꿰자
기계로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들자마자 인공지능을 이용해 이렇게 한눈에 볼 수 있는 현황판을 만든 것이다. 인공지능을 도입한다는 건 이런 의미다… 기계가 읽을 수 있는 데이터를 넘어 '기계가 이해할 수 있는 데이터'를 제공해야 한다.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전종홍 국가인공지능(AI)전략위원회 위원이 최근 국가 AI 재정사업 533개, 41개 부처, 27조 5000억 원의 예산을 데이터로 변환했다. 그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기초 자료는 PDF 파일 5296페이지다. 전체 예산에서 AI 재정사업을 추려냈다. 인쇄용으로 만들어졌다. 기계 판독(Machine readable)이 사실상 불가능한 형태다. 내용을 보면 테이블의 컬럼(열) 구조가 일치하지 않고(전체 533건), 페이지 경계에서 데이터가 잘리고, 사업명이 잘리고, 사용하는 특수문자가 서로 다르다. 당연히 5296페이지 PDF 이대로는 전문가들도 전수 분석이 불가능하다. 일반 시민이 파악하지 못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533개 사업이 동일한 양식을 사용케 돼 있으나 실제로는 부처마다 상당한 변형이 존재했다. 총괄표의 헤더를 변형하고, 내역 사업 섹션의 헤더를 변형하고, 내역사업의 표기를 변형하고, 예산 데이터의 위치를 변형한다. 데이터 표현도 제각기 달랐다. 음수를 표현하는 기호도 몇 가지나 되고, 백만 원을 쓰는 곳, 천 원을 쓰는 곳, 원을 쓰는 곳 단위가 다르다. 증감률도 순증, 순감, 신규, 숫자 %를 섞어서 쓴다. 값이 없으면 표기도 네 가지가 섞여서 쓰였다. 어떻게든 기계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데 서른 개가 넘는 예외 로직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갖은 고생을 해서 가까스로 기계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고쳤다. 이 과정에서 투입된 개발비용과 시간은 대체 누가 보상하나.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AI 서밋 서울 & 엑스포 2025'를 찾은 참관객들이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2025.11.10.(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 결과가 이 플랫폼(https://hollobit.github.io/KAIB2026/)이다. 다들 한 번씩 꼭 열어보기를 바란다. 부처별 예산 비중, 사업유형 분포, 회계유형별 예산 구성, 예산 증가 TOP10, 예산 증감률 분포, 예산 규모별 사업 분포, 예산 요구액 대비 편성액 비교, 연도별 부처별 예산 변화추이 등 온갖 자료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부처별, 분야별 분석도 할 수 있고, 유사성 분석, 미래예산 시뮬레이터, 예산 인사이트 등도 볼 수 있다. 기계로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들자마자 인공지능을 이용해 이렇게 한눈에 볼 수 있는 현황판을 만든 것이다. 인공지능을 도입한다는 건 이런 의미다. 충분한 데이터가 있으면 대부분의 분석을 실시간으로 해볼 수 있다. 그래서 예산 분석을 잘하게 됐을까?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533개 AI 재정사업 중 97개가 중복의심그룹으로 나타났다. 가령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사업'은 데이터 통합이 목적이지만 3개 부처로 분산돼 있다. 1009억 원이 배정돼 있다. AI 응용제품 신속상용화는 동일 사업이 부처별로 별도 편성된 것처럼 보였다. 2835억 원이 배정됐다. 키워드 클러스트(검색어를 입력하면 관련 키워드들로 분류된 기사들을 몇 개씩 묶어 보여주는 방식)로 봐도 비슷해 보이는 게 많았다. 데이터센터는 16개 사업, 6개 부처, 2461억 원이 배정됐다. 바이오는 33건, 10개 부처, 2017억 원이 배정됐다. 로봇은 최다 부처를 기록했다. 11개 부처, 36건, 1882억원이 배정됐다. 양자도 9건, 4개 부처, 938억 원이 배정됐다. 그런데 이게 정말 중복사업인지는 알기 어렵다. 앞에서 본 것처럼 데이터 정합성이 떨어지고, 표현이 제각기 다르고, 분류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중복의심사업'을 짚어낼 수 있을 뿐이다. AI전략위원회만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게 아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매년 예산안 분석 시 부처별 예산서를 수동으로 검토한다. 41개 부처x533개 AI 사업의 교차 분석은 현행 인력과 도구로는 할 수가 없다. 상임위원회 소속 국회의원과 보좌관이 소관 부처의 AI 사업 현황을 파악하려면 5296페이지 PDF를 직접 탐색해야 한다.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 심의에서도 교차부처 중복사업 지적은 개별 위원의 전문성에 의존한다. 체계적 데이터 분석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한국은 '열린재정(openfiscaldata.go.kr)'과 '지방재정365(www.lofin365.go.kr)' 두 개의 재정 공개 포털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둘 다 페이지당 결과물 한도를 제한(예: 100건씩)하고 있어, 전체 데이터를 한 번에 받기 위해서는 프로그래밍으로 페이지를 반복 호출해야 한다. 데이터 품질은 앞서 본 대로다. 미국은? 당연히 매일 갱신되는 전체 데이터베이스를 '기계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통째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 제공한다.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잠재된 패턴을 찾아내는 일을 한다. 데이터가 이러면 인공지능은 힘을 쓰지 못한다. 대한민국 AI 정부가 출발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을 판이다. 