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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를 넘어
한류의 미래를 위한 재원
세계의 '한드' 애호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대다수의 작품들은 방송드라마 시스템이 발굴하고 키운 인재들이 이룬 것이다. 그러니 지금 정책이 개입해야 할 부분은 능력있는 인재들이 이탈하지 않고 계속 산업계에서 창작하고 새로운 수혈이 가능한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이 즈음의 정책칼럼은 늘 한류의 현재에 대한 조감도가 되곤 한다. 한류는 현재 드라마와 케이팝, 웹툰, 게임 등 콘텐츠 산업의 수치들이 드러내는 수익차원에서의 성장과 세계적 성공과 더불어 관광, 뷰티, 식품, 패션 등 한류유관산업으로 확장된 놀라운 성공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드라마 내부에 상품을 드러내면서까지 드라마 제작비를 충당해야했던 한국 창의산업의 흑역사 조차, 지금은 놀라운 '한드'의 성공을 통해 한국의 대기업 뿐 아니라 여러 중소기업들의 상품이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고, 한드가 글로벌 성공을 거두면서 외국 브랜드들 조차 한드의 PPL을 활용하게 되었다. 케이팝 분야에서는 아이돌 셀러브리티들을 활용해서 해외 고급 브랜드들이 노화한 이미지를 쇄신하고 글로벌 시장을 새롭게 공략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류는 콘텐츠산업뿐 아니라 유관산업이 연계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제18회 부산콘텐츠마켓(BCM2024)'이 열리고 있다. 2024.5.22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러나 조금더 현실에 가깝게 내려와서 보면, 이러한 화려한 성공의 조감도 밑에는 심각한 한국 콘텐츠 산업의 위기가 노출되고 있다. 한류 위기론은 한류의 성공이 보고된 이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 동안의 위기설이 2016년 하루아침에 중국시장을 제로로 만들었던 사드 위기와 같은 외적 임팩트나 수출증가곡선의 완화와 같은 것이었다면, 현재의 위기는 구조적이고 내적이라는 점, 그래서 장기적인 위기일 것이라서 심각하다.
스토리산업은 넷플릭스로 인한 제작비 증가과 제작편수의 극적인 감소 앞에서 산업 내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일자리감소라는 악순환 속에 있고, 케이팝은 당장의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영향력과 상업화로 인한 혐한문제와 수많은 해외의 로컬버전들과의 경쟁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창의산업은 근본적으로 재능있는 청년인구의 충분한 수혈이 필요한데, 대한민국은 인구감소라는 절대적 악조건에 직면해 있다.
한류라는 세계사에서 전례없는 문화적 돌출은 정부지원 덕으로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정부의 관심과 지원들은 끝없이 제작비 부족으로 허덕이는 국내 창작 시스템을 독려하는 역할을 해왔다. 넷플릭스가 가져온 콘텐츠 산업 경제의 변화와 영화관 관객의 절대감소 등 전세계가 겪는 제작과 유통의 변화를 정책적 개입을 통해 바꿀 수 있을지는 필자의 능력을 넘는 부분이지만, 제작분야에서는 그간의 연구와 관찰을 통해 제안할 의견이 있다.
한국 창의산업이 혁신을 지속해왔던 이유를 연구하다보면, 한국은 끊임없이 과잉프로덕션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90년대 이후 5000만 인구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시장에서 많은 경쟁적인 프로덕션이 지속되었다.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드라마가 생산되었고, 지금도 한해에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아이돌 그룹이 데뷔하고 있으며, 제작되지 못하는 수많은 시나리오가 쓰여지고 보이지 않는 인디밴드와 아티스트들이 창의산업의 경쟁에 기본 전력이 되어왔다.
화려한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한류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들이 한류에 올라탄 것이고, 세계의 한드 애호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대다수의 작품들은 방송드라마 시스템이 발굴하고 키운 인재들이 이룬 것이다. 그러니 지금 정책이 개입해야 할 부분은 이와 같은 과잉 프로덕션 상황을 유지할 수 있도록, 즉 능력있는 인재들이 이탈하지 않고 계속 산업계에서 창작하고 새로운 수혈이 가능한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문화산업 속에서 꿈을 키우려는 능력있는 청년들이 지속적으로 수혈되고 이들의 실패가 나락이 아닌 미래의 성공의 거름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동되도록 수혈이 필요한 동시에 이것이 정부지원과 같은 외적 수혈이 아니라 시스템 내에서 선순환이 가능한 한류의 장기적 비즈니스모델이 필요하다.
앞에서 말한 한류산업생태계에서 콘텐츠 산업을 통해 성공을 거둔 유관산업들이야말로 한류창의산업의 지속적 성장이 자신들의 성장에 꼭 필요한 기업들이고, 이들은 산업적 이득의 일부를 한류 창의산업에 재투자해야하는 필요와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운용 중인 모태펀드같은 단기 결과중심적 투자보다 한류의 생태계에 과잉프로덕션이 가능하도록 장기적이고 기초적으로 투자하는 '한류펀드'를 만들어야하고, 국가는 세제혜택 등을 통해 돕는 선순환구조를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이 정책의 보편성과 정책적 세부에 대해서는 하나의 짧은 글로 다할 수 없으니 다음 연재에서 계속하려 한다.)
◆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한류 연구자로 정진하면서 팬덤 온라인 참여관찰로부터 데이터 분석까지 다양한 연구방법을 거쳤으나 스스로는 여전히 세상 속 의미의 생산을 묻는 기호학자라고 이해한다. 세계화와 디지털문화시대의 한류, 드라마의 모든 것, BTS길 위에서를 출판했고 넷플릭스의 영향, 한국문화산업, 한류현상의 이론화를 위해 국제적 연구자 네트워크를 가동하며 다년간 연구 중이다.
2025.12.26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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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산업의 미래
한국과 UAE의 'AI 분야 전략적 협력'의 의미
한국과 UAE의 AI 분야 전략적 협력은 단순한 기술 교류를 넘어, 양국의 경제·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기대한다. 미래 성장동력 확보, 글로벌 경쟁력 제고, 그리고 국제적 AI 거버넌스 논의 주도 등 다양한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한상기 테크프론티어 대표
대한민국과 아랍에미리트(UAE)가 AI 분야에서 전략적 협력을 체결함에 따라, 양국 간의 관계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고 있다. 이번 협력은 단순한 MOU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실천 방향과 향후 양 국가가 글로벌 AI 거버넌스 체제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전략적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UAE는 국가 차원에서 AI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 중이며, 2031년까지 세계 AI 선도국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최대 5기가와트 규모의 AI 데이터센터(AIDC)를 기반으로 하는 인프라 강국이 되고자 하며 이를 기반으로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AI 허브 국가의 위상을 차지하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오픈AI, 엔비디아, 오라클, 소프트뱅크 등의 해외 기업과 UAE G42의 주도로 아부다비 첨단기술위원회(AIATC), MGX 등이 참여 협력하는 방안으로 시작했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아랍에미리트(UAE) 칼둔 아부다비 행정청장이 18일(현지시간) 아부다비 대통령궁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UAE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전략적 AI 협력 프레임워크 MOU를 체결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5.11.23.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러나 AIDC에는 이 외에도 많은 기술이 필요하고 이를 모두 미국 기업이나 투자사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있는 한국이 기술 협력 국가가 됨으로써 양국이 원하는 바를 보다 명확히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이다.
이번에 체결한 '전략적 인공지능 협력 프레임워크'는 30조 원 규모의 초기 투자를 하는 스타게이트 UAE 프로젝트에 한국이 AI 기술 협력 파트너가 되며 AIDC 건설과 에너지 인프라 구축의 핵심 파트너가 되기로 한 것이다. 하정우 AI미래기획수석은 인터뷰를 통해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는 일단 메모리 수급이 중요하고, 한국의 원전(바라카 원전 전력), 송배전, ESS, 건설, 냉각, 전력기기, AI 설루션 기업이 대거 참여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또한 로봇 기술 등을 접목해 생산성을 올리는 피지컬 AI 분야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제조업 기반이 부족한 UAE로서는 한국 첨단 제조 시설을 기반으로 하는 피지컬 AI 기술 확보를 꾀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난 경주 APEC 기간 중 엔비디아는 한국 기업과 협력하기 위해 정부를 포함해 총 26만 장의 첨단 GPU를 향후 우선 공급하기로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국이 피지컬 AI의 중심 국가로 도약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 영역에서는 한국의 부산항과 UAE의 칼리파항을 시범 프로젝트로 삼아 피지컬 AI를 도입한 AI 항만 해결책을 공동 개발하겠다는 것이 눈에 띈다. 이 프로젝트에는 한국의 IoT, AI 설루션, 에이전트, 로봇 관련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기업이 참여하며, 이를 공동 합작 투자(JV) 형태로 아프리카 등 제3국으로 수출하는 것을 목표로 함으로써 단순히 두 나라의 협력에 머물지 않고 결과를 바탕으로 세계 시장 진출을 함께하겠다는 사업 목표를 갖고 있다.