인공지능이 기뻐 날뛰게 만드는 법 한국 정부는 어떻게 해야 재정 데이터에 인공지능을 쓸 수 있게 될까? '열린재정'은 부처별·기능별 총액 수준의 통계를 제공한다. '국방부가 올해 얼마를 썼는지'는 알 수 있지만, '국방부가 어떤 업체와 어떤 계약을 맺고 얼마를 지급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정부의 디지털예산회계시스템(dBrain+)에서 관리하는 예산 집행 데이터를 세부사업-내역사업 단위까지 공개한다. 궁극적으로는 개별 계약, 보조금 교부 결정, 출연금 집행 건별로 수혜 기관명, 금액, 집행일자, 사업목적을 공개해야 한다. 미국 연방정부 지출공개시스템(USAspending)의 개별 사업 단위, 영국 정부의 정부통합회계보고시스템(OSCAR)의 분기별 세부 코드 단위가 벤치마크다. 다들 이미 하고 있는 일이다. 우리만 안 하고 있었다. 현재 dBrain+에서 이미 관리되고 있는 세부사업별 예산현액·집행액·이월액 데이터를 API(기계가 자동으로 불러올 수 있게 해주는 키)로 공개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시스템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데이터다. 다른 노력이 필요 없다. 기본적인 조회는 인증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지출공개시스템 API는 어떤 인증도 요구하지 않는다. 대량 다운로드나 높은 빈도의 호출에 대해서 상한을 걸어두면 남용을 쉽게 막을 수 있다. 개방형계약데이터표준(Open Contracting Data Standard, OCDS)이라는 게 있다. OCDS는 공공 조달을 위한 유일한 국제 개방 표준으로 전 세계 50개 이상의 정부가 시행하고 있다. 표준의 핵심 아이디어는 기획과 입찰에서 낙찰, 계약, 이행까지 조달 과정 전체를 고유 ID로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면 정부가 가성비를 높이고, 부패를 예방하며, 경쟁을 촉진하고, 공공서비스 제공을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라장터 데이터를 OCDS 형태로 변환해 공개하면 글로벌 조달 분석 도구들과 즉시 호환된다는 것도 아주 큰 장점이다. 개방형재정데이터패키지(Open Fiscal Data Package, OFDP)라는 표준도 있다. 세계은행(World Bank)의 재정데이터개방촉진사업(BOOST 이니셔티브) 등이 공동 개발한 것으로, 현재 7개국 정부가 예산 및 지출 데이터를 공개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이 두 표준을 연결하면 예산 배분, 조달 과정, 실제 지출을 하나로 연결하는 도구를 갖출 수 있다. 즉, '이 사업에 얼마가 배정됐고(OFDP) → 어떤 계약이 체결됐으며(OCDS) → 실제로 얼마가 집행됐는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쉽게 추적할 수 있게 된다. 자, 이제 AI가 기뻐서 날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먹고 살 데이터가 너무 많아요!"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자 중앙과 지방의 데이터도 연결해서 함께 품질관리를 해야 한다. 중앙정부 데이터는 열린재정(기획재정부·재정정보원), 지방정부 데이터는 지방재정365(행정안전부)로 이원화돼 있다. 열린재정 자체도 지방재정 데이터는 API 연계 데이터로 제공하면서 "실제 데이터와 차이가 날 수 있으니 지방재정365에서 확인하라"고 안내한다. 데이터가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다는 걸 안다는 얘기다. 두 시스템의 분류 체계, 갱신 주기, 데이터 품질이 다르다. 통합 데이터 카탈로그를 만들어야 한다. 물리적으로 시스템을 합치라는 게 아니다. 중앙과 지방의 사업번호·기능분류 코드를 호환할 수 있는 표를 만들고, 하나의 API 게이트웨이에서 양쪽 데이터를 함께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이제 인공지능이 날뛸 수 있다. 예산현액보다 지출액이 큰 사업, 전년 동기 대비 300% 이상 변동한 항목, 코드 불일치 등을 자동 탐지해서 실시간으로 오류를 잡을 수 있다. AI 이상 탐지의 가장 기초적인 적용이다. 하나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모든 재정 거래에 범정부 고유 ID를 부여한다. 미국은 데이터법으로 이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dBrain+ 사업번호, 나라장터 계약번호, e-나라도움(보조금 시스템) 교부 번호 간의 매핑 테이블, 그러니까 '이 번호가 여기서는 이 번호예요'를 알려주는 표를 만들어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한다. 이것만으로도 처음부터 끝까지 '돈의 흐름 추적'이 가능해진다. 수혜기관과 업체에 대해서도 통일된 식별자를 적용한다. 사업자등록번호를 기반으로 하되, 동일 법인의 다양한 표기(주식회사 OO, OO(주), OO 주식회사)를 묶어 '같은 업체가 여러 부처로부터 얼마를 받는지'를 집계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하면 '이 예산이 어떤 계약으로, 어떤 업체에, 얼마가 갔는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추적할 수 있다. 자, 이제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가? AI가 달리고 싶어서 앞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제 핵심을 정리하자. 기계가 읽을 수 없는 데이터는 데이터가 아니다. 기계가 읽을 수 있는 데이터를 넘어 '기계가 이해할 수 있는 데이터'를 제공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AI를 귀중한 도구로, 협력자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재정데이터를 이 지경으로 둔 채 AI 정부를 만드는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KTH, 엠파스 등 IT 업계에서 오래 일했으며 현재 녹서포럼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IT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21년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눈 떠보니 선진국, 박태웅의 AI 강의 등이 있다.
2026.03.18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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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균형
5극3특, 자치분권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다
청년 유출로 심화되는 수도권 집중을 막기 위해 지역균형발전의 우선순위를 성장과 균형에 두고, 메가시티 기반 혁신 생태계를 조성해 비수도권에 일자리와 산업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지역균형발전을 고민할 때 세 가지 가치가 경합한다. 성장(동력), 지역 간 균형, 그리고 지방이 스스로 결정권을 갖는 자치분권이다. 보통 둘은 잡을 수 있어도, 셋을 동시에 거머쥔 사례는 드문 세 가지 딜레마다. 노무현 정부는 행정중심복합도시, 혁신도시, 지방분권 로드맵을 한꺼번에 추진하며 세 가지를 모두 해내려 했다. 결과는 잘 알려진 대로다. 수도권 집중은 완화되지 않았고, 자치분권은 제도로만 남았으며, 성장의 동력은 더욱 수도권에 쏠렸다. 어느 것도 확실히 잡지 못한 셈이다. 정책 의사결정에서 중요한 건 우선순위를 잘 정하는 것이다. 지역간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핵심 과제는 비수도권의 청년유출에 대한 대응이다. 2024년 한 해 동안, 수도권과 세종·대전을 제외한 12개 광역자치단체에서 20~39세 청년 6만 2,445명이 순유출됐다. 2018년부터 2024년까지 누계로는 지역을 떠난 청년만 54만 9,500명에 달한다. 경남, 경북, 부산, 전북 순으로 유출됐다. 청년 유출은 지역 경제의 소비 여력, 노동시장의 인재풀을 황폐화시킨다. 특히 수도권으로 떠나는 청년 중 과반이 여성이기 때문에, 저출생으로 지역 재생산 자체를 막아버린다. 아이 울음소리가 가장 많이 나는 곳은 역설적으로 합계출산율이 가장 낮은 서울의 강남구인데, 절대 숫자에서 청년 여성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청년이 지역을 떠나는 이유는 지역의 자치분권과 풀뿌리 민주주의의 부재 때문이 아니다. 1995년 민선 지방자치제 이후 30년 동안 청년 유출은 멈추지 않았다. 동남권, 호남권 등 주요 유출 지역을 들여다보면 결국 직업을 찾아 떠난다. "일자리만 있으면 내가 나고 자란 지역에 살고 싶다"는 청년들이 다수인 지역은 많다. 2015~2021년 수도권 인구 증가에 청년 유입이 기여한 비율은 78.5%이며, 동남권·호남권 등 감소 지역에서 청년 유출의 기여율은 75~88%에 달한다. 풀뿌리 민주주의와 사회연대경제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할 수도 있겠지만, 다수 청년이 바라는 높은 급여, 기업의 성장 가능성, 고용 안정성, 적성 등의 문제를 충족하긴 어렵다. 바로 이 지점에서 5극 3특 구상이 나온다. 5극 3특은 세 가지 가치 중 성장과 균형, 두 가지에 우선순위를 둔 것이다. 자치분권의 가치가 폐기된 건 아니다. 작은 공동체부터, 읍면동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민주주의의 가치를 구현하고 가꾸는 일은 중요하다. 지방시대위원회가 균형발전과 함께 자치분권을 여전히 두 축으로 견지하는 이유다. 다만 우선순위가 바뀌었을 따름이다. 31일 울산시 동구 HD현대중공업에서 건조 중인 선박이 보이고 있다. 사진은 기고 내용과 무관. 2025.7.31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초광역연합이나 광역간 행정 통합에 반대하는 논거로 마산·창원·진해의 통합 실패가 언론을 통해 언급되곤 한다. 하지만 메가시티의 본질은, 지역에서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 요구하는 고등교육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유효한 규모의 혁신 생태계를 통해 성장동력을 만드는 일이다. 지역 제조업의 위기는 공장이 줄어서가 아니라, R&D와 고부가가치 엔지니어링 같은 구상 기능이 수도권으로 빠져나가고 단순 생산만 남은 탓이다. 이를 바꾸려면 메가시티 단위의 대규모 산학연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지역투자공사(VC)와 액셀러레이터·인큐베이터 인프라를 통해 스핀오프 창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 역시 메가시티 규모가 되어야 비로소 자생 가능한 시장이 형성된다. 한국에서 광역 단위의 산업 성공 사례는 아직 없다. 수도권 밖에서 지식기반경제의 거점이 만들어진 적이 없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 경제는 K자형 성장이 굳어지고 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생산성 격차는 2005년 2.7%p에서 2019년 11.1%p로 급격히 벌어졌다. 5극 3특 중 적어도 한두 곳에서 구상 기능과 지식기반산업이 자립하는 실제 사례를 지금 만들어내지 못하면, 앞으로 기회는 없다. K자의 아랫날은 한번 꺾이면 되돌아오기 어렵다. 메가시티 추진은, 비수도권에 실질적인 경제 기반을 먼저 쌓는 것이다. 가능성 있는 지역의 청년이 떠나지 않아도 되는 비수도권의 거점을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가장 급한 일이다. 자치분권과 메가시티가 싸울 이유도 없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정치학, 문화인류학을 거쳐 공학 박사(과학기술정책 전공)를 받았다. 제조업, 엔지니어, 산업 생태계에 대해서 현장 연구를 수행 중이다. 저서로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2019),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2024) 등이 있다.