이 영역을 리딩하는 싱가포르나 네덜란드 로테르담 항구의 자동화 기술 수준을 넘어서서 피지컬 AI를 기반으로 하는 차세대 항만 설루션을 이끌겠다는 야심이다. 특히 UAE가 여러 나라의 항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현실적인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반도체 분야 역시 UAE 입장에서는 엔비디아에 대한 종속성을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서 한국의 팹리스 반도체 회사들이 현재 개발하는 NPU에 대한 실증을 통해 대규모 수요처 확보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100메가와트급의 AIDC에서 추론을 위한 NPU 검증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는 그동안 중동 지역을 방문하면서 시장 개척을 하고자 했던 국내 AI 반도체 회사들에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
이번에 주목할 부분은 특사단이 G42 CEO와 만나 협력 방안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했다는 점이다. G42는 아부다비 왕실의 핵심인물이자 UAE의 국가 안보 고문으로 있는 셰이크 타흐눈 빈 자예드 알 나흐얀이 대주주로 있는 기업이다. 셰이크 타흐눈은 UAE 대통령 무함마드 빈 자예드(MBZ)의 동생이며 UAE의 광범위한 투자 제국(1조 5000억 달러 규모)을 소유한 아부다비의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이다. G42는 사실상 UAE 왕실의 강력한 지원과 통제 아래 있는 국영 AI 기업으로, UAE의 국가 AI 전략을 실현하는 핵심 주체이며 그동안 국내 기업이 만나기 어려웠던 기업이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다.
CEO 펑 샤오(Peng Xiao)는 마이크로스트래티지 고위 임원 출신이고 마이크로소프트, 오픈AI, 오라클, 메타 등의 빅 테크와 협력을 추진하는 실무 책임자로 글로벌 기술 및 비즈니스 리더이다. 그는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AIATC 위원, MBZUAI(AI 대학교)의 이사, MGX의 이사이다.
11워 20일,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하정우 AI미래기획 수석이 펑 샤오 CEO와 만나 면담을 나눈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배경훈 부총리는 이 면담을 통해 양국이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구체적인 상호 협력 프로젝트를 발굴하기로 하는 등 경제·기술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그래서 UAE의 AI 전략을 총괄하는 G42와의 전략적 협력은 단순한 MOU가 아니라 국가 대 국가(G2G) 차원의 프레임워크 합의라고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하정우 대통령실 AI미래기획수석,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UAE 국빈방문을 계기로 펑 샤오 G42 CEO와 면담을 하고 있다.2025.11.20. (출처=과학기술정보통신부 누리집)
이번에 작성한 '전략적 AI 협력 프레임워크'는 대한민국 국가AI전략위원회와 아부다비 AI 및 첨단 기술위원회(AIATC) 간에 체결한 것으로 AI 기술 및 애플리케이션의 개발, 채택, 상업화, AI 인프라 구축, 관련 공급망 역량 확대를 포함하여 양자 간의 협력을 포괄적으로 심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상호 교환한 MOU 내용을 보면 AI 관련 투자, 인프라 구축, AI 공급망 확대, AI 및 첨단 기술 채택 가속화, AI 연구 개발 등의 전 영역에서 협력을 추진할 것이고 이를 위한 워킹 그룹을 구성해 담당자를 지정하며, 공공 및 민간 부문, 학술 기관 등의 관련 주체들의 참여를 수용할 것이라고 한다.
이번 협력 프레임워크를 통해 우리는 중동 및 글로벌 시장 진출 교두보를 확보해 한국 AI 기업과 기술이 중동 및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AI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다양한 응용 분야에서 실증 기회를 얻을 것이며, 기술 상용화 및 글로벌 경쟁력 제고에 기여할 것이다. 일자리와 인재 측면에서는 국제 협력 프로그램을 통해 차세대 AI 인재 양성 및 일자리 창출에 긍정적 영향을 예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UAE의 투자 능력과 지역에서의 리더십을 기반으로 글로벌 AI 거버넌스 논의에서 다양한 글로벌 이슈에 대한 우리의 국제적 입지가 강화될 수 있고 정책 협력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난번 에이펙 총회 결과로 아시아태평양 AI 센터를 한국에 유치하기로 한 것과 연계해 한국이 글로벌 거버넌스와 정책 설정에 갖는 위치를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한국과 UAE의 AI 분야 전략적 협력은 단순한 기술 교류를 넘어, 양국의 경제·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기대한다. 미래 성장동력 확보, 글로벌 경쟁력 제고, 그리고 국제적 AI 거버넌스 논의 주도 등 다양한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번 정상회담은 단순한 우호 과시를 넘어 양국이 실질적인 경제동맹으로 나가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한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의 말은 적어도 AI 분야에서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 한상기 테크프론티어 대표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1회 졸업생으로 1980년대 카이스트에서 인공지능 주제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삼성종합기술원, 삼성전자 등에서 활동했으며 1999년 벤처포트 설립, 2003년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 전략대표와 일본 법인장을 역임했다. 카이스트와 세종대 교수를 거쳐 2011년부터 테크프론티어 대표를 맡고 있다. 데이터 경제 포럼 의원, AI챌린지 기획, AI데이터 세트 구축 총괄 기획위원 등을 역임했다. 대표 저서로는 AGI의 시대, AI 전쟁 2.0 등이 있다.
2025.12.24
한상기 테크프론티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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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싶다, 골목의 맛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우리를 울렸다
크리스마스가 되기 훨씬 전부터 제과점은 바빴다. 케이크를 미리 만들어서 확보해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산타할아버지와 트리 장식이 올라간 충격적 비주얼의 케이크가 동네 제과점에 등장하던 날, 아이들은 두 패로 나뉘어서 싸우기 시작했는데오래 전 70년대 풍경으로 돌아가보자.
박찬일 셰프
지금도 그렇지만 오래 전부터 대한민국 도시의 크리스마스는 축제 분위기였다. 유럽과 미국의 문화가 아시아로 이식되면서 자연스레 따라온 방식이었다. 거리에 캐롤송이 가득하고 트리를 세워두는.
한국이 폐허를 딛고 경제적 안정을 찾아가는 70년대부터 크리스마스는 사람들을 들썩이게 하는 축일이었다. 아마도 기부금이 제일 많이 걷히는 구간도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번화가에 나가 인파에 치이면서 움직일 때 자선냄비 종소리를 듣는 것도 70년대 도시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굳이 떠올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크리스마스는 벅찬 감정이 넘쳐나는 날이었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는 제몫을 다하는 것이었을 테고.
크리스마스를 앞둔 21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 별마당도서관에 설치된 대형 트리 앞에서 시민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2025.12.21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날이 즐거운 것은 아이들이었다. 많은 집들이 아이들 좋아하는 음식을 장만하거나 외식을 하기도 했으니까. 우리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생활비가 늘 빠듯해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먹은 건 어른이 되어서였다. 그 전에는 군고구마와 귤에 가수 혜은이가 선전하는 오렌지과즙음료('써니텐'이라고 아실까 몰라)이나 차범근이 모델인 오렌지주스(정확한 이름 대신 그의 백넘버를 딴 '오렌지 일레븐'이 생각난다)를 마셨다.
군고구마를 굳이 먹은 건 아마도 그 무렵 거리마다 군고구마 굽는 리어카가 많았고, 벌어서 학비 보태려는 고학생 이미지가 있어서 어른들이 한두 봉지씩 팔아주는 문화가 있었던 까닭이었다. 아아, 꼭 그런 착한 고학생만 파는 것도 아니었다. 공부는 전혀 안 하는 날라리 형들이 돈 벌어서 놀려고 한다는 의도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군고구마를 사는 어머니에게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나는 착한 사람이었다라기보다는 그 형이 어머니 몰래 눈을 부라리며 나의 폭로를 사전 봉쇄했기 때문이었다. 잘못 보이면 딱지 살 비상금까지도 '삥을 뜯기'거나 군밤을 맞아야 했다. 나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서양에서는 크리스마스야말로 부활절과 함께 그들 문명권 최대의 축제였다. 나는 젊을 때 잠시 이탈리아에서 요리를 하면서 지냈는데, 그들은 개인 기념일 말고는 보통 일 년에 두 번 케이크를 샀다. 물론 앞서의 두 명절날이었다. 시내 제과점과 골목의 가게마다 산처럼 케이크를 쌓아놓고 있어서, 이방인인 나도 알 수 있었다. 우리 같은 케이크는 아니고, 주로 말린 과일을 넣은 단순한 스폰지케이크였다. 한국의 케이크가 훨씬 더 화려하고 맛있는 편이다.
제과사인 내 친구는 서울의 오래된 제과점에서 사십 년 가까이 케이크를 구웠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국 케이크 문화사는 케이크 만드는 제과사, 요즘 말로 '파티셰 잔혹사(?)'였다고 한다.
"부활절에는 케이크가 따로 더 팔리는 건 없어. 일 년 기준으로 어린이날, 어버이날, 크리스마스 딱 세 번이야. 이런 날이 닥치면 달력을 안 봐도 알 수 있어. 그만두는 직원이 생기거든(웃음). 너무 힘드니까 미리 사라지는 거야."
장사가 잘되는 제과점은 심지어 몇 주 전부터 케이크를 구웠다고 한다. 미리미리 만들어서 재고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케이크 굽고 장식하다가 조는 사람도 많았다고.
아, 그 눈물 어린 날들. 제과사는 만들다가 힘들어서 울고 나는 케이크가 먹고 싶어 울고. 그 무렵의 크리스마스 기억이란 동네 '뉴독일제과'와 '독일제과' 진열창에 놓인 케이크 구경이 대단했다. 어머니가 사주지 않으니까 눈으로 보는 수밖에. 그때 진열창은 길가에 쭉 유리를 대고, 그 안에 알록달록한 케이크가 놓여 있는 것이었다. 유리창은 셀로판지로 장식한 가게 상호가 붙여져 있었고. 더러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면 '독일제고'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그 안의 케이크는 아주 멋졌다. 요즘 케이크는 '미니멀'한 게 대세이지만 당시는 누가 더 화려하고 요란하게 장식하느냐 제과사들끼리 경쟁이라도 붙었던 것이 틀림없다. 뉴독일제과에서 크림을 두 겹 리본장식으로 짜올려 붙이면, 라이벌 독일제과에서는 세 겹으로 하는 식이었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24일 서울 시내 한 매장에 여러 케이크들이 진열돼 있다. 2024.12.24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어느 해인가, 동네에 충격적인 소문이 퍼졌다. 물론 아이들 사이에서. 두 제과점 사장님끼리 멱살잡이를 했다는 것이었다. 대략 누가 누구 케이크 데코(그때는 데코레이션이나 디자인이란 말은 케이크에 쓰지 않았을 것 같다)를 베꼈다는 항의와 싸움이었다고 했다. 이 싸움은 사실 언젠가 한번 터질 만한 것이기도 했다. 뉴독일제과는 독일제과에서 근무하던 제과장이 독립해서 차린 가게였다. 뉴독일제과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우리보다 훨씬 선진국인 일본에 연수를 가서 선진 기술을 배워왔다고 했다. 외국여행이 금지된 시기였지만, 산업연수는 당국에서 비자를 내주었을 것이다.
진짜 일본 연수는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뉴독일제과 진열창 안의 케이크에는 놀랍게도 정교한 모양의 산타할아버지와 트리 장식이 '턱' 얹어져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동네 애들이 죄다 진열창에 코를 박는 일이 생기고도 남았다. 우리들은 두 패로 나뉘어 격렬하게 싸웠다. 저 장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안에 심지어 잼이 들어 있다는 패가 있는가 하면 다른 패는 저건 가짜다, 먹을 수 없는 거라는 논지를 폈다. 그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뉴독일제과에 근무하는 형을 둔 아이의 심판이 있었다.
"우리 형이 그러는데 저건 먹는 거래."
그렇게 어느 도시 변두리 아이들에게 케이크는 깊게 각인되었다. 알려두는데, 두 제과점의 이름은 가명이다. 실제 있었던 사건을 기반으로 살을 붙여 쓴 얘기임을 밝힌다. 빈곤을 벗어나 이제는 나도 케이크 하나쯤은 사먹을 수 있다. 예수님의 고난과 사랑을 생각하며, 까지는 아니더라도 경건하고 기쁘게 케이크를 사서 가족과 나누련다. 여러분도 메리 크리스마스!
◆ 박찬일 셰프
셰프로 오래 일하며 음식 재료와 사람의 이야기에 매달리고 있다. 전국의 노포식당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일을 오래 맡아 왔다.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등의 저작물을 펴냈다.
2025.12.23
박찬일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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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2026년을 '한반도 평화공존의 해'로 만들기 위한 지혜
세계 질서의 급변과 무역전쟁의 혼란 속에서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가 힘차게 출발했다가장 중요한 목표는 '평화공존'이다. 2026년에 반드시 평화의 문을 열기를 기원한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전 통일부 장관)
2025년 이재명 정부는 최선을 다했다. 아쉬움이 남지만, 관세 협상을 마무리해서 고비를 넘겼다. 이재명 대통령은 다자 외교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고,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도 준비기간을 고려하면 의전이나 의제 모두에서 성공했다.
세계 질서의 급변과 무역전쟁의 혼란 속에서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가 힘차게 출발했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급변하는 질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중요하다. 2026년을 '한반도 평화공존의 해'로 만들기 위한 지혜는 무엇일까?
'평화 환경' 조성하기 위한 유연한 외교
북미 관계를 풀어야 남북 관계를 풀 수 있다. 내년 4월, 베이징에서 미·중 정상회담이 열린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의 결렬 이후 북미 관계의 불신이 깊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싶어 한다. 아주 오랫동안 중단된 협상의 문을 열려면, 달라진 정세를 반영하는 새로운 협상을 설계해야 한다.
북한은 현재 비핵화 협상을 거부하고 있다. 이미 핵 보유를 헌법에 반영했고, 내년 초에 열릴 9차 당대회에서 재확인할 가능성이 높다. 협상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한반도 비핵화를 앞세우면 협상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북한을 협상에 참여시킬 유연한 지혜가 필요하다. 북한은 비핵화 협상이 아니라면 미국과의 협상에 응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9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외교부(재외동포청)·통일부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래서 '한반도 평화 체제' 논의를 먼저 시작할 필요가 있다. 남북한과 미중이 참여한 4자 회담은 지난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제네바에서 6차례의 본회담을 열었다. 합의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한반도 평화 협상의 당사자와 협상의 핵심 내용을 결정했다. 이후 2005년 9.19 공동선언에서 4자 회담을 재확인했고, 북한과 미국은 2018년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공동선언을 통해 평화 체제 논의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4월 미중 정상회담 계기에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면, 4자회담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열린다. 4자 회담이 열리면 재래식 분야의 군사적 신뢰 구축과 더불어 핵무기 분야의 군사적 신뢰 구축을 논의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동북아 지역의 다자간 안보협력을 위한 6자 회담으로 확대할 수도 있다.
물론 동북아 지역의 안보협력을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특히 중일 갈등은 구조적이고 장기적이다. 중국은 대만 사태에 대한 일본 총리의 발언을 문제 삼았지만, 일본의 역사 인식의 보수화와 군사적인 재무장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의 외교적 대응이 어려워졌다. 당분간 한중일 삼국의 다자적 대화도 불가능해졌다. 미·중 전략경쟁이 동북아시아에서 중일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지만, 동시에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공동 번영 차원에서 상황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평화공존'의 남북 관계 위하여
남북 관계는 더 어렵다. 북한은 적대적 두 국가론을 법제화했다. 대남 부서를 없애고 통일을 지우고 군사분계선을 국경화하고 있다. 미국과의 협상 가능성을 열어 두었지만, 남북대화에는 일말의 가능성도 차단했다.