2026.03.11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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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AI 시대
한·싱가포르 AI 동맹, '글로벌 AI G3' 향한 전략적 승부수
현재 글로벌 AI 시장은 미·중 중심의 패권 경쟁이 치열하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한-싱가포르 협력은 우리가 나아갈 '제3의 길'을 제시한다…세계에서 가장 준비된 AI 국가인 싱가포르와 함께 다진 'AI 대항해 시대'의 닻이 우리 기업과 인재들의 경쟁력으로 치환될 때 대한민국은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AI 생태계의 명실상부한 주도국으로 거듭날 것이다.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AI 대항해 시대', 한·싱가포르 함께 돛 올리다 인공지능(AI)은 이제 기술 경쟁의 차원을 넘어 국가 전략과 외교 의제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특히 싱가포르 방문에서 대통령이 천명한 'AI 대항해 시대'의 비전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가장 명확하게 관통한다. AI는 더 이상 특정 산업의 혁신 도구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핵심 자산이자 미래 산업의 새로운 항로를 결정짓는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이번 순방을 통해 양국은 단순히 우호를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정부와 연구기관, 민간 기업을 잇는 촘촘하고 다층적인 협력의 틀을 공고히 했다. 국내 우수 연구기관과 싱가포르 명문 대학 간의 공동 연구는 물론, 자율주행 및 공공안전 AI 분야 혁신 기업들이 체결한 양해각서(MOU)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는 대한민국이 보유한 AI 설루션이 글로벌 테스트베드에서 검증되고 실질적인 생태계 연계로 이어지는 중요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과 로런스 웡 싱가포르 총리가 지난 2일 싱가포르 외교부 청사에서 공동언론발표를 마친 뒤 포옹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왜 싱가포르인가? 세계 1위의 '준비'와 한국의 '역량' 만나다 그렇다면 수많은 국가 중 왜 싱가포르인가? 그 해답은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2024 인공지능 준비도 지표(AIPI)'에서 찾을 수 있다. 싱가포르는 174개국 중 세계 1위를 기록하며 AI가 경제 전반에 확산될 수 있는 최적의 토양을 갖췄음을 증명했다. 2014년 '스마트 국가 이니셔티브'부터 2019년 '국가 AI 전략(NAIS) 1.0'에 이르기까지, 싱가포르는 기술을 기다리는 대신 제도와 정책으로 먼저 길을 닦아온 '준비된 파트너'다. 이러한 싱가포르의 강점은 한국과의 협력에서 독보적인 시너지를 창출한다. 양국의 협력은 '세계적 수준의 AI 역량과 탄탄한 하이테크 제조 기반을 갖춘 한국'과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이자 최첨단 디지털 인프라를 보유한 싱가포르'가 만난 상호보완적 기술 동맹이다. 여기에 소형모듈원전(SMR) 협력 MOU와 디지털 통상 강화가 더해지며, AI를 구동하기 위한 에너지 인프라부터 제도적 틀까지 아우르는 '미래 산업 패키지 협력'이 완성됐다. '한-싱 AI 얼라이언스'와 글로벌 모펀드: 성장의 엔진 달다 특히 이번 순방에서 추진하기로 한 '한-싱 AI 얼라이언스'와 정부 최초의 '글로벌 모펀드' 조성은 협력의 실질적 동력이 될 것이다. 2030년까지 3억 달러 규모로 조성될 모펀드는 양국의 유망 AI 스타트업이 자본의 장벽 없이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전망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일 싱가포르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싱가포르 AI 커넥트 서밋에서 인사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는 단순히 하드웨어를 공급하거나 기술을 교류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공공 안전과 혁신 분야의 공동 대응부터 차세대 AI 원천기술 연구, 나아가 미래 인재 교류까지 협력의 범위를 전방위적으로 넓혔다. 한국의 강점인 반도체와 로보틱스 기술이 싱가포르의 글로벌 네트워크 및 자본력과 결합할 때, 양국은 AI 산업의 전주기 생태계를 함께 구축하고 글로벌 시장을 공동 공략하는 강력한 파트너가 될 것이다. 글로벌 AI G3 향한 '제3의 길' 현재 글로벌 AI 시장은 미·중 중심의 패권 경쟁이 치열하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한-싱가포르 협력은 우리가 나아갈 '제3의 길'을 제시한다. 급성장하는 동남아시아(ASEAN) 시장을 거점으로 우리 AI 설루션이 확산되고, 글로벌 AI 표준과 규범 형성 과정에서 양국이 공동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다극화되는 글로벌 질서 속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확보하는 전략이다. 물론 이번 성과가 내실 있는 결실로 이어지기 위한 과제도 분명하다. 체결된 협력이 단기적 이벤트에 그치지 않도록 실제 R&D 성과로 이어지는 후속 실행력이 필요하며, 양국의 청년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인적 교류 시스템이 안착해야 한다. 데이터 활용의 효율성과 AI 윤리 및 안전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신뢰 기반의 협력 모델 정립도 병행돼야 할 과제다. AI 협력은 단순히 기술적 계약을 맺는 일이 아니라, 미래 산업의 질서를 함께 설계하는 거대한 여정이다. 세계에서 가장 준비된 AI 국가인 싱가포르와 함께 다진 'AI 대항해 시대'의 닻이 우리 기업과 인재들의 경쟁력으로 치환될 때 대한민국은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AI 생태계의 명실상부한 주도국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번 순방이 다진 협력의 토대 위에서 대한민국 AI의 새로운 미래가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서울대학교 전기·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KIST AI·로봇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그동안 인공지능·로봇 분야 연구를 수행하며 국가 과학기술 전략 수립과 대형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이끌어 왔다. 인공지능 기반 영상인식, 선별 및 전역 관제 등 다양한 AI 분야에서 다수의 원천기술을 개발해 산업 및 공공 영역에 확산시켰다. 과학기술 발전과 산업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석탑산업훈장을 수훈했고, 공학한림원 젊은 공학인상과 KIST 미래재단 석학상 등을 수상했다.
2026.03.06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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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무역 인사이트
수출의 구조를 다시 설계할 때다
이제 수출 다변화는 특정 국가 비중을 낮추는 단순한 분산 전략이 아니다. 거대한 변화의 파고 속에서도 수출이 끊기지 않게 하는 '구조적 면역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경제안보 시대의 수출 전략은 '어디에 얼마나 팔 것인가'보다 '어떤 환경에서도 수출을 지속할 체계를 어떻게 갖출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됐다. 관세 인상, 수출통제, 규범 강화, 경쟁국의 산업 고도화가 동시에 진행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수출을 떠받쳐 온 자유무역 질서는 전환점에 서 있다. 오늘날 세계 경제는 단순한 관세 인상을 넘어, 상호의존을 전략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는 '무기화된 상호의존'의 시대로 이동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관세를 상시적 통상 수단으로 활용하며 자국 산업 보호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유럽연합(EU)은 탄소·공급망 규범을 강화하고, 중국은 핵심광물 통제를 확대하고 있다. 이제 수출의 성패는 가격과 품질이 아니라 정책과 기술 질서가 좌우한다. 이 같은 흐름은 이미 현실의 불확실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미국의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한 관세부과에 법원의 위법 판단이 나오면서 관세를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관세의 유지 여부와 후속 조치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대미 수출의 예측 가능성은 낮아졌고, 기업의 투자와 생산 전략 역시 재검토를 요구받고 있다. 여기에 더해 주목해야 할 변수는 중국 산업의 질적 도약이다. 중국은 더 이상 한국의 추격자가 아니다. 인공지능 연산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춘 자체 컴퓨팅 생태계를 구축하고, 휴머노이드 로봇 부품과 플랫폼 분야에서 높은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반도체에서도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히며,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핵심 장비 국산화에 가시적 성과를 내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 추격을 넘어 산업 표준과 설계 주도권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3일 경기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에 수출용 컨테이너가 쌓여있다. 2026.2.23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제 수출 다변화는 특정 국가 비중을 낮추는 단순한 분산 전략이 아니다. 거대한 변화의 파고 속에서도 수출이 끊기지 않게 하는 '구조적 면역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경제안보 시대의 수출 전략은 '어디에 얼마나 팔 것인가'보다 '어떤 환경에서도 수출을 지속할 체계를 어떻게 갖출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됐다. 관세 인상, 수출통제, 규범 강화, 경쟁국의 산업 고도화가 동시에 진행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규범 대응력을 하나의 수출 경쟁력으로 인식해야 한다. 미국의 수출 통제와 현지 생산 요건, EU의 탄소·공급망 규범은 시장 진입의 기본 조건이 되었다. 제품 설계 단계부터 권역별 규정을 반영하고, 제도 변화에 따라 부품 구성과 원산지를 조정할 수 있는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 가장 엄격한 기준을 가장 먼저 충족하는 '신뢰받는 공급자'로 자리 잡는 것이 장기 경쟁력을 좌우한다. 상호의존이 무기화된 시대라면, 의존을 축소하기 보다는 그 방향을 설계해야 한다. 중국이 규모와 가격으로 시장을 넓힐수록 한국은 대체 불가능한 영역을 선점해야 한다. 반도체 공정 안정성, 고정밀 소프트웨어, 핵심 소재처럼 생산 시스템에 깊이 결합되는 분야나 유지보수와 업그레이드가 수반되는 거래는 단순 물량 공급과 다르다. 이러한 영역에서는 제품뿐 아니라 기술과 운영 역량이 함께 축적되기 때문에, 상대 산업이 성장할수록 우리의 역할도 확대된다. 수출 다변화의 또 다른 축은 통상 인프라의 정비다. 보호무역이 확산되는 환경에서 제도적 시장 접근을 확보하지 못하면 기업 전략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전통적 자유무역협정(FTA)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모든 국가가 포괄적 협정에 적극적인 것은 아니다. 이에 따라 경제동반자협정(EPA), 무역·투자촉진프레임워크(TIPF), 디지털 무역협정, 상호인증협정(MRA), 공급망 협력 등 다양한 수단을 기능별로 활용해야 한다. 관세 인하에 더해 인증 간소화, 통관 협력, 데이터 이동, 투자 보호 등 실질적 진입 비용을 낮추는 장치가 병행돼야 한다. 최근 브라질과의 정상 외교를 계기로 핵심광물 협력과 메르코수르 협상 재개에 공감대가 형성된 것도 이러한 전략적 접근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례다. 중국과의 교역 역시 단절이 아니라 재배치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최근 3년간 대중 무역적자 전환은 산업 구조 변화의 신호다. 중국은 여전히 거대한 제조 인프라이자 소비 시장이다. 중요한 것은 의존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부가가치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다. 제조 기반은 활용하되, 설계·데이터·핵심 공정 기술은 국내에 유지하는 정교한 분업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범용 중간재 경쟁에 머무른다면 적자 구조는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 미·중 전략 경쟁이 장기화된 환경에서 한국이 지정학적 중립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도 해법은 아니다. 서로 다른 기술 체계와 규범이 병존하는 상황에서 그 정합성을 설계하고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중국에서 생산된 제품이 서방 시장의 보안·탄소·인증 요건을 충족하도록 설계하고, 서방 기업이 중국 공급망을 활용하면서 핵심 기술 통제를 유지할 수 있게 조율하는 영역에서 한국의 역할이 있다. 이는 단순한 중간자가 아니라 체계를 설계하는 위치다. 경제안보 시대의 수출 경쟁력은 단기 성과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위치에서 나온다. 외부 충격이 반복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반, 기술과 규범이 변화하더라도 대체되기 어려운 역할을 확보하는 것이 앞으로의 수출을 좌우한다. 