그래서 단기적으로 낙관하기 어렵다. 인내심을 갖고 장기적으로 접근하면서,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평화공존'이다. 북한도 접경에서의 군사적 긴장 고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경화 작업을 하면서, 군사분계선을 침범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대화가 없으면 불신도 깊어지고, 오해와 오판이 우발적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 소통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방법은 없다.
평화를 원하면 언제나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해서 북한의 소음 공격을 막고, 대북 전단을 중단해서 북한의 오물 풍선을 멈췄다. 선제적 조치로 북한의 호응을 유도하는 전략을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 접경에서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9·19 군사합의' 중에서 우리가 먼저 선제 조치를 찾아 실행해야 한다. 평화 정착을 위해 서로 주고받다 보면 언젠가 대화의 기회가 올 것이다.
한미 관계에서, 동시에 한중 관계에서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을 확대해야 한다. 현재는 상황 악화를 막고 협상을 시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2019년 2월 이후 중단된 협상을 어떻게 다시 시작할 것인지도 매우 중요하다.
공동 번영의 지혜도 필요하다. 남북 관계가 막혀 있어서 양자 차원의 협력은 당분간 어렵다. 한중 정상회담 계기에 남·북·중 삼각 협력 방안들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교통 협력이나 두만강 개발 계획 등 그동안 여러 차례 합의했지만, 이행하지 못한 핵심 사업들을 구체적으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남·북·러 삼각 협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야 가능하다. 새해에는 종전 협상을 마무리해서 전쟁이 끝나기를 바란다. 물론 전쟁이 끝나도 러시아와 유럽의 외교관계가 전쟁 이전으로 회복하기는 어렵다. 러시아는 중국을 포함하는 극동에서 경제발전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모색할 것이다. 북러 관계가 진전했고, 러시아는 한국과의 경제협력을 원한다. 전쟁이 끝나면 남·북·러 삼각 협력도 실질적으로 진전할 수 있다.
남북 관계의 '회복' 중요
한반도의 평화공존을 위한 다자적 접근이나 국제적인 접근은 조건이 있다. 남북 관계가 뒷받침돼야 한국의 역할이 생긴다. 남북 관계를 재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호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일관된 메시지 관리로 적대성의 완화가 중요하다. 또한 제재 완화 등 실질적인 협력이 가능해야 대화의 기회가 생긴다.
갈 길이 멀지만, 인내심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 평화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남이 열어주지도 않으며, 기다린다고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적극적 의지로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2026년에 반드시 평화의 문을 열기를 기원한다.
◆ 김연철 인제대 교수 /전 통일부 장관
성균관대에서 북한의 정치경제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노무현 정부 때 통일부 장관 정책보좌관, 문재인 정부때 통일연구원 원장,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다. 현재 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이며, 한반도평화포럼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협상의 전략(2016), 70년의 대화: 새로 읽는 남북관계사 등이 있다.
2025.12.22
김연철 인제대 교수(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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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경제
경기(景氣)는 기세(氣勢)다
2025년 하반기의 좋은 흐름은 저절로 이어지지 않는다. 경기의 온도를 유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예정된 재정이 예정된 시각에 도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2026년 신속집행이 흔들리면 회복은 '기대만 남긴 채' 지연되고, 흔들림 없이 진행되면 회복은 '민간의 확신'으로 번역된다. 내년의 열쇠는 결국, 예산의 시간표를 지키는 집행력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 응용데이터사이언스 교수
2025년 하반기 들어 경기는 '급락을 피했다'는 단계에서 '조심스러운 회복'으로 이동하고 있다. 올해 1분기 국내총생산이 역성장을 기록했지만,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3분기에는 1.3% 성장으로 반등했다. 2024년 1분기 1.2% 성장은 총선을 앞둔 확장 재정의 효과가 반영된 측면이 크지만, 곧바로 2분기 0.2% 역성장으로 꺾였던 전례가 있다. 반면 이번 3분기 반등은 추경이 있었더라도, 1년 전에 편성된 긴축적 예산 틀 안에서 제한적으로 운용해야 했다는 제약 속에서 만들어낸 성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크다.
국내총생산 분기별 성장률.(출처=한국은행 보도자료(2025년))
기업과 가계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나쁜 뉴스 자체보다, 내일의 규칙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이다. 그래서 내년을 바라볼 때 중요한 질문은 하나다. 올해 하반기에 살아난 기대를 2026년 초에 꺼뜨리지 않으려면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가. 답은 예산의 '규모'가 아니라 '시간표'다.
정부가 2026년 예산배정계획에서 세출예산의 75%를 상반기에 배정하겠다고 못 박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26년 예산총계(일반+특별) 624조 8000억 원 가운데 상반기 배정액 468조 3000억 원을 먼저 내려 보내는 구조는, 연초부터 정책이 작동하도록 '출발선을 앞당기겠다'는 선언이다. 더 주목할 점은 2023년 이후 상반기 배정률 75%가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경기의 변동성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조기 배정'이 일회성 처방이 아니라 운영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 준다.
최근 예산배정 추이.(출처=기획재정부 보도자료(2025년). 괄호안은 배정률)
문제는 "배정했다"와 "현장에서 집행됐다" 사이의 간격이다. 예산배정은 부처가 계약 같은 지출원인행위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권리의 부여이고, 자금배정이 이뤄져야 실제 지출이 가능하다.여기서 한 번만 지연이 생겨도, 지원금은 '필요할 때'가 아니라 '필요가 지나간 뒤'에 도착한다. 회복 국면에서 이런 시간의 미스매치는 체감경기를 빠르게 식힌다.
또 하나의 간과하기 쉬운 지점은 '자금의 흐름'이다. 집행이 앞당겨질수록 국고의 현금 수요도 초반에 집중된다. 기재부 자료는 자금배정 단계에서 조세·세외수입으로 우선 충당하되 부족분은 국채 발행과 일시차입(재정증권·한국은행 차입)으로 조달한다고 설명한다. 결국 신속집행은 경기부양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국고 운용의 리듬을 설계하는 문제다. 준비가 빈틈없을수록 조달과 집행이 충돌하지 않고, 예산의 효율도 높아진다.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2025.10.28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렇다면 2026년 신속집행이 '차질 없이' 진행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 상반기 배정률 75%라는 숫자를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상반기 안에 계약·설계·발주 같은 사전절차가 끊기지 않도록 병목을 제거하는 것이다. 둘째, 예산의 성격에 맞게 속도를 다르게 가져가는 것이다. 경기 파급효과가 큰 도로·철도 등은 조기 사업계획 확정과 설계·발주를 먼저 당겨야 하고, 국고보조사업은 예산 배정과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의 지체 가능성을 줄이는 쪽으로 관리가 설계돼야 한다.
셋째, 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 위에서 속도를 설계하는 것이다. 한국재정정보원에 따르면 관리대상사업의 상반기 집행이 대체로 목표를 달성해 왔다. 2024년에는 상반기까지 167조 6000억 원을 집행해 연간계획 252조 9000억 원 대비 66.3%로 목표(65%)를 웃돌았다. 또한 상반기 집행률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2022년 69.5%로 당시 신속한 정책지원 독려가 이뤄졌음을 함께 언급한다.
분기별/연도별 재정사업 집행률.(출처=나라재정(2025년 1월호))
2025년에는 내수 회복이 제약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상반기 신속집행 목표를 67%로 설정해 민생경제 회복과 경기 활성화에 집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2026년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회복의 초입에서는 정책의 방향성보다 '도착 시점'이 더 크게 작동한다. 돈이 3분기에 풀리면 3분기의 경기만 돕지만, 1분기에 풀리면 기업의 투자 계획과 가계의 지출 심리를 함께 움직여 연간 경로를 바꿀 수도 있다.
다만 신속집행이 '빨리 쓰기'로 오해될 때 부작용도 생긴다. 연초에 급하게 집행하다가 사업 설계가 부실해지거나, 지출은 늘었는데 현장의 체감이 약한 경우가 반복되면 정책 신뢰가 손상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속도와 함께 '품질'이다. 사업 준비도에 따라 속도를 세분화하고, 지연 위험이 큰 사업은 사전에 대체 사업군을 준비해 공백을 메우는 방식이 필요하다. '초반엔 빨랐지만 중반에 끊겼다'는 평가가 나오지 않도록 분기별 점검과 조정의 손길이 꾸준히 따라붙어야 한다.
따라서 내년 신속집행의 관건은 "얼마나 빨리 쓰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일관되게 밀어붙이느냐"다. 중앙은 사업의 준비도를 기준으로 선제적으로 점검하고, 지방은 생활과 맞닿은 사업이 지연되지 않도록 집행역량을 끌어올려야 한다. 또한 집행 데이터가 디지털예산회계시스템 등에서 즉시 확인되는 만큼, 분기 중간에라도 지연 징후를 조기에 포착해 대체 수단을 가동하는 '운영의 민첩성'이 필요하다.
2025년 하반기의 좋은 흐름은 저절로 이어지지 않는다. 경기의 온도를 유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예정된 재정이 예정된 시각에 도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2026년 신속집행이 흔들리면 회복은 '기대만 남긴 채' 지연되고, 흔들림 없이 진행되면 회복은 '민간의 확신'으로 번역된다. 내년의 열쇠는 결국, 예산의 시간표를 지키는 집행력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 응용데이터사이언스 교수
서울대 경제학 학·석사, 美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로 2008년부터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구 분야는 공공경제·재정학(출산·지방재정·기초소득), 노동경제학(최저임금·고령자 노동), 복지정책평가(보육·빈곤), 조세정책(종부세·조특법), 빅데이터·데이터사이언스이다. 빅데이터연구소장을 맡아 정책 평가와 실증분석을 수행해왔다.
2025.12.15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 응용데이터사이언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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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싶다, 골목의 맛
빨간짬뽕, 하얀짬뽕
이연복 셰프도, 여경래 셰프도 화교의 후예다. 그들은 주로 중국집을 하면서 이 땅에서 살아왔다. 그 시절 짬뽕은 하얬다고 한다. 1970년대 들어 빨간 짬뽕의 출현은 중국음식이 곧 한국 음식계에 편입되는 신호였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역사는 돌고 돌아 복고풍으로 백짬뽕이 종종 보인다. 인천에 가서 그런 짬뽕을 한 그릇 할 수 있을까. 옛날 아버지들처럼.
박찬일 셰프
자칭 내 별명은 '국수주의자'였다. 국수는 물론 '國守'가 아니다. 독자들이 그렇듯 나도 잔치국수, 비빔국수, 쫄면, 라면, 우동, 짜장면, 냉면까지 온갖 면을 먹었다. 밥은 반찬으로 변주하는데 국수는 '가루를 내어 반죽한 후 뽑는다'는 것만 같을 뿐 제면 방식과 가루의 종류, 소스와 국물에따라 너무도 복잡한 스펙트럼이 있다. 이번엔 중국집 면을 다뤄본다.
중국집 주방에서 주방장이 손님들이 주문한 짬뽕을 요리하고 있다.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당신은 혹시 중국집에 갈 때마다 갈등해본 적이 있는지.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물론 우동과 기스면에게는 미안하지만 대세는 그랬다. 아마도 어려서는 짜장면이 압도적인 선택을 받았을 것이고 나이 들면 짬뽕이 치고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그랬다. 더러 우동(그것도 곱빼기로)을 먹는 때도 있었다. 이십 대의 일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좀 삐딱하게 어른 흉내를 내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무렵에는 아버지를 흉내내어 '기스면'도 자주 먹었다.
기스면을 모르는 분에게 말씀 드리자면, 일종의 미각적 쾌락을 완성하는, 중국집계의 평양냉면이라고 할 수 있다. 짜장면의 기름기 어린 고소함도, 짬뽕의 폭발하는 쾌락도 없는 소박하고 순수하며 다소곳한 국수가 기스면이다. 닭의 살을 섬세하게 썰고 국수도 세련되고 우아하게 가늘고 길다. 국물은 닭 육수로 기름기 없이 단정하게 만든다.
기스면은 한자로 '鷄絲'면이다. 닭을 실처럼 가늘게 썬다는 뜻이다. 산둥방언에다가 한국에서 발음이 적당히 달라진 경우인 듯하다. 중국 원어로는 당연히 '지스'인데 우리나라에 온 화교가 주로 산둥사람들인지라 그들의 방언대로 '기'라고 읽는다고 들었다. 여기서 잠깐. 우리 화교는 1882년 임오군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청나라와 맺은 불평등조약에서 건너오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중국이 자연재해와 정치격변으로 난리가 나고, 한반도에서도 여러 필요에 맞춰 화교를 많이 받아들였다. 그 수가 점차 늘면서 중국집을 열게 되었고, 현재에 이른다. 북한에도 화교가 들어왔고, 그곳에서도 짜장면의 인기는 아주 높다고 한다.
아직도 나는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과거와 달리 짬뽕으로 기울곤 한다. 미안하다 짜장면아. 옛날, 아버지는 짬뽕을 좋아하셨다. 약주하신 다음 날, 주로 일요일에 짬뽕을 시키셨다. 물론 내 몫의 짜장면도. 당시는 토요일이 '반공일'(오전에만 일하는 날)이어서 근무를 했다. 아버지도 일을 나가서 한잔 하시고 들어오시곤 했다. 집에 전화가 없었는데 어떻게 주문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커다란 검은 자전거를 타고 오시던 중국집 아저씨가 생각난다. 짐칸에 나무로 된 배달통이 실려 있었다. 거기엔 면을 넣고, 자전거 핸들에 주렁주렁 짬뽕국물이 든 양은주전자를 걸었다. 면 그릇을 턱 놓고, 주전자를 기울여 국물을 부었다. 비닐 랩이 나오기 전이라 국물을 그릇에 부어서 가져올 수 없었다. 맵고 진한 향이 온 집에 퍼져나가던 시절이었다.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을 찾은 나들이객들이 차이나타운 문화공연인 사자춤을 관람하고 있다. 2025.4.27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었다. 80년대의 일이다. 우연히 인천에 갔다. 당시 인천은 꽤 먼 곳이었고, 어린 우리들이 가벼운 돈으로 '여행' 분위기를 낼 수 있는 도시였다. 바다가 있었으니까. "아무 일 없이 바다로 가자!"하고 인천행 전철을 탔다. 월미도, 자유공원, 연안부두를 돌았다. 그리고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켰다. 알다시피 인천은 화교가 가장 먼저 발을 디딘 역사적인 공간이다.
나는 어른 흉내를 낸다고 짬뽕을 주문했는데 '하얀 짬뽕'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주문할 때 아저씨가 뭐라고 하는 걸 대충 듣고 그러마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하얀 옛날 짬뽕을 먹겠느냐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알고보니 그 지역은 화교세가 아주 센, 지금의 차이나타운이 가까운 동네였다. 지금 인천역 뒤 부두가 바로 보이는 언덕배기에 있던. 기억에는 그저 볶은 채소에서 고소한 불 기름 향이 나던 것, 그릇이 서울과 달리 아주 작아서 국물이 자작했던 것, 홀에서 잊고 있던 유년기의 '진짜 중국인 가게의 냄새'가 나던 것이 남아 있다. 따뜻한 난로의 탄 냄새도.
요즘은 그런 식의 짬뽕을 '백짬뽕'이라고 부른다. 빨간 짬뽕에 대비되는 작명이다. 아주 오래 전에, 그러니까 1960년대는 짬뽕의 색이 아직 하얗던 시절이었다. 점차 한국인의 기호에 맞춰 짬뽕국물은 주황색으로, 더 나아가 아주 선명한 빨간색으로 바뀌어갔다. 빌로드천 같은 푹신한 쿠션에 겨울이면 좌석 밑 레이디에이터에서 뜨거운 열기를 뿜어주던 경인선 전철의 기억도 이제 사라져간다. 그때 중국집은 언젠가 작정하고 가서 찾아봤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화교 중국집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그런 가게가 흔했던 인천도 옛날 같지 않다. 그래도 몇몇 집이 아직도 남아 손님을 기다린다. 어린 날의 백짬뽕 맛은 아니겠지만 아직도 그런 짬뽕을 파는 집이 있으리라. 기름이 잘 녹아들어 진하면서도 뽀얀 그 국물맛을 볼 수 있을까.