수출 다변화는 지리적 분산을 넘어 산업 체계와 통상 전략을 함께 재설계하는 과제다. 자유무역 이후의 질서에서 한국은 수출의 '규모'를 지키는 데 머물 것이 아니라, 세계 가치사슬 속 '위치'를 다시 세워야 한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연세대 경제학과와 KDI대학원(MBA)을 거쳐 건국대에서 무역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 한국무역협회 입사 후 30년 이상 수출입 동향분석과 글로벌 통상전략 수립을 주도해온 무역 전문가다. 현재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으로서 수출경쟁력 강화, 산업별 공급망 안보, 신통상질서 대응 등 급변하는 대외 환경 속에서 우리 기업이 나아갈 이정표를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26.03.04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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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코리아의 글로벌 전략
이 대통령의 싱가포르·필리핀 순방이 갖는 전략적 가치
이번 순방은 단순한 친선 외교가 아니다…이번 순방이 신남방정책 2.0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글로벌 톱10 코리아의 자신감과 피크코리아의 두려움이 혼재하는 지금, 안보 컨버전스 시대에 동남아시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백우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재명 대통령이 3월 1일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필리핀을 잇달아 방문한다. 한국은 최근 두 나라를 연달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키며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거점으로 끌어올렸다. 이번 순방은 단순한 친선 외교가 아니다. 2020년대 중반, 군사·경제·과학기술 안보가 서로 수렴하는 '안보 컨버전스' 현상이 글로벌 질서를 재편하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이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각종 첨단기술 제재로 심화되면서 경제와 기술이 안보의 핵심 변수가 됐고, AI 기반 유무인복합전투체계(MUM-T)처럼 최첨단 무기가 이중용도 기술에 기반하면서 세 영역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이 안보 컨버전스의 맥락에서 필리핀과 싱가포르는 각각 고유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일 싱가포르 한 호텔에서 열린 동포 만찬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싱가포르는 과학기술안보와 군사안보의 교차점이다. 양국은 미·중 AI 독점 구도에 맞서 AI 주권(Sovereign AI) 확보라는 공동 목표를 공유한다. 현 정부의 'All in AI' 전략과 싱가포르의 국가 AI 전략 2.0, 'AI for Fun'이 만나는 접점에서, 양국은 디지털 협력 MOU와 디지털 통상협정(KSDPA)을 체결하며 AI 공동연구, 안전성 가이드라인 공동 개발에 나섰다. 글로벌 AI 지수 3위인 싱가포르는 프랑스, UAE, 캐나다와 함께 한국이 반드시 연대해야 할 AI 기술 동맹 후보다. 군사 분야에서도 중동·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기존 공급선이 불안해진 싱가포르가 한국산 전차, 자주포, 드론 도입을 검토하며 방산 다변화의 문이 열리고 있다. 필리핀은 군사안보와 경제안보의 교차점이다. 한국은 필리핀 전체 무기 수입의 33%를 차지하는 최대 공급국이다. FA-50 전투기는 2017년 마라위 전투에서 '게임 체인저'로 호평받은 뒤 2025년 12대 추가 계약이 체결됐고, 호세 리잘급 호위함의 운용 만족도를 바탕으로 HDF-3200 호위함 2척 재계약도 이뤄졌다. FA-50에서 KF-21로, 초계함에서 호위함으로 이어지는 점진적 능력 확대 전략이 작동 중이다. 필리핀은 향후 10년간 48조 원 규모 추가 무기 도입의 첫 번째 공급자로 한국을 지목했다. 남중국해 분쟁 속 군 현대화가 절실한 필리핀과, 방산을 피크코리아 극복의 신성장 동력으로 삼는 한국의 구조적 윈윈이다. 경제안보 차원에서도 바탄 원전 재가동 협력, 니켈·구리 공급망 공동 개발을 통해 한국의 에너지·광물 다변화 전략과 필리핀의 자원 산업화 목표가 정확히 맞물린다. 필리핀은 올해, 싱가포르는 내년 아세안 의장국이다. 신남방정책 이후 충분히 이어가지 못한 대동남아 외교의 동력을 되살릴 적기다. 한국은 지금 미국과 중국 양쪽으로부터 경제·기술·군사안보 압력이 점증하는 위기에 처해있다. 동남아시아가 이 두 강대국을 대체할 수는 없지만, 3대 안보 컨버전스 축에서 한국의 국가역량을 실질적으로 강화할 지역 파트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순방이 신남방정책 2.0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글로벌 톱10 코리아의 자신감과 피크코리아의 두려움이 혼재하는 지금, 안보 컨버전스 시대에 동남아시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백우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UCLA 정치학 박사로 혁신 과학 시대의 정치적 新舊 난제에 천착하는 융복합정치학자다. 국내·국제정치의 상호작용, 글로벌 안보컨버전스, AI 정치와 정책을 연구한다. 주요 저서로는 피크코리아(Peak Korea)가 출간됐으며, 그 국제편에 해당하는 세계에서 한국은 얼마나 쓸모있을까?를 집필 중이다. 또한 Global Expansion of Korea's Defense Industry는 2026년 출간 예정이다.
2026.03.02
백우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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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를 넘어
한류가 문화유산이라고?
한류 현상은 하나의 문화적 유산으로, 전승될 가치가 있는 '무엇'으로 인정되었다. 이에 한국인들의 자긍심과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줄 뿐만 아니라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들을 박물관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절호의 콘텐츠인 한류의 유산화는 이제 우물쭈물할 일이 아니다.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한류와 관련된 최근의 가장 큰 이슈는 뭐니 뭐니 해도 중앙박물관의 급격한 위상변화다. 2025년 중앙박물관 방문객 수는 650만을 넘어서며 루브르 박물관과 바티칸 박물관에 이어 영국박물관과 세계 3위를 다투는 박물관이 되었다. 이 기록은 박물관의 소장품을 고려하면 더욱 특별하다. 