◆ 박찬일 셰프
셰프로 오래 일하며 음식 재료와 사람의 이야기에 매달리고 있다. 전국의 노포식당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일을 오래 맡아 왔다.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등의 저작물을 펴냈다.
2025.12.11
박찬일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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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새 지평
국익 되찾은 6개월…"동맹 강화·갈등 완화·국민 안도"
지난 6개월 이재명 정부는 무모한 대북정책과 이념 중심 사대외교를 시정하고 국민을 위한 국익 증진 실용외교를 복원했다한미동맹 강화와 빈틈없는 안보태세 확립을 기반으로 대북정책은 소모적인 대립과 갈등을 지양하고 필요한 선제 조치까지 시도하면서 관계 정상화로 나아가고 있다.
홍현익 전 국립외교원장
국익 증진 실용외교 회복
지난 6개월 이재명 정부는 무모한 대북정책과 이념 중심 사대외교를 시정하고 국민을 위한 국익 증진 실용외교를 복원했다. 대외전략 편향을 시정하고 우리 대외전략의 주축인 미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 경시 자국 우선주의 추구를 견뎌냈다.
한미동맹 강화와 빈틈없는 안보태세 확립을 기반으로 대북정책은 소모적인 대립과 갈등을 지양하고 필요한 선제 조치까지 시도하면서 관계 정상화로 나아가고 있다. 대북 전단 살포를 막아 북의 오물 풍선을 자제시켰고 확성기 방송을 중단해 북의 호응을 얻었으며 국정원이 대북 홍보 방송을 중단한 데다 표류 어부도 송환했다. 상호 불신 심화의 여파로 아직 북한의 적극적인 호응은 없으나 소모적인 갈등은 사라졌고 국민은 안도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새롭게 선 민주주의, 그 1년' 외신 기자회견에서 답변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미국의 관세 공세가 거세 쉴 새 없이 한미동맹 재구축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지도자 간 확고한 신뢰 관계를 조성했고 강인한 의지로 미국의 과도한 요구를 최소화하면서 대미 투자금의 안전을 확보했으며 원자력 협정 개정과 원잠 건조의 쾌거를 달성했다.
일본과 갈등하는 중국과 달리 정부는 한일관계도 원만한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다자외교 성공이 가장 돋보인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와 아세안 정상회의 참가에 이어 미중 대립 속에 20여 개국 정상이 참석한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선언문을 도출하고 한국의 책임강국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 각국 정상들이 지난 10월 31일 경북 경주시 라한셀렉트호텔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환영 만찬에서 문화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은 서먹했던 한중관계를 정상화시켰다. 중동국가들 방문으로 실리를 증진하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글로벌 책임국가의 모습을 과시한 것도 국민에게 자긍심을 북돋았다.
향후 과제
건실한 기반은 다졌지만 갈 길은 멀다. 약속된 3500억 달러가 양국에 호혜적인 사업에 투자되도록 하고 원자력 협정 개정과 원잠 건설이 우리 국익에 적합하도록 실행돼야 하며 동맹 현대화도 호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내년 4월 방중 이전 이 대통령이 중국을 성공적으로 방문해 한중 전략적 협력이 순항하고, 북미 정상회담을 거쳐 남북관계에도 봄바람이 불어오도록 해야 한다. 러·우전쟁이 종결되면 한러관계도 정상화되도록 사전에 준비해야 한다.
◆ 홍현익 전 국립외교원장
27년 간 세종연구소에서 북핵문제, 남북관계, 한미동맹, 한러관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 한국의 국가안보와 국가전략을 연구했다. 한반도 정세 안정과 평화 구축 및 평화통일을 위해 화해와 공동번영 및 국익 극대화를 지향하는 실용외교를 주창해왔다. 국정기획위원회 외교안보 분과장을 맡았다.
2025.12.10
홍현익 전 국립외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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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경제다
'화폐주권'은 경제주권의 출발점
주권국가에서 '주권'이란 자국의 주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다른 나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현대 경제학에서는 경제문제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통화정책을 얘기한다. 그런데 독자적 통화정책의 전제조건이 화폐가치의 안정성 확보다. 즉 '화폐주권'은 경제주권의 출발점이라는 말이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물가와 환율이 회복세를 보이는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특히, 저소득층과 중산층 등 서민에게 부담이 큰 식료품 물가를 중심으로 물가가 잡히지 않고 있다.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5개월(6월~10월)간 전체 소비자물가가 0.9% 오르는 동안 식료품 물가는 3.3% 이상 올랐다. 물가와 더불어 원달러 환율이 계속 오르면서 달러 자산이 더 오르기 전에 사야 한다는 불안감으로 달러 자산으로 자금이 몰려가는 '달러 포모(Fear Of Missing Out, FOMO)' 현상도 확산하고 있다.
물가 불안도 사실 상당 부분 고환율과 관련이 있다. 지난 5개월(6월~10월)간 수입 물가를 보면 달러 기준으로는 상승률이 0.55%에 불과하지만, 원화 기준으로는 2.64%나 올랐는데 이는 원달러 환율이 2.07%나 상승한 탓이기 때문이다. 물가와 환율은 수입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구조에서는 사실 같은 문제이다. 물가는 화폐의 대내적 가치를 의미한다면, 환율은 화폐의 대외적 가치를 의미한다. 모두 화폐가치를 말하는 것으로 물가와 환율이 고공행진을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화폐가치가 취약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가 불안이나 환율 변동성은 모두 화폐가치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사실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11월 30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의 환전소에 환율이 표시돼 있다.(ⓒ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여러 면에서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있고, 실제로 높이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주권'에 대한 인식이다. 20세기의 식민지 역사와 그 연장선에서 완전히 독립을 이루지 못한 분단 상황에 있다 보니 안보 등에서 근대 주권국가의 위상을 갖추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근대 민족국가는 근대 주권국가와 동의어이듯이,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국가 운영의 중요 영역에서 '주권국가'의 틀을 확립하는 일이다.
주권국가에서 '주권'이란 자국의 주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다른 나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우리 사회는 군사나 정치 영역에서는 주권 개념이 익숙하지만, '경제주권(economic sovereignty)'은 인식이 매우 낮다. 반면, 미국 사회에서 경제주권의 확보는 당연시하고 있다. 현대 경제학에서는 경제문제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통화정책을 얘기한다. 그런데 독자적 통화정책의 전제조건이 화폐가치의 안정성 확보다. 즉 '화폐주권'은 경제주권의 출발점이라는 말이다. 모든 화폐발행권을 행사하는 중앙은행이 가장 중요한 임무로 '물가안정'을 삼는 이유도 물가안정과 화폐가치 안정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내적 화폐가치인 물가안정과 달리 대외적 화폐가치인 환율의 안정성은 오늘날처럼 국가 간 자금의 이동이 자유로운 개방경제에서는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외환 정책의 '트릴레마(3중의 딜레마)'라 한다. 화폐의 대외적 가치인 환율 안정성도 중요하기에 화폐주권을 확보하려면 투기적 자금 이동이나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 등으로 환율 변동성이 큰 상황에서는 국가가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해서 환율을 조절할 수밖에 없다. 국가의 개입 역량은 사실상 외환보유고에 달려 있다. 1991년 조지 소로스에게 공격당한 영국이나 한국의 1997년 외환위기 모두 환율을 방어할 외환 부족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로 한국과 싱가포르는 좋은 비교 대상이다. 싱가포르의 전체 소비자물가와 식료품 물가 상승률은 지난 5개월(6월~10월)간 각각 0.3%와 0.7%로 0.9%와 3.3%를 기록한 우리나라에 비해 매우 안정적이다. 개방도가 매우 높음에도 물가가 안정된 원인 중 하나가 같은 기간 동안 우리 환율이 2.1% 상승한 것과 달리 싱가포르 환율(미국 달러/싱가포르 달러)은 0.1% 상승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입물가 상승률을 보면, 앞의 기간 동안 한국이 2.64%를 기록했으나 싱가포르는 1.89%로 이 차이의 대부분은 환율 변동률 차이에서 비롯한다. 우리나라 수입물가 상승률 중 달러 기준으로는 0.55%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높은 환율 변동률을 우리나라 통화 당국자들은 이른바 서학개미 등 해외 투자의 탓으로 돌리며 논란을 자초하고 있는데,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가 언급한 우리나라의 순대외금융자산(Net International Investment Position, NIIP)은 싱가포르에 비해 매우 작다. 2014년부터 흑자인 우리나라 순대외금융자산은 2014년 809억 달러, 2019년 5178억 달러, 2024년 1조 1020억 달러로 증가해왔다. GDP 대비로도 2014년 5% 2019년 30% 2024년 59%로 증가해왔다. 그럼에도 원달러 환율은 2022년 2월 러우전쟁 이전까지 대체로 1100~1200원 사이에서 안정적 모습을 유지해 왔다. 게다가 비교 대상인 싱가포르의 경우 GDP 대비 순대외금융자산이 2014년 196% 2019년 235% 2024년 150%로 우리보다 몇 배나 높아도 환율이 안정적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싱가포르 통화당국(MAS, 싱가포르 중앙은행)의 높은 외환시장 개입에 있다. 미국 재무부는 미국과 교역 규모가 큰 국가들의 환율정책과 거시경제 상황을 대체로 반기별로 평가한 이른바 '환율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한다. 2019년부터 포함된 싱가포르는 올해 6월까지 12차례 중 미국이 요구하는 외환시장 개입 조건(GDP 대비 2% 및 8개월 순매수)을 한 차례도 지킨 적이 없다. 다음 표에서 보듯이 적게는 4.6%에서 많을 때는 28.6%까지 개입의 강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결과 경상수지 흑자 규모를 GDP 대비 3% 이내로 관리하라는 요구도 들은 체 만 체 한다. 12차례의 평균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약 18%에 달한다.
그럼 미국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수출경쟁력을 위해 환율을 조작한다는 지적에 싱가포르 통화당국(MAS)은 미국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자신들은 물가안정 목표 차원에서 외환시장에 개입할 뿐이라고 반박한다. 이러한 논리는 싱가포르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스위스 중앙은행(SNB) 등도 마찬가지로 대응한다.
사실 이러한 논리의 '원조'는 미국 연준이다. 2010년 가을부터 당시 연준의 버냉키 의장이 2차 양적완화를 시행할 것을 밝히자, 브라질, 인도, 중국 등은 미국이 1차 양적완화로 경기가 회복되었다고 말하면서도 또다시 양적완화를 시행하는 것은 달러화를 인위적으로 절하하고 신흥국 통화가치를 절상시켜 신흥국 산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며 미국을 비난한 바 있다. 이에 미국 연준은 양적 완화는 미국의 통화정책이라며 신흥국의 반발을 무시하였다. 오늘날 싱가포르 통화당국과 스위스 중앙은행 등은 미국 연준의 논리를 그대로 돌려주고 있을 뿐이다.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후인 1998년부터 지난해까지 GDP 대비 외환보유액 규모는 한국이 평균 23%에 불과하나 싱가포르는 82%에 달한다. 이처럼 싱가포르는 외환시장 개입과 지속적인 경상수지 흑자를 통해 높은 외환보유액을 축적하고, 이를 활용해 환율 안정은 물론이고, 기금 운용 수익으로 재정 지원까지 하고 있다. 외환보유액이 적다 보니 한국은 국민연금 활용을 거론하는데 국민연금은 물가안정을 목표로 하는 기금이 아니기에 미국에게 부적절한 외환시장 개입으로 지적받을 가능성이 있다. 화폐주권이라는 첫 단추를 잘못 끼다 보니 계속 어긋나는 것이다. 이재명정부는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 차원에서 '화폐주권'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자 최배근 경제연구소 이사장. 건국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사학회 회장, 민족통일연구소 소장, 대안학교인 민들레학교 설립자이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누가 한국 경제를 파괴하는가, 화폐 권력과 민주주의 등이 있다.
2025.12.08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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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일의 미래
AI를 쓰면 뭐가 좋은가요?
대한민국 정부는 'AI-네이티브(Native) 정부'를 지향한다명심해야 할 것은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버넌스를 바꾸고,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지 않는한 당신의 AI 프로젝트는 반드시 실패한다.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2019년 7월 탈북한 모자가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사망시점을 2개월 전으로 추정했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 최종 부검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여러 정황상 모자가 굶어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2014년에는 세 모녀가 생활고로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기초생활보장제도나 의료급여제도의 대상이었지만 혜택을 받지 못했다. 장애인, 한부모 가정 등 전형적인 취약계층으로 분류되지도 않았다. 송파구청 측은 "동 주민센터에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를 발굴하는데 박 씨 모녀는 직접 신청하지 않았고, 주변에서도 이들에게 지원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인공지능(AI)은 이런 가족들을 구해줄 수 있다. 소득, 재산, 건강보험, 고용 등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데이터들을 통합해서 분석하면 AI는 이런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선제적으로 예측하고 발굴할 수 있다. 복지사가 찾아가서 '사정이 아주 어려워지실 것 같은데, 이런저런 혜택이 있으니 받으시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산불은 해마다 나고, 그 규모는 매년 커진다. 여름이면 남해에 적조가 들이닥친다. 서울도 예외가 아니다. 강남이 물에 잠긴다. 기상청, 소방청, 지자체 곳곳에 이리저리 흩어진 데이터를 통합하고 연결하면 AI가 거들 수 있다. 과거 재난 발생 패턴, 실시간 기상 정보, 시설물 노후도 데이터를 AI가 결합 분석하면, 재난 발생 확률이 높은 지역과 시간을 정교하게 예측하고 사전 예방 조치를 지원할 수 있다.
청년들이 해마다 전세사기로 고통을 겪는다. 투기꾼이 갭투자로 수백 채를 사들이다 파산하면 피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강남에선 자기들끼리 사고파는 척하며 허위거래로 호가를 올린다.
부동산 등기데이터, 부동산 거래데이터, 국세청 세금신고 데이터, 도시계획과 개발정보를 통합하면 AI가 부동산 시장을 투명하게 하고, 세수를 확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실제 시장의 위험(전세사기, 다중담보, 허위거래)은 소유와 점유, 담보와 임대, 금융 데이터의 단절에서 발생한다. 이들을 통합하면 AI는 위법 의심 거래를 자동 추출하고, 다중담보와 전세사기를 바로 잡아낼 수 있다.
1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AI 서밋 서울 엑스포 2025'를 찾은 참관객들이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은 기고 내용과 무관함.(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국정감사 철이면 국회로 엄청난 종이 서류들이 들어간다. 의원들이 요구한 자료들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1톤(t) 트럭이 필요해 보이는 곳들도 있다. 다 읽을까? 디지털의 시대에 굳이 그 많은 종이를 그렇게 낭비해야 할까? 똑같은 자료를 의원실마다 종이로 받아보아야 할까?
정부-국회 문서 유통을 의정자료전자유통시스템으로 일원화하면 AI가 의원들을 도울 수 있다. 문서의 핵심을 요약해 주고, 관련해 국회에서 있었던 과거의 질의와 답변을 정리해 줄 수 있다. 그 질문과 답변에 이어서 올해는 무엇을 확인해야 할 지를 조언해 주고, 관련한 해외 사례를 알려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오간 모든 내용이 다시 의정을 돕는 AI의 학습에 쓰이게 된다. 아주 훌륭한 되먹임 구조다.
AI시대 맞는 '거버넌스'가 우선이다
자, 이제 위의 글을 다시 읽어보자. 무엇이 눈에 띄는가? 그렇다. 데이터 통합! 이곳저곳에 구슬처럼 흩어져 있는 데이터들을 하나로 꿰지 못하면 AI는 힘을 쓰지 못한다. AI는 데이터를 먹고 자란다. 각 부처가 사일로처럼 '이것은 우리 부처의 고유권한이니 건드릴 수 없다'를 되뇌는 순간 AI는 아주 비싼 장식품이 된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나온 최근 리포트는 AI 프로젝트의 95%가 실패했다고 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전략 부재: 많은 기업이 측정할 수 있는 명확한 목표나 투자성과(ROI) 기준 없이 유행처럼 AI 파일럿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통합 및 워크플로: 기존의 조직과 업무 관행을 바꾸지 않은 채 무턱대고 AI를 얹으려고 했다.