세계 최대 박물관들이 식민시대 강대국들이 힘으로 수집한 유물들로 대부분 채워졌다면, 중앙박물관은 기증이나 수집을 통해 소수 외국 유물을 전시하고는 있으나 거의 한국 유물들만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2024년에 비해 1.7배가 증가한 2025년의 폭발적인 기록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 성공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이지만, 이전에도 팬데믹 기간의 감소를 제외하고는 꾸준한 상승세를 보여 2024년엔 방문객 378만 명으로 이미 세계 6위의 거대 박물관 위치에 도달해 있었다. 단지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같은 한 편의 영화의 성공이 이룬 결과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한 중앙박물관 방문자들은 절대다수가 한국인들이고, 외국인은 4%에 미치지 못한다. 즉, 한국의 문화적 매력이 세계적으로 어필한다는 한류 현상이 무엇보다 한국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호기심과 자긍심을 갖도록 했음을 말해준다. 중앙박물관뿐만 아니라 진주박물관, 부여박물관 등 젊은 학예사들의 새로운 역사접근법이 빛나는 여러 시도들도 그동안 현대사의 굴곡에 침착해 있던 우리의 역사 지평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정부의 문화와 외교, 교육 관계자들과 정치인들은 이러한 국민의 시선과 역사 인식 변화를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 해 동안 한국을 방문한 1900만 명 외국인 관광객도 디지털 한류 콘텐츠 속에서 접한 한국 문화의 아날로그 체험뿐 아니라, 굿즈의 매력을 통해서든 콘텐츠에 끌려서든 박물관과 역사로 관심을 확대해 나가도록 박물관을 준비해야 할 단계다. 주말인 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2일 2025년 연간 관람객 수(2025년 12월 31일 기준)가 총 650만 7483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2026.1.4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한류 콘텐츠가 기존 박물관으로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것뿐 아니라 한류 스스로 박물관 안으로 초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한류 현상이 하나의 문화적 유산으로 인정되어, 기록되고 보존되고 전시될 가치가 있는 무엇,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전승될 가치가 있는 '무엇'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이다. 한류가 전 지구적으로 의미 있는 문화현상으로 인정된 데에는 한국어와 한글의 힘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동시대 문화 다양성과 보존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유네스코와 같은 국제기구는 디지털 환경 속 인류의 언어 환경이 대형 언어 중심으로 재편되어 군소언어들이 사라져 가고 문화생태계가 다양성을 잃어가는 것을 경계해 왔다. 사라져가는 언어를 수집 보관하고 지역어 등 소수어를 학교에서 교육하도록 장려해 왔는데, 한국어야말로 이러한 거대 언어 중심의 환경적 변화를 역주행하며 한국어 사용 인구와 배우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중소 언어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어의 역주행은 한류가 추동하고 있기에, 한류의 문화적 하부구조와 작동 방식에 대한 관심도 높다. 2022년 런던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은 Hallyu! The Korean Wave라는 세계 최초 한류 전시를 시작했다. 이 전시는 지금 유럽과 북미의 대도시를 순회하고 있고, 한류에 대한 다른 소소한 전시들도 국내외에서 진행되고 있다. 한류의 전시는 그동안 서구 박물관들이 일본의 망가와 애니메이션, 기모노, 중국의 공예물이나 디자인, 디지털 문화 등 동아시아 다른 동시대 문화들을 수집, 전시해 온 데 비해 더욱 복잡한 접근이 필요하다. 한류는 콘텐츠나 특별한 형식, 미디어 상품이 아닌 가치, 정서, 인간관계, 경험이 핵심적 중요성을 띠는 문화현상이기 때문이다. 즉, 문화 생산자가 부여한 가치뿐 아니라 전 지구적 수용과정에서의 재창조와 이해도 이 현상의 일부인 상호 관계적 현상이다. 또한 케이 뷰티 현상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미적 감수성, 실천과 기준(norms), 그것이 생산하는 매력 및 창출하는 새로운 젠더와 인종에 대한 상상력과 정체성이 중요한 요소다. 이 문화는 무엇보다 디지털 기술을 새롭게 소화해서 세계의 청년들에게 전례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측면에서 세계사의 변방에서 탄생한 21세기 글로벌 컬쳐로서 한류의 문화유산적 가치는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류의 유산화를 대한민국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 한국인들의 자긍심과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줄 뿐만 아니라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들을 박물관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절호의 콘텐츠인 한류의 유산화는 이제 우물쭈물할 일이 아니다. 한류를 가능케 한 한국 대중문화의 발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문서와 물질 자료를 수집, 보관, 전시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텐데, 어느 주체가 어디까지 어떻게 수집할 것인가? 또한 한류 현상으로서의 케이팝은 어떻게 수집, 보관, 전시할 것인가? 보관과 전시의 문제를 뒤로하더라도 어떻게 무엇을 수집할 것인가는 그간의 케이팝에 대한 문화연구 전체를 참조해야 하는 일이다. 케이팝 음원과 뮤직비디오, 방송영상을 수집하는 것으로 족한가? 세계의 청년이 열광하는 케이팝 댄스 실천은 어떻게 수집해야 하나? 글로벌 OTT 등장 전부터 스스로 자막을 달면서 이해하고 수용해 온 한국 드라마 수용 현상은 어떻게 수집해야 하는가? 유명한 한류 드라마들의 디지털 판본을 수집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저작권을 지닌 방송사와 기획사들에게 이러한 공적 활용의 중요성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무엇보다 정부는 한국 역사상 초유의 이 작업에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재원을 동원할 것인가? 케이팝 공연장 문제에서 불거졌듯, 정부의 공적 대응이 더 이상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공연장 부족으로 케이팝 행사를 도쿄, 홍콩, 싱가포르에서 해왔듯, 세계인이 한류 전시를 런던과 파리 샌프란시스코에 보러 가도록 두지 말아야 한다.◆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한류 연구자로 정진하면서 팬덤 온라인 참여관찰로부터 데이터 분석까지 다양한 연구방법을 거쳤으나 스스로는 여전히 세상 속 의미의 생산을 묻는 기호학자라고 이해한다. 세계화와 디지털문화시대의 한류, 드라마의 모든 것, BTS길 위에서를 출판했고 넷플릭스의 영향, 한국문화산업, 한류현상의 이론화를 위해 국제적 연구자 네트워크를 가동하며 다년간 연구 중이다.