데이터 준비 부족: AI 모델을 학습시키고 활용할 수 있는 적절한 품질의 데이터가 준비되지 않았다.인력 및 문화적 요인: 기술 격차, 직원들의 저항, AI 활용에 대한 조직 문화적 장벽 등 인적 요소들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AI-네이티브(Native) 정부'를 지향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걸 그대로 둔채 AI를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처럼 얹어서는 될 리가 없다. 거버넌스를 바꾸고,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지 않는한 당신의 AI 프로젝트는 반드시 실패한다.
◆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KTH, 엠파스 등 IT 업계에서 오래 일했으며 현재 녹서포럼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IT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21년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눈 떠보니 선진국, 박태웅의 AI 강의 등이 있다.
2025.12.01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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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를 넘어
AI 영상기술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언젠가 AI 예술의 꽃이 피어나겠지만, 우리가 앞서서 시간과 열정과 전기와 돈을 들여 쌓아가야하는 이유를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선택권 없이 비민주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기술에 대해 느리지만 확고하게 책임있는 성찰을 할 집단 지성이 필요하다.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날이면 날마다 쏟아져나오는 생성형 영상 AI 소식으로 미디어가 매우 부산하다. 뭐든 나오자마자 남보다 먼저 써봐야 성이 차는 한국의 열성적인 유저들은 새로운 서비스가 나오자마자 써보고 그 결과를 SNS에 공유한다.
한국 소비자들의 이런 빠른 신기술에의 반응과 소셜미디어와의 연결성은 이미 90년대 싸이월드와 천리안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업혁명은 늦었으나 정보혁명으로 따라잡겠다는 80년대 말이나 90년대, 아니 더 거슬러서 개화기로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평생 종이신문을 보시던 30년대생 부모님들이 컴퓨터의 등장과 더불어 종이를 버리고 스크린으로 신문을 읽고 한국의 어르신들이 화투와 카드놀이를 화면으로 즐기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었다.
이세돌 기사가 알파고와 대국할 때 이 사건은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전 국민이 그 신기한 4국의 78수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기이한 장면이 생산되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바둑을 전국에서 열띠게 시청하는 분위기를 당시 프랑스 출장 시 만났던 프랑스대학의 동료교수들에게 설명하자, "아, AI문제는 동아시아에서 고민하세요, 우리는 노동문제를 고민할테니"라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세돌 9단이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 특별 대국장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구글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의 제5국 맞대결을 펼치고 있다. 2016.3.16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한국이 겪은 압축적 근대화의 정기능일지 부작용일지, 한국은 모든 새로운 것에 매우 민감하다. 우리는 사회의 변화에 빨리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것을 세대간 전승했고 이 감각과 태도를 내화했을 것이다. 이런 경향은 소비재 분야에서는 유행민감성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산업과 인류의 미래를 뒤흔들 새로운 기술인 경우, 장기적으로 좋은 효과를 가져올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인간의 육체노동을 기계화한 산업혁명에 버금간다고 보이는 지식노동의 외화와 기계화 과정인 AI의 전방위적 영향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이 새로운 힘의 사회적 제어방식에 대한 합의 뿐 아니라 미래학적 전망이나 철학적 숙고가 없는 상태에서 한국사회는 지금 전속력으로 AI 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과 함께 자국어기반 AI를 발전시킬 수 있는 인프라를 지닌 나라라는 사실은 디지털 문화에서 빨랐던 90년대와 에너지 넘치는 한국민, 그리고 한글의 힘에 감사하고 자긍심을 지닐만한 일이지만, 이것이 지금 AI에게 부여한 중요성, 속도, 방향을 정당화해주는 일은 아니다.
가까운 기억만으로도 블록체인 '혁명'과 메타버스가 가져올 '이상적 미래'에 대해 뜨겁게 달아올랐었으나, 지금 이 기술들에 대한 그 막대한 투자가 어떤 긍정적 결과와 이익을 가져왔는지 보이지 않는데, 다시 모든 국가적 프로젝트에 AI가 키워드로 등장하지 않으면 성공의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시간을 맞이했다.
AI는 기존 모든 신기술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장기적이고 불가역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 예견되기에 어쩌면 직접적인 비교는 적당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생성형 영상 AI의 사용은 결과가 매력적인 만큼, 영상산업을 밑에서부터 뒤흔들고 있다. 벌써 짧은 광고와 홍보를 AI영상이 대체하면서 실사 영상장비 대여회사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넷플릭스 등 OTT들의 진출과 더불어 제작비는 상승하고 제작은 줄어드는 현실에 AI의 충격파가 더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AI가 반드시 나쁜 변화를 초래하리라는 묵시록적 예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이 발명되어 초상화가들이 직업을 잃었으나 새로운 예술이 태어났고, 영화가 등장했을 때, 그리고 TV가 등장했을 때, 기존의 영상기술들은 변화에 적응해서 새로운 자리를 찾았다. AI도 장기적으로는 무엇인가를 없애고 변화시키고 새로운 실천과 생산을 가져올 것이다.
당장 사용가능한 서비스들의 실력이 예상했던 것만큼 훌륭하지 않고 바로 버려질 유사영상들을 양산하고 있는 동시에, 존경받는 영화감독들이 AI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가장 AI 친화적인 판타스틱 장르의 영화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는 절대로 영화에 AI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최근작 프랑켄슈타인은 자연광과 세트촬영, 전통적인 미술의 창의성과 따스함, 촬영현장의 분주함과 집단적 에너지를 최대한 담고 있다.
어쩌면 AI가 오히려 전통적 영화제작방식과 감독들의 정체성, 창의적 스토리, 영화적 세계관, 고집, 철학이 더욱 빛을 발하는 신작가주의 시대를 가져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서 AI를 활용한 일반인의 표현력은 증가하고 창의적 감독들은 더욱 개인적 터치를 강화할 영상생산의 양극화가 예상된다.
독립기념관과 SK텔레콤이 광복 80주년을 맞아 AI 기술로 복원한 독립운동가들의 생생한 모습과 목소리를 담은 특별 영상을 공개했다. 2025.8.14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다른 한편으로 AI를 적극 받아들이는 창작자들도 등장하고 있다. 만화가 이현세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의 영생을 위해 기존 작품을 AI에게 학습시키고 웹툰 그림을 생성하는 프로젝트에 동의했다. 음악분야에서 베토벤이 완성하지 못한 교향곡 10번을 베토벤 전체 음악을 학습한 AI가 완성한 것과 유사한 프로젝트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프로젝트의 기획자들은 과연 수용자가 이런 산물을 원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는다. AI가 작곡한 피아노 콘체르토를 연주할 피아니스트가 있을 것인가, 그 콘서트에 표를 구매해서 들으러 갈 청중은 있을 것인가. 어디서 본 듯한 색감과 얼굴, 장면의 연속인 영상을 계속 보고 싶을 것인가.
우리는 "이거 AI 산이야" 라고 하면 바로 흥미가 떨어지는 것을 벌써 경험하지 않는가. 거대한 AI 쓰레기 더미 위에서 언젠가 AI 예술의 꽃이 피어나겠지만, 이 쓰레기 더미를 우리가 앞서서 시간과 열정과 전기와 돈을 들여 쌓아가야하는 이유를 모두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아무도 이 거대한 AI 프로젝트가 잡아먹는 엄청난 전기가 유발하는 환경문제를 걱정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이 또한 AI를 둘러싼 열기가 가져온 기묘한 생각의 마비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선택권 없이 비민주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기술에 대해 느리지만 확고하게 책임있는 성찰을 할 집단 지성이 필요하다.
◆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한류 연구자로 정진하면서 팬덤 온라인 참여관찰로부터 데이터 분석까지 다양한 연구방법을 거쳤으나 스스로는 여전히 세상 속 의미의 생산을 묻는 기호학자라고 이해한다. 세계화와 디지털문화시대의 한류, 드라마의 모든 것, BTS길 위에서를 출판했고 넷플릭스의 영향, 한국문화산업, 한류현상의 이론화를 위해 국제적 연구자 네트워크를 가동하며 다년간 연구 중이다.
2025.11.28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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