2026.02.26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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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이재명 정부의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 쟁점과 과제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은 미래의 목표와 현실의 과제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한다…실질적인 군사적 신뢰 구축을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 없는 긴장 완화 단계'에서 '대화 있는 신뢰 구축 단계'로 얼마나 빨리 전환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전 통일부 장관) 이재명 정부가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을 발표했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끝날 줄을 모르고, 트럼프 정부는 예측하기 어려워 북미 관계의 앞날을 알 수 없고, 남북 관계의 두꺼운 얼음도 녹는 데 시간이 걸린다. 안개가 자욱할수록 나침반이 필요하듯이, 예측이 어려운 정세를 헤쳐 나가려면 정책이 중요하다. '평화·통일·비핵화·번영' 균형적 접근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은 미래의 목표와 현실의 과제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한다. 언제나 장기적인 목표도 중요하지만, 정책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현재 남북 관계의 시대정신은 평화공존이다. 1971년 남북 적십자 회담 이후 남북 관계는 가다 서다 현상을 되풀이했지만, 지금이 역사적으로 대화 중단 기간이 가장 길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정세도 국면이 아니라 구조가 변화하는 역사의 변곡점에서 정책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한 3일 경기도 파주시 도라전망대에서 방문객들이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와 개성공단 일대를 바라보고 있다.2025.9.3.(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첫째, 평화공존과 통일의 관계다. 목표로서의 통일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당면한 평화공존의 제도화를 강조했다. 평화공존의 추진 원칙으로 북한 체제를 존중하고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않으며 적대행위를 추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래의 통일이 아니라 당면한 평화 정착을 중시하겠다는 뜻이다. 공존의 추구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원칙을 합의하고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합의한 이후 주요 남북 합의에서 재확인한 바 있다. 북한이 2024년부터 '적대적 두 국가론'을 주장하면서 평화공존의 과제가 중요해졌지만, 체제 인정과 공존의 제도화는 남북 관계에서 오랜 역사가 있다. 이재명 정부는 대북 심리전 방송을 중단했고, 민간 차원의 대북 전단과 무인기를 단속하면서 적대행위를 추진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실천하고 있다. 둘째, 비핵화와 평화 정착의 관계다. 목표로서의 비핵화를 유지하면서, 당면한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을 강조했다. 북한은 핵 보유를 헌법과 당규약에 명시했고, 비핵화 협상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했다. 북한 핵 문제가 1990년대 이후 한반도의 외교, 경제, 군사 질서를 규정했다는 점에서, 달라진 현실을 고려하는 새로운 협상의 틀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은 평화 체제의 구축과 핵 없는 한반도의 실현 과정이 상호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구조를 만들어 한반도의 전쟁 위협을 제거하겠다고 강조했다. 우선 핵 위협을 완화할 수 있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접근법이 필요하고, 재래식 분야의 군사적 신뢰 구축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셋째, 평화와 경제 번영의 관계다. 평화라는 땅에서 번영이라는 꽃이 핀다. 한반도의 평화 정착은 남북 공동 번영뿐만 아니라, 동북아 경제협력의 필수 요소다. 올해 1월 초 한중 정상회담에서 논의했던 남·북·중 삼각 협력 방안도 남북 관계 개선과 평화 정착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물론 본격적인 경제협력을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가 완화돼야 한다. 제재 완화의 수준은 북미 관계에 달려 있고, 이를 위해서는 한미 간에 긴밀한 협의가 필요하다. 적대에서 '공존'으로의 전환을 위한 과제 북한은 무인기 사태에 대한 이재명 정부의 사과와 재발 방지 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9차 당대회에서 '적대적 두 국가론'을 유지했다. 다만, 9차 당대회에서 대남정책과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4월 미·중 정상회담 계기에 있을 북미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러·우 전쟁의 종전 이후 한반도 질서 변화에도 유연하게 대응하겠다는 판단이다. 남북 관계는 당분간 대화 없는 긴장 완화 조치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이재명 정부는 먼저 긴장 완화 조치를 하고 북한의 호응을 유도해 왔다. 방송과 전단, 무인기에 대한 조치는 북한의 호응을 끌어냈다. 북한은 그동안 남북 관계 악화 시기에 발언의 공격성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 긴장감을 높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정한 수준까지는 대화가 없어도 긴장 완화 조치를 주고받을 가능성이 있다. 9·19 군사합의 중에서 서로 호응할 수 있는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를 선도적으로 조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군사적 신뢰 구축을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 없는 긴장 완화 단계'에서 '대화 있는 신뢰 구축 단계'로 얼마나 빨리 전환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현재 한반도 정세의 특징을 고려하면, 군사적 신뢰 구축 분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경제협력은 북미 관계를 포함해서 주변 정세의 변화에 영향받지만, 군사적 신뢰 구축은 남북 모두 서로 이익이 있고 남북 양자 차원에서 합의할 문제다. 재래식 분야의 군사적 신뢰 구축에서 진도가 나가면 당연히 핵 위협 감소를 포함하는 핵무기의 군사적 신뢰 구축 분야도 논의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남북 관계없이 한반도 평화 정착이 이뤄질 수 없다. 북한이 이러한 한반도 질서의 현실과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일대에서 열린 2025 DMZ OPEN 평화 마라톤에서 참가자들이 통일대교 남단을 향해 달리고 있다.2025.11.2.(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국민과 함께하는 평화공존정책 대북정책은 국민적 합의가 중요하다. 이재명 정부의 평화공존 정책도 국민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진보와 보수 사이의 사회적 대화를 확대하고, 새로운 세대의 참여를 보장하며, 지역별 통일 플러스 센터의 운영으로 국민의 공감대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빛나고 있다. 내란을 극복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 세계 곳곳에서 혐오와 대결의 정치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요한 국가 과제를 두고 얼마든지 의견 차이가 발생한다. 소음이 아니라 화음의 수준이 그 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을 반영한다. 평화의 국민적 공감대는 매우 높다. 공존의 공감도 높아지고 있다. 평화공존의 국민적 합의가 높을수록 남북 관계의 얼음도 서서히 녹을 것이다. ◆ 김연철 인제대 교수 / 전 통일부 장관 성균관대에서 북한의 정치경제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노무현 정부 때 통일부 장관 정책보좌관, 문재인 정부때 통일연구원 원장,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다. 현재 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이며, 한반도평화포럼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협상의 전략(2016), 70년의 대화: 새로 읽는 남북관계사 등이 있다.
2026.02.23
김연철 인제대 교수(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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